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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 칼리스투스는 엘프 사회에서 크게 여겨지는 인물이다.
“내 전에 그대에게 베풀었던, 빚을 이제야 받고 싶네. 목소리를 함께 내주었으면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녀가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소모하고, 만나서 설득하여 거대한 대회의장에 모든 엘프들을 모았다.
“뭐, 아는거 있어?”
“벨룸 퓨에르 중 가장 뛰어난 자가 모든 영향력을 썼다더라. 이렇게 안건이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모은 건 최초라고 하던데.”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있는 거대한 대회의 장의 설립 이유는 직접 투표제의 실현이었으며, 실제로 기능도 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에 엘프들이 여유가 있는 삶에 가장 먼저 들어섰다. 모든 엘프가 하나의 도시에 모여서 살기에 가능했다.
“그럼 불법 아냐?”
“불법은 무슨, 그러면 네가 총사령관 할래?”
“그건 아니지. 그 귀찮은 걸 내가 왜 해?”
드낙의 언질이 있었기에 엘프들은 태어나는 엘프들에게 업 소매 넣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삶은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는 연결로에 자신들의 쌓인 업을 보내버리면 그만이다.
웅성거리는 이들 중에는 칼리스투스와 같은 18인의 벨룸 퓨에르들도 마찬가지였다.
“들은 거 없어?”
“국제 연합 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다고만 들었을뿐…….”
말을 줄이던 카산드라가 고개를 홱 돌렸다.
눈 밑이 검게 변한 용기의 에르하르트가 엄청나게 심란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는 전투가 있을 때 항상 선봉장을 서는 맹장(猛將) 중 맹장이다. 그런 그도 뜨낙의 말 한마디에 사골처럼 변해버렸다.
“넌…….”
말을 하려던 카산드라가 이내 입을 다물고 그를 외면했다.
엘프 신이 될 유력한 후보가 에르하르트인건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드낙이 말했기에 그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지 못해서 억지로 수면제를 먹기도 했다. 자살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진짜 죽고 싶은 이들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자살하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자살을 쉽게 여기는 이들이고, 그들은 절대자살하지 않는다. 그 무서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칼리스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의 모습을 지닌 그녀는 아름다운 칼리스투스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다재다능하고, 뛰어나기에 엘프 노괴들의 농간으로 여성형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너무 대단하면 하나라도 결점을 만들어야 했고, 그건 육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에르하르트와 체중 차이만 해도 20kg 이상 났다. 권투체급으로 치면 어마어마한 차이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엘프들은 가히 80만까지 인구가 늘어났다. 파견 엘프들조차도 공간이동을 통해서 최대한 달려왔다.
젊은 엘프가 대다수였고, 그들은 하나같이 현명한 녹안을 빛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기에 어리석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 짓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들이다. 내가 그랬기에 상대도 그렇다고 여기는 사이코패스들이다.
“오늘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 대회의실은 쉐도우 위스퍼의 위험을 막기 위해서 마법적으로 차단되어 있고, 물리적으로도 지하까지 단단히 봉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들었던 이야기는 밖에서 절대로 언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자신이 없는 분들은, 환상 마법을 통해서 기억 혼란이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 다.”
기억 소거는 불가능하다. 대신 개꿈을 꾼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얽히고설킨 기억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엘프들이 자신들의 비밀을 그런 식으로 지키는 편이었다. 필요하다면 엄중히 관리되고 있는 정보 탑에서 취득할 수 있었다. 칼리스투스는 이를 다시 확인시켜준뒤에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엘프의 역사는 중립신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살과 피에서 태어났습니다.”
칼리스투스가 빙긋 웃으며 드워프에 대해서도 말했다.
“드워프들은 뼈로부터 나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두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주의를 환기하는 데는 도움을 줬다.
그녀가 노래하듯이 말했다. 정신과 영혼이 노쇠하여, 어리고, 젊은 엘프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엘프 노괴에 대해서 노래할 때는 음침하고, 어두운 말투로 음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중립신과의 싸움에 용맹하게 나섰던 전 엘프 종족의 위대한 종족성에 관해서도 노래했다.
“권속 악마가 되어 우리는 초월의 계단을 막고 있는 벽 또한 허물었도다.”
그 노래는 그렇게 끝이 났다.
마침표를 찍었다. 바이브레이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가위로 싹둑 자르듯이 끊어졌다.
조용한 침묵이 이어지고, 칼리스투스가 봄바람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엘프들의 행복한 삶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노래했다.
이를 듣는 엘프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생존자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끔찍했던 삶이다. 그는 가학적인 엘프 노괴에 의해서 매번 생손톱을 뜯겨야 했다. 제대로 고통스러워하지 않거나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면 발톱까지 뜯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이 현실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다시금 상기하는기회가되었다.
서사시를 노래로 끝낸 칼리스투스는 이내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고정된 존재입니다.”
엘프들은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을 느꼈다. 칼리스투스의 아름다운 목소리 속에 가시가 돋쳐 있어서 듣는 귀와 마음이 답답해졌다.
“초월의 계단을 올라가더라도 변하는 건 ‘힘’과 ‘격’. 그것뿐입니다. 지금 엘프 사회를 보십시오. 다른 종족이 저희와 함께 있습니까?”
모두 대답하지 못했다.
“교류하는 다른 종족은 도시에 들어올 수는 있지만, 일정 구역 내로는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는 종족은 오직 엘프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스투스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세 번의 증축으로 원형경기장 같은 모습이 갖추어졌고, 그 중심에 의장이 설 수 있다. 중심에 있는 단상을 주위로 모든 것이 엘프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칼리 스투스는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듯이 움직였다. 능숙한 스피치 스킬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정체되어 있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몇몇 엘프들이 용감히 반론하기 시작했다.
칼리스투스가 손을 그에게 가져다 대자 그가 일어섰다. 자연히 목소리의 성량을 높이고, 소리를 퍼뜨리는 마법이 이루어졌다.
“제 이름은 리아트(Liat)라고 합니다.”
“발언을 허락하겠습니다.”
“엘프는 초월의 계단을 걷고 있습니다. 신이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찌 고정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수많은 마법 아티팩트부터 시작해서 마도 기술은 무한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칼리스투스가 말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강대해진 존재가 된다고 해서 우리의 정신이 고등해집니까. 다종족 연합이라는 터에 맞는 모습을 지니고,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예.”
그렇게 확답하는 이에게 칼리스투스가 답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을 구축했습니다. 그걸 듣고도 그렇게 수긍할 수 있습니까?”
이에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서 있던 리아트라는 타락 엘프도 이내 할 말이 없는지 앉았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종족성이다.
엘프들의 현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그릇에 담긴 물처럼 고요하다. 그저 그 그릇의 형태만 달라질 뿐 물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다른 엘프가 일어섰다. 칼리스투스가 그에게 손을 펴서 대우해 주자 그가 일어섰다.
“그래도 과거와 비교하면 그래도… 확실히 변했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역사를 두고 현재가 좋다고 말하는것이 더 발전적입니까. 미래를두고 현재를 비교하는 것이 더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미래를 보고 현재를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교과서적인 말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칼리스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열정을 목소리에 담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없이 변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나약한 인간도 매해 변화하고, 나아갑니다. 때로는 도태되거나 타락하지만, 그 속에서 또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질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곳에 씨앗을 심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칼리스투스는 자신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타락 엘프, 디아볼로스, 벨룸퓨에르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논파하였다.
그 과정은 15시간이 넘게 이루어졌다.
이내 모든 엘프들이 칼리스투스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집을 부리지 않고 편견에 듬뿍 빠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엘프들은 아직 젊고, 그렇기에 더 좋은 사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엘프의 탄생부터 우리의 종족성은 결정됐다.”
“중립신으로부터 잉태되었기에 이는 피할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 자신이 만든 매듭이다.”
“자신이 만든 매듭을 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바로 우리다.”
결자해지(結者解之). 매듭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말처럼, 칼리스투스는 엘프들의 고정성은 엘프들이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큰 울림을 만들어냈다.
내가 할 일을 내가 마무리 짓는다. 내가 나를 책임지고, 변화시킨다. 나 스스로 정당해지기 위해서! 이를 마주하는 순간 엘프들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드높아지는 순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존감이 위대해질 기회다.
“끝없이 고이고, 썩어버리는 종족성을 변화하지 못한다면 엘프의 역사는 똑같이 되풀이 될 것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 뒤에 어느새 자신을 괴롭혔던, 수많은 엘프를 죽이고 즐겼던, 그런 노괴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저는 여기서 직접 투표를 했으면 합니다.”
칼리스투스가 백금 카드를 들어 올렸다. 백금 카드는 이미 준비해 둔 것처럼 깃발로 변해갔다. 새하얀 백색의 깃대와 깃발이었다. 바라보면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내뿜는 백색의 깃발이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백색 빛 엘프(White Shine Elf)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모든 엘프의 귀로 들려왔다. 단하나의 검은 점도 없이 사회를 끝없이 정화시키고 변화시키는 엘프들의 결단이 단어와 깃발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났다.
* * *
“어때요? 맛있죠?”
드낙은 아스톨포에게서 추천받았던 찻집 겸빵집에 레이시아 플래티넘을 데리고 왔다. 둘은 창가에 앉아서 햇살을 느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일품이에요. 여기 여주인은 정말 명망 깊은 가문에서 종사했었던 것 같아요.”
그저 함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녀는 갓구운 빵의 고소함은 이야기하지 않고, 차에 대해서만 떠들어대었다.
홍차의 떪은 맛이 나지 않는 비법은 감히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또, 미약하게나마 과일 향도 풍기는 것이 다른 첨가물도 조금 들어간 것 같다며, 그것이 떪은 맛을 중화시키고 풍미가 가득한 향을 내뿜는다고 했다. 드낙은 몰랐지만 듣고 보니 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조예가 깊은 이와 함께하면 떡이라도 떨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사람에게서 배울 점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를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드낙은 쉽 게 행할 수 있었다.
“다른 부인들은 만나셨어요?”
“당신이 첫 번째요.”
“그런 걸 걱정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가정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셨으면 해서요. 다른 부인들이 나 자식들한테요.”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논공행상이 코앞이라…….”
드낙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그녀는 테이블위에 손을 올려서 뻗었고, 드낙은 이를 자연스럽게 잡고 포개었다. 부드럽고 차가운 그녀의 손은 계속 만지작거리고 싶은 느낌이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저는 만나고 다른 가족을 만나지 않으면 제가 많이 곤란해져요. 절봐서 라도…….”
“알겠어요. 그것보다 미술관 운영은 어떻게, 잘하고 있어요?”
“후원금이 많아서 골치에요. 몇 번을 말해도 듣지를 않아요.”
“게제라스 총리에게 말해 놓을게요.”
그 말에 레이시아가 깜짝 놀라서 이를 말렸다.
“아니에요! 제가 그건 어떻게든 풀려 하고 있고, 그냥 후원금을 복지나 그림 문화 쪽으로 돌릴 생각이에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좋은 예술가는 발굴했어요?”
이에 레이시아가 웃었다.
“그림이 다 아름다운데, 좋고 나쁜 예술가가 어디에 있어요? 그림 속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운걸요.”
레이시아는 비싼 예술이 아니라 대중 미술쪽을 크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가 그려갈 커리어를 생각하며 드낙 또한 나쁘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찻집을 나서며 레이시아는 여주인을 뵙고 싶다고 정중히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주인에게 물었다.
“다음에 방문할 때, 그림 한 점을 선물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풍경화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여주인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싫든 좋든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림의 종류를 제한한것은 그녀 다름대로의 고집이었다.
드낙은 그다음에 세리안에게 편지를 썼다.
‘논공행상이 잡혀있는 공왕과 만나는 건 어리석은일이지.’
피해야 할 일이다. 의외로 드낙은 정에 약하다. 세파리아스에게 악마의 요람, 가비노를 줄정도로 통이 크기도 했다. 그녀와의 만남은 뒤로 미루고 싶어서 편지로 남겼다.
‘다음은…….’
레이시아의 말을 지킬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