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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용병 지구인들은 사태가 일어나자마자 대다수가 빤스런을 쳤고, 계급이 낮거나 연차가 적은 이들만이 활동했다.
죽기 싫어하는 게 현대인이었다.
옛 시절의 왕들처럼 누릴 게 많은 이들은 겁을 집어먹은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생(生)에 속박된 삶이다.
그 덕에 그들의 제2차 출정은 우주 낙원의 최중심부 근처에서 일어났는데, 아스톨포 왕자와 세파리아스 황제가 서로 마주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세파리아스 또한 최심부로 향하고 있어서였다.
거기에는 다양한 근거가 존재했다.
하나는 드낙이 파괴하고 다닌 시설들의 흔적이 최심부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료로 단번에 영입한 브누아 예레미아스(Benoit Jeremias)의 정보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최종 전투를 벌이려는 우주 낙원의 의중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세파리아스는 천상십이수극대전사(天上十二手極大戰士)와 함께하며, 적청(赤靑) 기사왕들과 녹슨 리전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고, 그와 만났다.
아스톨포 왕자는 단 혼자서 최심부 근처에서 사냥하고 있었다. 인간 사냥이다. 밑에 놈들에게 대처를 하게 만들어놓고 빤스런을 친 용병 지구인들의 높은 계급을 지닌 잡것들을 흡혈하고 다니기 바빴다.
이를 보며 세파리아스는 으르렁거렸다.
“소란을 듣고 와봤는데, 하찮은 괴물이었군.”
아스톨포가 미소를 지었다. 햇빛이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전통 시장에서 오징어 튀김을 먹고 있어도 어디 배우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있었다.
세파리아스의 도발이 1도 안 먹혔다.
“마력 한 줌도 못 쥔 인간이 계단을 조금 오르더니, 오만하기 짝이 없군.”
서로의 눈이 강하게 부딪쳤다. 물러서는 이는 없었다. 세파리아스에게 뱀파이어인 아스톨포 왕자는 좋아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연합 도시나 자치 왕국에서 피를 돈을 주고 그에게 팔고 있다는 것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드낙의 ‘다종족 연합체’가 지닌 단점이다.’
그렇기에 다종족 연합이 생기고, 세파리아스는 그들과 협력하는 한편으로는 서둘러 다른 차원으로 향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취할 건 취하고, 방향을 다르게 틀어잡았다. 얌생이라고 할 만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신제국이 다종족 연합에 속할 필요가 존재했다.
“여기서 누가 오만한지 가려보면 좋지 않겠나.”
드낙 때문에 기분 나쁘지만 아스톨포를 가만히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나타나 주니 고마울 지경이었다.
저벅.
저벅.
세파리아스가 한 걸음 나서자 아스톨포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났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발걸음이었다. 그만큼 서로서로 지켜보고 있었다.
두 명 모두 결코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영향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세파리아스는 반신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권능을 사용할 수 없는 반신이었다.
드낙은 중립신을 잡아먹을 수 있었지만, 그때 당시 세파리아스는 갓부활하여 많은 것을 쥐고 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권능 사용을 위해서는 드낙과는 달리 인신(人神)의 지위에 올라서야 했다.
고로 그는 방심할 수 없었다.
아스톨포도 세파리아스의 기세를 알고 있었다.
또 그는 괴물이기에 더더욱 인간이 지닌 강인함을 가늠할 줄 알았다.
이 드넓은 차원에는 은빛랜스를 기울여 대악마의 눈조차 앗아간 평범한 인간 중기병도 있을 정도였다. 대악마(大惡魔) 아카타베루의 밑에서 일했던 아스톨포였기에 인간을 경계할 줄 알았다.
히죽.
그 모습에 세파리아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두려워하는 괴물만큼 보기 좋은 것도 없어서였다. 그가 아는 모든 것들은 인간을 그저 벌레 취급하기 바쁜데 아스톨포는 그러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놈이군.’
여흥은 이쯤으로 하기로 하고, 세파리아스가 말했다.
“합류해라. 신을 잡으러 간다.”
“싫다.”
세파리아스는 더 권유하지 않았고, 아스톨포 또한 흥미가 없어 보였다. 신을 잡는 것보다 중요한 건 용병지구인을 흡혈하는 일이었다.
‘나는 개인이다. 철저히 혼자다.’
옵시디안 가문의 일원을 혈족으로 만들었으나, 아직 제대로 육체변이도 할 줄 모르는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전쟁터에 데려왔을 리가 없었다.
그런 아스톨포가 논공행상에서 순위권에 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적당히 하다가 빠져나왔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전쟁, 그 자체에서 이득을 취해야 하는 흡혈귀였다.
따로 움직이려는 그에게 그림자들이 모여들어 피숨결 검은 뿔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찍찍.”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인조생명체를 흡혈하지 않고,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용병 지구인을 잡아먹었겠지?”
“그렇다.”
“그렇다면 놈들이 운용하는 것 중에서 제법 위협적이던 빌리언즈도 봤겠지?”
아스톨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가 말했다.
“하지만 평범하게는 사용할 수 없다.”
“가져가려는 것이다. 드워프 놈들이 죄다 가져가기 전에!”
“드워프라면 이미 이 근처에 있는데.”
“뭣!”
녹슨 리전의 뿔쥐들이 웅성거렸다. 큰 위기였다.
‘드워프 놈들!’
덕지덕지 뿔쥐 위원 또한 분통을 터트렸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왔지? 놈들은 공격력이 낮아서 뚫기가 힘들텐데...!”
의심 또한 들었다. 그 의심을 받은 아스톨포는 바로 진실을 알려줬다.
“환풍구로 엉금엉금 기어서 다니던데.”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이시여!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쓰다니.”
“드워프 놈들은 논공행상 전략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상정했다!”
뿔쥐들이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드워프들의 속셈을 깨달았다. 보급으로 대충 구색만 맞추고, 차원 전쟁에서는 약탈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우주낙원에 있는 다양한 문물을 전부 다 터는데 모든 걸 쏟아붓고 있을 터였다.
남들이 전투할 때 도둑질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실로 그럴듯해 보이는 전략이었다. 적어도 논공행상 때 현격히 다른 지표를 하나 손에 쥘 수 있어서였다.
‘이미 늦었다.’
따라간다고 해도 드워프 하나하나는 아무리 큰 것도 혼자서 척척 들고 마법진을 그리고, 마력을 물약등으로 충당하여 전송할 것이 분명했다. 등에 마력이 깃든 중급 연급 물약을 짊어지고 다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무식한 방법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게 드워프들이었다.
그 사이에 아스톨포는 계속 걸어갔다. 결국 녹슨 리전은 세파리아스를 따라가기로 했다. 적어도 전투에 있어서는 가장 드높은 공을 세워야 했다.
‘다른 리전이 열심히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미 드워프가 선두를 달리는데 병력을 나눌 순 없지.’
병력의 분산은 장단점이 있지만, 항상 리스크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또 우주 낙원의 병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적어도 리전이 찢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이들이 서둘러 최심부로 향했다.
*
과거 엘레우테리오가 중립신으로부터 받은 권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환희의 권능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 권능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유의 권능은 능히 대권능이라 말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강대한 권능을 짜서 저에게 주는 것입니까? 대신이시여.]
[끝까지 살아남을 인신이 바로 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을 이끌어주소서. 이 차원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족신 중에서 인신이 가장 나약합니다. 수많은 대신 중에서 인신이 지닌 대신은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내 그릇을 보라. 만전(萬全)하여도 전초극의 권능 하나 담으면 끝이다. 대신을 넘기 위해서는 마신을 잡아먹거나, 신들의 땅을 지배해야 하나 그 도박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주사위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그는 자유의 권능을 받았다.
간단하게는 그저 흐트러짐으로써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자유롭게 정신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정신체임에도 육체의 특성을 가지는 것도 가능했다.
끝없는 자유를 정신체에 부여하는 것이 자유의 권능이었다.
가히 만변의 권능이라 할 수 있었고, 자유와 관련 없는 행위도 가능했다.
[내 분노를 맞이하라! 환희의 권능이 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장기전 하는 거 아니었어? 너 지금 전술적 패배야! 이거 너 진 거야!”
드낙이 분노하는 엘레우테리오의 모습에 더욱 흥분해서 경박해졌다.
[그럴 필요마저도 없다! 이제...죽어라!]
자유 권능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게으름을 피우는 인신의 손에서 중립신의 흉악한 손길이 뻗어 나갔다.
모든 것이 반전(反轉)했다. 세상이 만변(萬變)하며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엘레우테리오의 정신체가 드낙에게 달려왔지만, 그것은 멀어지기도 했으며, 거꾸로 솟기도 했다. 감각 자체가 괴이하게 변했으며 변화무쌍하여 무엇 하나 제대로 관측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땅이 땅이 아니게 되고, 중력이 반전했다가 뒤엉켜 다른 곳으로 꺾여 내려갔다. 그마저도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모든 관측을 자유롭게 변화시킨 반전의 방식은 중립신이 자유의 권능을 주며 반드시 수련하라고 말한 운용법이었다.
그 흉험함 속에서 드낙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이크! 에크!”
[도, 이는! 망것냐 치!]
엘레우테리오의 정신 파동조차도 괴이하게 들려왔다.
모든 것들이 기괴하게 변화하면서 정신 파동조차도 이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속에서 드낙은 빤스런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
‘기분이 이상해.’
그저 회피하고, 거리를 벌렸으며, 역전의 때를 노렸다.
‘너무 편안해.’
그가 그렇게 한 이유.
‘흉악한 위험조차도 나에게는 안락함으로 다가온다. 이건, 놈의 노림수인가? 그게 아니라면..!’
드낙의 눈에 강인함이 깃들었다.
어떤 확신 같은 것이 그 눈에 새겨져 있었다.
위기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잘 대처할 수 있는 게 드낙이었다.
‘...굳이 세팔이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엘레우테리오가 장기전을 포기하고 전력으로 달려드는 순간, 그 어떤 근거도 없었음에도 드낙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난 이놈을 잡아먹을 수 있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확신이 들었다. 드낙이 숨을 죽였다.
파동으로 변할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만변(萬變)한 세상은 드낙에게 있어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여기는 그의 세상이다.
우거진 숲에 숨은 벌레 한 마리가 되었다.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환경이 좋았다.
조용히 드낙의 모든 것이 만변하는 세계에 뒤덮여 사라져 갔다.
자신이 매일같이 쓰던 침대에 드러누워,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사용하던 작은 베개를 사용하는 것처럼 안락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엘레우테리오는 순식간에 사라진 드낙을 보며 경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신한기데. 말게, 이이상하, 오네나. 하하하!”
느껴지지 않는 그가 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곳에 엘레우테리오가 근접했으나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유의 권능이 제대로 펼쳐진 세상에서 드낙의 존재감은 좁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속에서 드낙이 엘레우테리오의 정신체를 한 줌 가져갔다.
[아? 이, 놈!]
엘레우테리오가 화들짝 놀랐다.
피해는 전과 같았다. 그저, 한 줌 가져간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놀랐다. 자신의 권능이 잔뜩 펼쳐진 곳에서 한 줌을 가져간 것이다.
“넌 네 힘인데도, 왜 똑바로 말을 못하냐? 나처럼 말해 봐.”
놀랍게도 드낙은 만변하는 자유의 권능이 내려앉은 곳에서 능숙하게 말을 내뱉었다.
[숨은 어에디 것, 냐이!]
말을 해도 그마저도 뒤바뀌었다. 그는 중립신이 끝없이 연마하라고 한 운용법을 극의까지 단련하지 못했다.
그가 정신체로 사방을 훑었다. 자신의 권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권능조차도 서서히 영향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드낙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엘레우테리오가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는 엉뚱한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는 자신의 권능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엘레우테리오는 절망했다.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어게떻 이런, 있을가수!!]
자신의 그릇을 벗어난 힘을 다룬 대가는 참혹했다.
그 힘을 다른 반마반신(半魔半神)이 먹어치워 버린 것이다.
“고맙다. 만변의 힘.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드낙은 그렇게 말하며 엘레우테리오를 먹어치웠다. 물론 100% 모두 집어삼킬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 신이 아니기에 그 절반도 온전히 잡아먹지 못했다. 남은 것은 흩뿌려질 뿐이다.
순식간에 엘레우테리오를 죽인 드낙은 만변의 권능을 제어하여 세상을 원래대로 만들었다.
동시에 벽이 무너져내리며 세파리아스와 녹슨 리전이 도착했다.
드낙은 이를 보며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왕을 잡았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 다 끝났다. 이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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