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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에 뭐가 있어? 악마 대침공은 30년도 더 남았잖아.”
크레시미르가 미소를 지었다. 다이앤타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여동생은 괴롭혀야 제맛이 다.
요즘 다이앤타가 도서관도 제법 들락날락하고, 세리안으로부터 질 나쁜 처세술을 받아서 기분이 안 좋았었다.
“더 짧아질지도 모르고.”
“뭐가 더 짧아지냐니까?”
다이앤타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크레시미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연스럽게 좌우를 살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이들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찍히면 큰일 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인지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이다.
“다른 이들도 지식을 탐구하러 왔는데, 목소리를 좀 낮춰라.”
“그러니까 빨리 말하라니까.”
“별것 없다. 그때 그저, 널 뛰어넘을 뿐이다.”
“흐흐.”
다이앤타가 경박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나오는 웃음이었다. 크레시 미르가 만용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가? 그 어떤 자식도 다이앤타보다 악마의 힘을 잘 받고 태어난 자가 없었다. 우월 인자가 우성인자라고 생각하는 건 바보같은일이다.
호랑이로부터 개새끼가 나오는 게 괜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열등하다고 열성인자가 아니며, 열성인자도 우성인자가 될 수 있다.
우월과 우성인자가 무조건 함께 묶인다는건 엘리트주의에 휩싸인 이들의 편협한 생각일 뿐이다. 인간의 진화가 제멋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자식 또한 엄마를 닮을지 아빠를 닮을지 모를 일이며, 정도의 차이도 제멋대로다. 쏙빼닮은 이가 있는가 하면 외삼촌을 닮거나 할아버지를 닮는 경우도 많다.
그 탓에 다이앤타의 자존감은 정당했다. 그자손도 쿼터 데몬이라 칭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수준의 악마 힘을 지니고 태어났다.
다이앤타는 가히 최고의 악마 인자를 받았다. 그 힘은 대단하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크레시미르보다 덩치가 작아도 더 무거운장비를 입고,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건 당연하고,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신성력이나 치료마법 없이도 상처가 빨리 치유되는 것은 당연하다.
육체는 말할 것도 없고, 마법을 행사하는 데에도 악마의 힘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육체의 그릇이 크기에 더 많은 마력을 보유할 수있다.
즉, 악마의 힘은 육체의 힘이기에 육체가 강인하고, 그 그릇이 크기에 초월적 힘도 높았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앤타는 더 빨리 반마급에 들어설 수 있다.
드낙으로부터 권능을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업을 받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필멸자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드낙의 음흉한 구석이 잘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세리안과 다이앤타는 독립 의지를 밝혔고, 이를 인지한 드낙은 다이앤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반신보다 반마가 더 빨리 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쿼터 데몬이 하프데몬이 되는 건 상위인간이 반신이 되는 것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
크레시미르는 마력을 갖고 태어났지만, 반신이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자신에게 신앙심을 바칠 이들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진행도는 차근차근 높아지고 있긴 하지 만, 한계는 분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날 꺾겠다고?’
말도 안 된다. 하지만 크레시미르는 거짓말을 하는 자가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크레시미르를 만능의 왕자라 부르는 이유가 괜한 게 아니다. 그는 왕의 재목으로 논해지고 있었다.
크레시미르는 입을 조금 벌린 채 가만히 있는 다이앤타를 보다가 미련 없이 일어섰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이앤타는 몰랐지만, 그녀가 차원 전쟁에 나섰을 때 크레시 미르는 불파겐의 경지 중에서 최상급에 해당하는 일류의 흐름을 터득해냈다.
플래티넘 왕가의 왕비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재(武才)가 뛰어남을 입증시켰다. 다이앤타와의 경쟁 덕분이었다.
노력하는 천재. 그게 바로 크레시미르 불파겐이다.
“잠깐. 뭘 그렇게 도발만 하고 가는 거야? 날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너보다 훨씬 빨리 반마에 도달하고, 초월자의 계단을 올라갈수밖에 없어. 그게 진리고, 법칙이야.”
그 말은 명확했다.
쿼터 데몬인 다이앤타는 드낙으로부터 업을 받아먹고 있었고, 자신의 것으로 삼아 지금 이순간에도 반마로서의 격을 갖추고 있었다. 크레시미르는 지금 그걸 뛰어넘겠다고 말한 것이다.
“얼마나 높은 차이가 있는지 체감을 못 하는거야?”
“체감 못 할 리가 있나. 난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크레시 미르는 고개를 돌리고 다이앤타를 향해 한마디 했다.
“진정으로 내가 그 격차를 뛰어넘는다고 말하고 있는거다.”
다이앤타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자신이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을 상대가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장대한 모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고, 그 모험에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걸 인지했다. 듣기만 해도 재밌어 보였다.
저벅, 저벅!
다이앤타가 크레시 미르를 따라잡으며 말했다. 길고 붉은 머리카락이 경쾌하게 흔들렸다.
“그런 선전포고를 해도 괜찮겠어? 나 또한 죽을 기세로 노력할지도 모르는데?”
“마음대로. 그리고 더는 따라오지 마라. 난 나대로 할 일이 있으니까.”
크레시미르의 말에 다이앤타는 걸음을 멈췄다. 이내소리를 질렀다.
“10년 뒤에 지는 놈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다!”
그 말에 크레시미르 또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다이앤타는 자연히 한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한 번 해보자.’
그녀가 몸을 돌려 크레시 미르와 정 반대편으로 걸어 나갔다. 흥분도 잠시, 그 표정은 진지하고 냉정해 보였다.
복도를 걸어가던 크레시미르의 눈에는 강렬한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기부여가 되어서 열정이 가득했다.
‘미래를 생각하면 할수록 절망스러웠지.’
그 속에서 빛이 되었던 건 드낙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파리아스였다. 세파리아스와는 핏줄로는 이어져 있지도 않았다.
다이앤타는 세리안의 딸이며, 크레시 미르는 레이시아의 아들다. 플래티넘 왕가의 손에 죽은 세파리아스가 크레시미르를 돕는 건 말도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세파리아스에게 플래티넘 왕가는 정상참작이 가능한 가문이었다. 결국, 그는 엘프 기사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 다.
그 덕에 크레시미르는 세파리아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에게 미운 정이 있어서 상냥하게 못 대하지만 크레시미르에게 상냥함을 내려줬다.
드낙이 세파리아스에게 욕먹은 만큼 크레시미르가 그 덕을 본 것이다.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관련이 있는 게 세상의 논리다.
[잘 들어라 드낙의 아들아. 무(武)의 단련은 부딪힘이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라. 손부터 세상과 부딪혀라. 이를 먼저 증명해라.]
손에서 피가 흐르고, 여린 피부가 까졌다. 그곳에서 굳은살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바로 세상과 부딪쳤다는 훌륭한 증표인 것이 다.
그 증표가 새겨지고, 더는 손에서 피가 흐르지 않았을 때, 크레시미르는 거대한 진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단련하는 것은 곧 세상과 부딪친다는 것. 종국에는 세상 전체를 마주할 수 있다는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시미르는 ‘그런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쏟아부은 것이다. 그건 크레시미르의 구성성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저 검을 많이 휘둘러서 생긴 피와 굳은살이 만들어낸 것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창하다.
하지만 이미 선례가 존재했다. 시간을 뛰어넘고, 과정을 부수고 초월자를 죽이는 검을 만든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있다. 누군가가 해냈다면, 자신 또한 해낼 수 있다고 여겼다.
‘난 흐름(Stream)을 터득할 것이다.’
영향무력(影響武力)의 열화판인 흐름(Stream).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초월자로서의 길을 강제로 움켜쥐고 올라갈 것이다.’
다이앤타는 누구보다 먼저 반마에 들어설것이다. 이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영향무력이 절실하다.
크레시미르의 발걸음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 * *
총사령관 칼리스투스. 그녀는 벨름 퓨에르중에서도 으뜸이며 현재는 디아볼로스다. 그녀는 논공행상을 위해서 국제 연합 도시에 머물고 있다.
그녀는 신제국의 황제인 세파리아스 불파겐과 마주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세파리아스는 아직 반신(半神)임에도 영향무력의 힘 덕분에 초월자나 다름없다. 아마, 세상이 정해 준 자신의 수명조차도 검으로 가를 수 있을것이다.
그 자신감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드낙과는 현격히 다른 위협이었고, 피부에 와 닿는 위험이었다. 드낙이 숨긴다면 세파리아스는 드러낸다. 칼리스투스는 그 차이를 깊게 체감할 수 있었다.
“뭘 가만히 있는가? 왔으면 제안을 해야지.”
칼리스투스는 그 오만한 태도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엘프의 녹안 덕분에 싫어도 거대한 분노에 몸을 던질 수가 없었다.
“지하 연합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건가.”
그 말을 들은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신제국은 내부 알력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영향력은 3년만 지나도 막강해질 것이다. 수많은 자원을 독점할지도 모르지.”
드낙의 경제 부흥 정책은 너무 잔혹했다. 많은 필멸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만 어둠은 반드시 존재하다. 대표적으로 독점 판매가 있다.
특히나 지하 연합의 식량이 독점될 수밖에 없었다. 워느t 많이 생산되기에 경쟁 자체가 되질 못 하는 수준까지 오는 건 당연하다.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군. 독점 경제는 드낙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고 있고, 애초에 축산업도 골렘으로 대체하고 있는 와중에 뜬구름 잡는 소리다.”
세파리아스는 오히려 엘프들을 지적했다.
“마도 사회에 먼저 들어섰던 엘프들의 지식은 끝도 없지. 그대들이 독점하고 있는 아티팩트만 해도 수십 가지는 되지 않나? 지하 연합에게 따라잡힐까 봐 두려운 것이겠지.”
다른 이들은 생산을 포기했다. 유일하게 지하 연합만이 엘프들의 상품들과 견주는 것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감안했을 때, 엘프들이 지하 연합을 견제하려는 건 당연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칼리스투스는 단칼에 잘라냈다.
“지하 연합 같은 하등한 종족성을 지닌 것들이 어찌 엘프들과 견줄 수 있는가.”
세파리아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편협한 것임을 인지시켜 주듯이 콧소리를 냈다. 그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칼리스투스는 마음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버러지 같은 놈이.’
그럼에도 표정 변화는 없었다. 드낙에게 굴종한 전적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한가지 제안하지.”
세파리아스가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칼리스투스는 그것이 모두 예견되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그물에 걸린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함정인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들어보지.”
“논공행상에서 노획품과 용병 지구인에 대한 배분 지분이 결정될 것을 그대도 알고 있을터다.”
“그걸 건드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누가 건드리라고 했나? 단지 지하 연합이 1등에서 2등이 되면 되는 것 아닌가.”
세파리아스는 순식간에 표정을 숨기는 칼리스투스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차원 전쟁의 노획품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 많은 실수와 위험한 실험을 감행할 수 있지. 지하 연합이 가장 많은 노획품을 가져갈 건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나눠서 받겠지.”
“그걸 하나로 합친다!”
칼리스투스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견제’가 아니라 ‘협동’이었다. 항상 남을 내리깔고 시작하는 엘프로서는 하기 힘든 생각이었다.
자기계발서가 발상의 전환을 하라고 고래고 래 고함을 지르지만, 그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자기계발서에서 하는 말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 뿐이 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수능과 수시를 잘하면 됩니다. 인생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돈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결혼을 위해서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 것에 불과하다.
세파리아스가 엘프들의 맹점을 찔렀으니, 감탄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야, 불파겐이라고 할 수 없다.
“엘프는 노획품과 용병 지구인을 포기해라.”
“뭐라고?”
칼리스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