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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겼군.’
세파리아스는 자신이 큰 오산을 한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우주 낙원의 신(神)이 강했다는 소리지.’
강하지 않았다면 드낙은 결코 적과 담판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을 터였다. 적당히 지원군을 기다렸을 것이다.
세파리아스라는 검(劍)이 있는데, 굳이 승부수를 띄울 필요는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드낙은 채찍질 안 하면 정자에 드러누워서 배를 드러낸 채 그냥 수박도 아니라 부모가 해준 화채를 움냠냠하며 살 놈이었다.
‘그런데 놈이 신을 죽여 가장 맛있는 부분을 홀라당 까먹었다.’
문제는 그것이다.
“기다렸어야지. 빌어먹을 놈아.”
“왜? 너도 한 입 하고 싶었냐? 그런데 어쩌냐! 내가 다 먹어버렸는데.”
“다 먹기는. 절반은 버렸지 않느냐!”
세파리아스가 역정을 냈다. 오롯한 초월자가 되지 못한 드낙은 신을 죽여도 그 절반밖에 먹지 못한다. 그렇기에 상식적으로 본다면 세파리아스도 절반을 받아먹을 수 있다.
그럼 그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걸 못 참고 죽이다니.”
“......”
세파리아스의 말에 드낙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재차 변명했다.
“근데 좀 미친놈이었다니까. 너도 보면 필사의 각오로 싸웠을걸?”
“그런 것치고는 네놈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게 중요하지.”
드낙이 가슴을 쳤다. 어찌나 속이 답답한지 미칠 지경이었다.
“나니까! 나니까! 크게 안 다친 거지. 정말 위협적인 놈이었다니까?”
“빌어먹을 놈. 넌 지금 나한테 빚을 한 게 진거다.”
“......? 미쳤어? 뭔 빚 같은 소리를 해? 네가 늦게 온 거잖아.”
세파리아스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기품이 느껴지는 머리 젓기였다.
“난 최대한 빨리 왔다. 근데 넌 최대한 늦추지 않았지 않나.”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증거 있냐?”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적으니까.”
‘이 새끼.’
드낙이 앙심을 품었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드낙이 가만히 수긍할 놈도 아니었다. 긴장이 탁 풀린 드낙은 바로 꼬장을 부렸다.
“어쩌라고.”
“뭣?”
“어쩌라고. 어쩔거냐고.”
막 나가는 드낙을 보며 세파리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더 말해봤자 무의미하다.’
그가 깔끔하게 포기했다.
“신은 될 수 있느냐.”
주제를 돌리는 그 질문에 드낙이 빙긋 웃었다.
“못되면 병신이지. 안 그러냐?”
“경박하게 굴지 마라.”
세파리아스의 말에 드낙이 낄낄거렸다. 그리곤 장난을 치고 싶었다.
엘레우테리오는 ‘자유(自由)의 권능’이라고 말했지만 드낙이 보기에 그것은 중립신의 연막에 불과했다.
‘중립신 개새끼. 제대로 힘을 줬으면 그 힘이 어떤 건지, 그 힘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말해줬어야지.’
그건 덫이기도 했다. 진짜 날카로운 함정은 숨겨놓고, 치즈만 보여준 셈이다.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그저 부차적인 효력에 불과했고, 진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
즉, 만변(萬變)의 권능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왜 중립신이 이걸 인신에게 숨기고 다르게 말해줬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제대로 연마했다면 나조차도 위험했겠지.’
아마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놈과 서로 뺏고 뺏으며 싸움을 길게 이어나갔을 터였다.
‘어디...’
드낙이 변화의 힘을 사용했다. 세파리아스의 영향무력이 기민하게 움직이며 그곳을 베어냈다.
“뭐하는 짓이냐?”
“와, 이것도 알아차린다고? 너무 사기 아냐? 대체 넌 못하는 게 뭐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느새 드낙이 자신에게 어깨동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세파리아스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드낙의 존재감은 찰나의 순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전과 같이 계속 자신의 앞에 있을 뿐이다.
“왜? 뭐 다른 일이 생겼어?”
“네놈.”
“머릿결 좋네.”
말을 하려던 세파리아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다. 어찌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드낙이 방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려서였다.
“아차차. 너무 많이 보여주면 또 익숙해지겠지. 장난은 여기까지 할게.”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는 참고 또 참았다. 다만 속으로는 절대 방심하지 않았고 조금 놀라기도 했다.
‘또 발전했군.’
간담이 서늘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격차가 생길지도 몰랐지만, 그는 그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드낙 때문에 자신의 목표를 수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우직하게!’
앞만 보며 달려나갈 뿐이다.
드낙은 세파리아스를 지나 뿔쥐들에게 다가갔다.
““뜨나아악!””
녹슨 리전이 크게 소리를 냈고, 그중에 덕지덕지 뿔쥐 위원이 배를 출렁거리며 깊이 인사하며 외쳤다.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을 뵙습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이렇게 늦게 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됐다! 내가 언제 그런 거로 너희에게 실망을 했느냐? 그것보다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냐?”
드낙이 현 상황에 관해서 묻자 녹슨 리전이 냉큼 대답하였다. 숫자가 많았기에 꾸준히 메시지 마법으로 현황을 받고 있어서였다.
“아래로는 방어전 전투가 한창 이어지고 있고, 위로는 공중 요새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오크와 뿔쥐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에 드낙이 물었다.
“가장 격전인 곳은 어디인가.”
“가장 저항이 심한 곳은 아래쪽이라 공세에 접어들지 못하고, 막기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좋다. 너희는 회군하지 말고, 여기서 동쪽으로 향하며 최대한 많은 이들을 죽여라. 용병 지구인 중에 기술자로 보이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포획하라.”
“예!”
뿔쥐들에게 방향을 한 곳 대충 지정해준 드낙이 순식간에 세파리아스의 정면에 섰다. 파동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불가해(不可解)의 이동술에 세파리아스의 눈이 흥미로 가득 찼다.
저걸 몇 번이고 경험하여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면 자신의 무력은 한층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당장 묻지는 않았다.
드낙이 대가를 요구할 것이 틀림없었다.
여전히 세파리아스는 드낙과 함께하기는 할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세상은 지독히도 평화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당장 지금 이 사태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에 뛰어든 것이 드낙이었다.
‘자신은 그걸 모르겠지만.’
경박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불구덩이가 어딘지 모르고 달려든다는 점이었다. 쫓고 쫓다 보면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듯이 거기에만 집중하고, 나머지의 것은 단번에 갈라친다.
집중하는 데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 덕에 한 번 불이 켜진 드낙은 철저하게 상대를 찾고, 쫓으며 이내 그 목에 칼을 박아넣는다. 그는 온전히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 모습은 암살자나 다름없었다.
“넌 어쩔 생각이냐? 동료 모으기를 할 거냐?”
드낙이 턱짓으로 적기사왕, 청기사왕, 천상십이수극대전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에 세파리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질만한 인재는 다 가졌다. 나머지는 들었는데, 필요가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대단하다고 해도 그뿐이다. 신제국에 어울리는 이는 이 셋뿐이었다. 기사왕들이 말하는 칠색신룡은 그들보다 강했지만 알 바 없다. 세파리아스에게는 그냥 도마뱀 나부랭이일 뿐이었다.
탄생석골램 또한 의미 없었다. 초월의 힘과 관련된 생산력을 높일 수 있었지만,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럼 뭐하게?”
드낙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세파리아스는 이에 대답을 해주기는 해줬다.
“용병 지구인 과학자와 기술자를 잡아갈 생각이다.”
‘녀석.’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그를 보며 드낙이 히죽거렸다.
“웃지 마라. 내가 먼저 생각한 거다.”
“응? 내가 먼저 생각한 건데?”
“흥!”
새침하게 몸을 돌리는 세파리아스를 보며 드낙도 질세라 몸을 새침하게 돌렸다.
‘시건방진 녀석!’
드낙은 단번에 지정된 좌표로 이동했다. 그림자로 변하지 않고, 파동으로 변했다.
단번에 도착하자마자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이미 지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크아아아아!!!!”
포효와 함께 칠색신룡이 거대한 날갯짓을 퍼뜨리며 모든 것을 휩쓸었다. 날개에서 쏟아지는 칠색빛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소멸의 힘.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3 만에 달하는 다종족 연합의 생명체들이 바스러졌다.
[어리석은 놈들아! 용족의 힘을 마주하라아아!!!!]
엘리오테리오의 소집에 응했어야했을 칠색신룡들이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들은 방어선 전투의 가장 선두에서 싸우고 있었다.
시체들 사이에 칠색신룡 하나가 죽어있었지만, 여전히 5기는 온몸에서 칠색의 힘을 모아 소멸의 힘으로 전환하여 흩뿌리고 다니고 있었다.
“맞서 싸워! 마법과 주술을 최대로! 쏟아부어라!!!”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법과 주술이 칠색신룡의 힘을 상쇄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 하나하나는 반신 중에서도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만들어진 용족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줬다. 그릇과 표면적에 의한 출력은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아얄타아아아아!!!!!”
규르소모스가 트센크러(Tsenkher, 푸른 눈동자)에 올라탄채로 고함을 내질렀다. 히드라의 타투가 꿈틀거렸고, 거대한 힘이 깃든 할버드가 칠색신룡의 쩍 벌려진 아가리를 치고 지나갔다.
“크엉!”
칠색신룡이 머리를 털었다. 그것뿐이다.
어지간한 5성급보다 무지막지한 것이 칠색신룡이었다. 드낙이 그런 놈을 쉽게 죽인 것은 파동 공격술 덕분이었지, 실제 물리력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큰 방어력을 지닌 것이 칠색신룡이었다.
콰아아아아!
빛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 와이번이 용의 숨결을 내뱉으며 단번에 날개를 접고 쑥 내려가버렸다.
블랙 스케일 와이번 하나와 칠색 신룡이 맞붙고 있기도 했으나, 큰 열세에 처해있는 것이 절로 보일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규르소모스 혼자서 칠색신룡 하나를 막기도 버거워 보였다. 그는 반신급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나라도 붙잡아둘 수 있었던 이유는 와이번 또한 용족이라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을 터다.
드낙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쿵! 쿵! 쿵!
“나아가라, 만신전을 위하여!”
“빛의 여신을 위하여!”
“우리들의 신에게 영광을!”
자주포는 포신이 꺾인 채 빛을 잃었고, 그 주변에는 인조 생명체가 계속해서 짓밟으며 진군하고 있었다.
흙을 쌓고, 고블린이 배변한 강철로 만든 언덕은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인조생명체와 다종족 연합의 시체 300만구가 뒤엉켜 널브러져 있었다. 그 광경에 드낙이 급히 달려나갔다.
*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엘레우테리오는 가라앉아갔다.
끝없이 계속되는 고요하고 느긋한 하락감은 안락하고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 속에서 엘레우테리오는 가만히 즐기고 있다가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감에 눈을 떴다.
오직 어둠만이 가득했다.
버둥.
그가 거칠게 버둥거렸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손과 발이 있냐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찢겨져 최후를 맞이했다.
드낙의 손속은 생각했던 것보다 잔혹했고, 그는 만변하는 세상 속에 갇혀서 분쇄기로 갈아지듯이 갈려졌다.
그런 자신이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은 대단히 이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육체적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정신체로서의 감각만 존재했다.
‘절반의 신성(神性)이 나에게 남아있다.’
절반만 더 있다면, 다시 부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추측인 이유는 한 번도 죽었다가 부활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렇게 그는 끝없이 가라앉았다.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자 조급함이 일어났고, 두려움마저 생겼다. 아무것도 안 한 채 이렇게 계속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인격신(人格神)인 그로서는 그저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 빛이 한 점 있었고, 그곳으로 엘레우티로오가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그가 지닌 신성이 크게 흔들리며 소모가 일어났지만, 오히려 좋은 반응이라 여겼다. 그가 지닌 신성이 갉아지고, 갉아졌다.
‘저기에 뭔가가 있다.’
그가 빛에 닿았다. 곧 새하얀 공간 속에 섰다.
그 눈앞에는 밀랍과도 같은 인간이 가만히 서 있었다.
“엘레우테리오, 실로 오랜만이다.”
“주, 중립신? 당신이 절 구해주시려는 겁니까?”
“아니, 나도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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