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1000화 (999/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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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자치왕국은 공왕 없이도 대충 돌아갈 수 있었다. 엘리트주의를 채택했으며, 귀족주의가 만연해있었기에 가능했다.

신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눈썰미가 대단한 것이 세파리아스였고, 그가 잡아들이고, 협박하여 앉히고, 가족에게 큰돈을 주어 수도에 살게 하거나 자녀에게 큰 교육을 시켜주고 그 꿈을 실현시킬 가능성을 제시하거나 독을 풀어 굴복시키는 세파리아스에게 저당 잡힌 인재들은 빛나는 별과도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인류 찬가를 통해서 모든 신민들이 영차영차 하는 분위기였다.

거기에는 상위인간에 대한 비난도 존재했다.

본디 인간은 마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그저 운에 기대야하기 때문이다. 그 적정 수준은 전체 인구의 3% 미만이라는 수치를 말하는 학자도 있었지만 제대로 객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인간다운 것’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라 신제국만의 인간다운 것은 기괴하게 비틀리고 모순적인 논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완벽했다.

인간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거의 대부분 인간이 이런 ‘인간주의’를 믿고 따르고 있었으며 다른 이들에게로 이를 전파하여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삶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해방 독트린(Liberation Doctrine)>.

이는 신제국의 가장 큰 국의(國依)였다. 모든 것보다 우선되는 교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드낙은 자치왕국을 방문했을 때, 의외의 결과를 맞이했다.

“...그래서 갈라지자는 것인가?”

세리안이 귀찮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을 논하는 것에 대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이 아니지. 그저 공을 따로 보고하여 각자에게 맞는 것을 받자는 것이다.”

아크온과 길게이는 더욱 그녀를 회유하려고 애를 썼는데, 도렌 공왕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도렌은 자치왕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낮았다.

수많은 것을 나눠준 대가로 그는 피라미드의 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경쟁조차도 되지 못했다. 다른 3명의 공왕은 자신의 세력과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돈을 쓴 반면, 도렌은 다른 이에게 베풀어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상황에서 도렌은 가장 하찮은 공왕이었으며, 가장 약한 공왕이었다. 약자를 돕는 순간, 정해진 미래였으며 결과였다.

도렌 홀그린(Doren Hallgreen)은 이를 알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였다. 그 길이 가시밭길임에도 자신과 같이 비교당하는 다른 공왕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는 길임에도 우직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진정하시지요. 논공행상의 아래에 향할수록 받을 수 있는 건 적어지는 것 아닙니까. 다종족 연합의 세수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기본이라고 해도 많은 것을 적게 받게 될 겁니다.”

도렌이 거듭 제지하였음에도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건 드낙이었다.

‘세파리아스가 우려했던 것이 이렇게 극명하게 나타날 줄이야.’

사공왕 체제의 단점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앞두고 극심해졌다. 알아서 어련히 타협할 것이라 여겼던 드낙의 실패였다.

이들 공왕 4명은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드낙은 그 기류를 파악했다. 길게이와 아크온은 도렌을 똥개로 보고 있었고, 세리안을 회유하고 있었다. 세리안은 거부했다.

“자치왕국의 공을 하나로 합치지 않고, 넷으로 나누다니. 제정신이냐!”

그 일갈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나타난 드낙 때문에 순간 머리가 정지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그 속에서도 세리안은 떳떳했다.

문제는 결국 길게이와 아크온이었다.

반면 도렌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다른 공왕과 같이 숙이고 있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대저택의 탁 트인 수백 평의 방 안에서 드낙이 의자에 거침없이 앉았다.

이내 그가 아크온 몽펠리에에게로 눈을 향했다.

“이제 빛으로 가득할 일만 남았는데, 이렇게 분쟁만을 일삼다니. 북부 귀족은 예나 지금이나 그걸 조절을 못 해.”

“......”

그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더욱 나빠진 드낙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치왕국의 전체를 성장하지 못하고, 공왕끼리만 해 처먹겠다는 그 심보가 잘못됐다는 거다.”

“죄송합니다.”

길게이와 아크온이 모두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이에 세리안이 드낙에게 말했다.

“용서해주시지요. 세파리아스와 경쟁하려면 이 방법이 가장 현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들을 옹호하는 거라면, 너도 용서 못 한다.”

드낙이 검지를 들어 올려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이에 세리안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완벽하게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알아서 어련히 해라.’고 말하지 않는 드낙의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툭툭 튀며 최소한의 변수만을 제공했었던 드낙은 사라지고, 그의 새로운 면모가 흉악하게 들어왔다. 공간이 변한 것처럼 공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드낙이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며 꼬았다. 손에 깍지를 꼈다.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숨 막히는 시간이 시작됐다. 그 시간 속에서 가장 용감하게 나선 것은 도렌이었다. 세리안은 드낙에게 손가락질까지 당했으니, 나설 수가 없었다. 찍히고 또 바로 얼굴을 드리밀 수는 없었다.

그건 가장 기본적인 화법이다. 누군가가 관심을 대신 끌어주고 나서 그다음에 말을 해야 했다.

“드낙 님. 자치왕국을 네 갈래로 나눈 것은 드낙 님이십니다.”

“그래서 내 탓이라고 하는 거냐? 서로 알아서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 왜 그걸 못 하느냐.”

“강물이 바다에 닿기 전에 어찌 하나로 합칠 수 있겠습니까. 이를 생각해주십시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만들라는 소리이니,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하나만 내세울 수는 없었다. 세파리아스 정도나 되니까 알아서 혼자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지, 자치왕국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개성이 뚜렷하여 버려지는 분야가 존재했다.

세리안의 경우에는 세파리아스처럼 전쟁 분야에 예산을 많이 투자하는 편이다. 그리고 형벌에서 냉혹한 면이 너무 컸다.

도렌의 경우 너무 따뜻한 점이 문제였다. 그의 영토는 가장 풍요로운 곳이었지만 정작 지배자인 도렌의 재무상태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 자연히 규모가 큰 사업은 부채를 얹고 시작하는 편이었다.

아크온은 자치왕국의 자금이 귀족들에게 많이 들어가는 편이다.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같이 파이를 나눠 먹는 셈이다. 빈민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길게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독재 정치를 이룩하려는 것이 뻔히 보일 정도로 돈을 쌓는데 재미를 갖고 있었다. 영토의 발전보다는 자신의 가문이 중요했다.

물론 극단적으로 평가했다는 가정이 존재했다.

드낙과 게제라스 총리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 쉐도우 위스퍼는 더는 크게 운용되고 있지 않지만, 다종족 연합의 이슈를 게제라스 총리에게 가져다주기는 했다.

적당히 살만한 동네는 맞다.

적어도 경찰차로 시위대를 밀어버리지는 않는다.

결국 돌고 돌아서 자치왕국은 최소 4명의 공왕이 운영하는 건 옳은 일이었다. 민주주의? 책 한 권 읽지도 않는 무지한 이들에게 국가의 관리를 맡기는 건 정말 병신같은 개소리였다.

우윳값이 비싸다고 우윳값을 그냥 내려라! 이런 행정 명령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들이 10명 중 9명일 터다.

“도렌, 네 말이 실로 맞다. 내가 사과하겠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너도나도 목소리를 내며 드낙의 사과를 반납하려 애를 썼다.

“그래도 공을 나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길게이! 그대가 말해봐라.”

이에 길게이가 내키지 않은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처형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배분 때문입니다.”

“배분?”

“예. 돈에 대한 배분입니다. 공왕마다 그 비율이 다르니, 따로 놀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렌 공왕은 더 많은 돈이 아랫사람에게 가고 싶어 하고, 저는 기사들과 귀족들이 돈을 많이 쓴 만큼 그들에게 걸맞은 배분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럴듯하다.

논공행상의 기본은 하사품이다. 돈을 받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휘하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며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쓴다. 그 기본조차도 받아서 쓰는 게 달라지니 따로 가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병신이지.’

얕은 수법이었다.

“공을 하나로 세워서 받고 따로 놀면 되지 않겠느냐? 다른 이유를 말해라. 하찮은 화법으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이에 길게이 공왕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그냥 하나로 합쳐서 기본적으로 따라오는 금화를 받고, 이를 나누면 될 일이었다.

아크온이 드낙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정치 제도 때문입니다. 논공행상을 빌미로 삼아서 정치제도에 변화를 줄 이 호기를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법 그럴듯한 말이었다.

“자세히 말해봐라.”

그게 진짜라도 논공행상을 4개로 나눈 이유가 될지는 또 몰랐다. 결코 방심할 수 없는 게 귀족과의 대화였다.

연관이 있어 보일 뿐, 진짜로 연관이 있지는 않는 경우도 제법 있다.

“동부와 남부는 지분을 통한 투자 정치 제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돈 있는 놈들의 제도 같았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민간투자는 학술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좋은 투자방식이었다. 그저 현실에 입각하면 개차반이 될 뿐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쥔 것을 남이랑 나누기란 큰 결심이 필요했다. 반면 그걸 나눠 가지려는 이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내놓으라고 바락바락 짐승처럼 소리치기 바쁘다.

그 속에서 객관성과 중립을 지니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크온이 말을 길게 이어나갔다.

“투자 정치 제도란 자치왕국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소모했느냐에 따라서 발언권을 줍니다. 총 1,000표로 생각하고 있고, 상대 평가를 통하여 표를 나눌 생각입니다. 2년에서 4년마다 몇 개의 표를 줄지 정할 생각입니다.”

나쁘지 않았다.

돈 없는 이들은 돈을 탐하고, 돈 있는 이들은 권력과 명예를 탐하게 된다. 인간의 공통적 속성이었다.

돈 있는 것들이 돈으로 경쟁하니 자치왕국의 재정은 포동포동 살찐 돼지처럼 살이 차오를 것이고, 세금이 풍족해지면 자연히 공공사업에도 많은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0.1%를 복지에 써도 금액 자체가 달라지는 셈이다.

‘다만 도렌은 정치적으로 살해되겠는데.’

워낙 남에게 베풀어주는 걸 좋아하는 도렌이었다. 오죽하면 자신의 부인마저 죽이지는 못했다. 정이 많고 실력도 있으며 인성까지 좋다. 그런 자를 죽이기에 좋은 제도였다.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장점이 압도적으로 대단했다. 부자 된 이들도 연합하여 표하나를 가져간다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치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는 드낙 눈치를 본 것이기도 했다.

‘내가 돈과 경제에 너무 집착했었지.’

규모의 힘. 박리다매. 그런 것에 집착한 드낙은 경제 규모를 늘리는데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화폐 또한 할 수 있다면 종이로 대체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크온과 길게이의 제안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윗사람들이 쥐고만 있는 가장 크게 푸는 방법이었다. 윗놈들이 지닌 돈의 금고 크기는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밑에 사람들을 쥐어짜기보다 위에 사람들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공은 크다.

“......”

드낙이 고민했다. 아무리 도렌이 선정을 베푼다고 해도 경제 규모 자체가 커지면 삶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쾅쾅, 쾅쾅쾅!

이때 밖에서 혼란이 일어나며 문이 부서지듯이 흔들리더니 경첩이 떨어져 나가며 문이 쿵 하고 닫혔다. 소란이 자연히 커졌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명예 드워프 이스핀을 드워프 제국으로!”

“도렌 공왕은 당장 나와서 이스핀을 해방하라!”

“게으름뱅이 이스핀 백작을 인도할 의무가 있다!”

드워프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이스핀 백작이 방콕한 것을 도렌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입에는 각성제를 습관적으로 물고 있었고, 혁대에는 이스핀이 손수만든 산딸기주가 소중하게 가죽에 묶여 있었다.

“술! 술! 술!”

잘 때도 껴안고 잘 정도였다.

“이스핀! 이스핀! 이스핀!”

상상 이상으로 이스핀이 만든 산딸기주는 드워프 종족 자체에게 잘 맞았다. 성분 자체가 드워프들의 몸에 100% 잘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것에 둔감한 드워프에게 있어서 그건 상상 이상의 쾌감이었다. 반투명한 유리창으로 보던 세계가 갑자기 유리창을 깨며 날 것으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어서였다.

각성제와는 완벽히 다른 방식의 감각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드낙이 입을 벌렸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다른 공왕들도 마찬가지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갑자기 이스핀 백작을 외치는 드워프들이라니? 황당했고, 그 어떤 추측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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