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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준비하라.”
자치왕국은 소수의 소모품 병과와 소수의 정예로 성공적으로 지연전과 섬멸전을 펼치고 빠졌다.
그다음 차례는 디아볼로스와 타락 엘프의 몫이다. 하지만 뒤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크아아아아!”
무지막지한 야수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뒤섞여서 오크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런, 제기랄! 너무한 거 아니냐고! 크응! 크응!”
쿵쾅소리를 내며 규르소모스 대족장이 콧김을 내뿜으며 블랙 스케일 와이번에서 내렸다. 대족장인 그를 비롯해서 오크들의 대전사들은 혼란무도(混亂無道)의 타투를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많은 전사가 백설산맥에서 죽어갔다. 그곳은 수많은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일백야수를 넘어선 야수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살아남으며 타투를 위해, 녹슨 도끼를 위해 자신의 영광을 추켜올린 대전사들 중에서 혼란무도의 타투를 지닌 이들은 모두 블랙 스케일 와이번(black scale Wyvern)을 타고 있었다.
길들이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숫자는 15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자리에는 대부분 없었다. 공중 요새와 함께 표면 상륙작전에 투입될 터였다. 그렇기에 지금은 규르소모스의 와이번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위압감이 대단했다.
‘무슨 저런...’
칼리스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18인의 벨룸 퓨에르(bellum puer)가 막아섰지만 막무가내였다. 타투 때문에 더더욱 무식하게 밀고 들어왔다.
타투(Tattoo)로 온몸을 도배한 대족장의 모습은 흡사 예전 대전쟁을 일으킨 이름 모를 오크를 떠올리게 했다.
너무나도 강력했었던 오크의 공세는 후세에 기억될 수가 없었다. 오크들도 원하지 않았다. 쌍둥이 오크가 만들어낸 대전쟁이었으며 끔찍하게 패배한 전쟁이었다. 그런 걸 기억하고, 언급하고, 추억할 오크는 없었다.
그들은 승리와 영광을 좋아하지, 패배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적들이 재정비하고 다시 언덕을 건널 준비를 하는 걸 보고 서둘러 뒤로 이동하여 규르소모스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대족장!”
“총사령관, 해도 너무하지 않나? 이러다가 오크들은 칼질 한 번 하지 못하게 될 거다!”
뒤에서 ‘아얄타’거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오크 전사들은 대단히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죽으면 녹색 도끼의 품으로 돌아갈 뿐이었기에 두려움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지하철 1호선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불신지옥을 외친다면 남을 저주한 대가로 불구덩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걸 하느님께서 말씀을 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신이 뒷배로 있었기에 오히려 이를 증명하려는 오크 전사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하고 싶은 걸 하도록 자유롭게 두면서 자식이 죽으면 이를 잘 받아들이는 녹색 도끼는 신 중의 신이었다.
“차례를 기다려라.”
“자치왕국은 자리도 잘 다지고, 선봉까지 섰는데, 우리 오크는 뭐가 되냐고. 이참에 그냥 돌격하지?”
“순차적으로 전공을 세우자고 하지 않았나. 우리 또한 만(萬)을 잡아먹고, 물러난다!”
“뿔쥐 새끼들, 숫자가 적다! 놈들은 다른 걸 꾸미고 있다.”
규르소모스의 말에 칼리스투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벨룸 퓨에르 중 1인이 다가와서 속닥거렸다.
“그걸 왜 말하지 않았나.”
“계속해서 적이 쏟아지는데, 설마 했다.”
그 반응을 본 규르소모스가 웃어 보였다. 실제로 뿔쥐들은 대충 눈치를 보다가 순번이 늦어지자 굴을 파서는 어디론 가로 사라져버렸다.
‘이 전쟁터에서 물러났다고는 볼 수 없지.’
적들의 정보 체계는 대단히 기민하다. 분명 이곳으로 적들이 몰릴 터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다른 계획은 많이 쓸 수 없다.’
칼리스투스가 순식간에 판단을 마무리하고 규르소모스, 오크들의 대족장에게 말했다.
“좋다. 뿔쥐들이 어떤 전략을 쓸지는 눈을 감아도 알 수 있다.”
“뒤치기나 옆치기를 하려고 하겠지.”
병력을 가장 많이 쓸어담는 방안이었다. 수급 챙기기도 좋았다. 특히 뿔쥐들의 개체수는 대단히 많았다. 모조리 이곳으로 공간이동 되고 있었다. 끝도 없는 검은 그림자의 물결이 상상이 됐다.
‘그 속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버텨서 뿔쥐들의 전공에 발 하나 척 걸치는 일이다.
모루가 없으면 포위 섬멸 또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거기에 뿔쥐들은 적들의 증원군에 등을 보이는 짓을 해야 한다. 나눠서 어련히 잘하겠지만, 리스크는 확실히 존재했다. 그걸 선택한 건 뿔쥐였다.
‘언덕 뒤로 물리고 싶은 마음도 있다.’
뿔쥐들에게 전공을 주지 않으려면 그냥 오크들이 주둔해있는 다섯 번째 언덕까지 후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드낙 때문이었다.
그의 지배력은 확실하게 디아볼로스와 타락 엘프들에게 뻗쳐있었다. 그의 피를 받아마셨는데, 그를 받들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또 보통 할 수 없는 인위적인 것이기도 했다.
드낙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게 자연스러웠다.
뿔쥐가 내부알력에 의해서 많은 희생자를 낸다면 논공행상에서 불이익이 확실하게 칼리스투스를 비롯한 엘프들에게 낙인처럼 찍힐 것이다. 논공행상은 드낙의 주관이 잔뜩 들어갈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렇기에 절대권력은 언제나 위험했다.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고해도 독재 속에 화려하게 빛나는 경우는 잘 없었다. 10명의 왕 중 성군이라 불릴 왕은 1명 나올까 말까였다.
닭장 속에 갇혀있는 닭을 꺼내서 죽여 치킨으로 만들어버리는 권한을 지닌 닭장 주인의 권력은 닭들에게 있어서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닭장 주인의 입맛대로 결정된다.
자신의 죽음까지도.
그런 근거가 있었기에 뿔쥐들은 참으로 무식한 짓을 시행했다.
‘흥.’
그렇기에 칼리스투스는 우직하게 모루 역할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뿔쥐들의 행동에 오롯이 따르고 싶지 않았다.
칼리스투스가 곧게 섰다. 그 눈에는 위대한 엘프 종족의 명예가 깃들어있었다. 영광과 몰락이 뒤섞인 눈동자 속에는 강인함이 깃들어있었다.
공장처럼 어린 엘프를 찍어내고, 노괴들을 위한 사회가 엘프들의 사회였다. 모든 것이 고정된 세계에서 먼저 태어난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지배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엘프들의 사회였다.
그렇기에 벨룸 퓨에르는 전쟁병기로 교육을 받으며, 엘프들의 안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병기로써 다루어졌다.
그 끔찍함을 겪었고, 해방 이후에는 엘프들의 으뜸이 되었다. 수많은 것들을 다른 엘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정도로 위험했기에 가두어진 채 필요할 때만 해동해서 사용하려고 한 것이 기존 엘프 사회였다.
‘이제는 다르지.’
엘프는 달라졌다.
모든 면에서 달라졌음을 보여줘야 했다. 그건 뿔쥐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혹은 동등한 전공을 세우기라도 해야 했다.
머릿수가 크게 차이 난다는 게 문제였다.
엘프 개체수는 미친 듯이 찍어내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지하 연합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이를 해결하려면 적어도 몇십 년은 걸릴 터였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돌격 준비를 해라. 오크들이 선봉을 서준다면, 함께해주겠다.”
“그렇게 나와야지.”
“하지만! 뿔쥐가 나오지 않는다면 예정대로 하겠다.”
규르소모스도 여기서는 타협을 보기로 했다. 윽박지르거나 가볍게 부딪쳐도 칼리스투스는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디아볼로스였기에 밀리지 않았다.
그가 물러나고, 적들이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덤벼왔다.
약간의 소강상태가 있었지만, 포격은 계속되고 있어서 적들의 피해는 꾸준히 누적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8만 넘게 존재했다.
이상한 것은 적들의 증원군대가 제법 오랫동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명 뿔쥐가 뭔가를 하고 있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리틀 드래곤을 소환하고, 대기하라.”
돌격을 할 수 있었기에 먼저 리틀 드래곤을 소환했다. 굳이 돌격이 아니더라도 머릿수는 많은 게 좋았다. 비효율적인 소환 주문이라도 종족의 벽을 허물고 초월의 계단을 올라가게 된 디아볼로스와 타락 엘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프들에게는 <삐익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청룡이었다.
“삐익! 삐익!”
대형견에 턱걸이하는 수준의 작은 블루드래곤은 울음 소리를 냈다. 벼락의 힘을 사용하기에 매우 파괴적인 존재였지만 가만히 있으면 대단히 귀여웠다. 윤기가 나는 비늘은 만지고 싶었고, 체온도 대단히 높았다.
감촉부터 시작해서 귀여운 울음소리에 탕탕하고 두툼한 몸집은 자꾸 껴안고 싶어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쟁용 소환수라는 점이었다.
“방패를 들어 올려라!”
백금 카드가 변화하며 백금색의 대형 사각 방패가 되었다. 다른 손에는 붉은 장창을 잡았다. 단번에 사각진이 완성되었다.
위로는 강력한 철색의 방어막이 펼쳐져서 마법 고엮을 막았고, 아예 언덕 위에서 올라오려는 놈들을 원천차단했다.
자치왕국이 언덕 위의 공간 절반을 적에게 내어준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모루인 척하다가 뿔쥐가 냉큼 냄새를 맡고 포위섬멸 작전을 수행한다면, 그때 오크들에게 정면을 열어주고, 정면에 있는 병력은 양익으로 옮겨서 조밀하게 들이칠 생각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적들은 거대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에 오르자마자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블루 드래곤 전신갑주에서 <드래곤의 숨결>이 쏟아졌다.
화르르르!
처음에는 불길이 쏟아져 내려갔다. 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 이를 상쇄시켰다. 불길을 꺼트리고도 물을 쏟아내는 마법 방어막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다음에는 자갈과 돌, 바위가 쏟아지는 드래곤의 숨결이 쏟아졌다.
“이런!”
인조생명체들이 깜짝 놀랐다. 액체는 암석을 막기에는 많이 하자가 있어서였다. 이는 곧 쓸데없는 일에 힘을 쓴 것처럼 손해를 보게 하였다.
퍽!
단번에 또 다른 마법 방어막을 사용해서 우직하게 밀고 들어갔다.
매번 속성을 다르게 했기에 대처하는 적들은 곤욕을 치렀다. 무엇보다 관통력이 높은 충격 마법을 뒤에 있는 엘프들이 계속해서 쏘았기에 확실하게 사상자가 발생한 것도 컸다.
시체를 넘어 그들이 도착하여 칼부림하는 순간 거대한 보급 통로의 양쪽 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높이를 지닌 벽이 일시에 무너지자 자연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골램들이 쏟아져나왔다. 골램의 등에는 탑승석이 존재했는데 그 위에는 고블린들이 있었다.
그림자로 변한 뿔쥐들 또한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단번에 후방을 점령했다.
특이한 것은 공세에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모습에 칼리스투스를 비롯한 이들이 감탄했다.
‘뿔쥐들은 예의를 아는 종족이군! 바로 돌격해서 재미를 보지 않는다니.’
신중하다고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정석을 따라주는 모습을 보였다.
‘포위섬멸의 표본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건 포위였지, 무식한 후방 돌진이 아니었다. 그런 건 중기병이 해야 할 일이었다.
“고블린 골램은 전진하라!”
“뜨나아아악!”
고블린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하나같이 주술력을 지닌 고블린들이었고, 그들이 탑승해있는 탑승기 내부에서는 주술을 사용해서 계속해서 단단한 돌들을 골램에게 채워 넣고 있었다.
뿔쥐를 지나쳐서 골램들이 전열에 서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후방 공간을 지배한 고블린 골램을 향해 마법 포격을 비롯해서 총기들이 난사되었다. 특히 골램은 2m에 달하는 큰 놈이라 표적이 되기도 쉬웠다.
“대포를 들고 있는 골램을 노려라!”
오버로드들이 외쳤다. 골램들은 이상하리만치 큰 대포를 들고 있었는데, 발포한다면 큰 곤욕을 치를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사거리가 짧은지 당장 사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가짜 대포였다. 무쇠도 아니라서 총알이 박히면 찌그러지는 모습도 보였다. 내부가 텅텅 비어있어서였다. 다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를 깨달을 수는 없었다.
‘급조한 것이지만 큰 도움이 되는군.’
적들의 투사체와 마법을 대신 맞기 위해서 있는 것이 고블린 골램이었다. 대지 골램이 무너지자 탑승기 또한 떨어져 내렸다. 신기하게도 탑승기는 우직하게 아래로 곧게 떨어졌고, 위에 타던 고블린 주술사는 피해 없이 바로 빤스런을 칠 수 있었다.
안전하게 상대 마법과 사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고블린 골램이었다.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 만든 텅텅대포도 탁월한 효력을 발휘했다.
30분 동안 이어지는 마법 포격 속에 고블린 골램의 진행속도는 더뎌지고 방해받았으며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적들의 사격역량이 다했습니다!”
“고블린 골램을 뒤로 물려라! 리전들은 앞으로 나아가라!”
남은 고블린 골램이 서둘러 뒤로 도망쳤다.
뿔쥐들이 거대한 방패를 들고 천천히 걸어나갔고, 5m가 넘는 길쭉한 장창이 위로 높이 추켜 올라갔다.
쿵! ...쿵! ...쿵!
정말 느릿느릿하게 걸어나갔다. 3걸음 걸어가고 방패로 땅을 찍으며 진행했는데 그 모습이 실로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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