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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즉흥적이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게 없지.’
빠졌다면 제대로 빠졌어야 한다.
전략적 후퇴의 가장 중요한 점 중 그나마 어느 상황에서든 사용 가능한 것은 상대의 보급 제한을 노린다는 점이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보급의 충원 속도는 느려지고, 양도 적어진다.
‘이처럼 큰 공간에서는 능히 그럴 수 있다.’
칼리스투스라도 일단은 뒤로 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매우 많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보력이다.
‘먼저 상대는 이상하게 정보 공유가 대단히 빠르다.’
위대한 과학의 산물, 전화기를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빠르다. 서로 약속을 잡기 좋았고, 서로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공유 가능했다. 이를 몰랐음에도 칼리스투스는 상대의 정보 교환이 대단히 빠르다는 걸 전쟁을 수행하면서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적들은 후퇴를 선택하는 게 큰 리스크를 지닌 게 아니었다.
이득이 있다면 능히 전략적 후퇴를 거리낌 없이 선택 가능했다. 정보량이 대단하기에 생기는 이점이다.
‘전술적으로도 좋지. 갑작스러운 사태에는 한 걸음 양보하는 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다.’
시설은 많이 파괴되겠지만, 확실하게 저지선을 만들어놓고, 상대를 향해서 뚝배기 깰 수 있는 검을 준비하는 건 안전하게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기습을 당하고 계속 맞서 싸우기만 한다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는 게 불가능하고, 계속 불이익을 맞고 또 맞으면서 불리한 싸움을 지지부진 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전투인 셈이다.
‘기습을 당했으니, 재정비도 해야 한다.’
재정비하지 않은 군대는 많은 혼란을 빚을 수 있었다.
1인칭 시점밖에 가지지 못한 병사는 머리만 득실거리는 군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일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짓거리였다.
서로 호흡을 맞추던 동료 없이 이상한 곳에 끼어 있다면? 자신한테도 불리하고, 기존 병사들에게도 불편한 일이다.
열 받아서 턱주가리를 날리고 싶을 정도였다.
자기 자리도 못 지키는 사내새끼는 약자 중에서도 병신 계급에 속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어야 사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전쟁터 또한 그러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략적 후퇴는 좋은 전술이었다. 적의 기습 효과를 제거하는 수술이며, 자신을 재정비할 시간도 갖추게 되는 여유를 부여할 수 있었다.
전쟁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가능했다.
이점이 대단히 많았다. 그러니 안 하는 게 이상했다.
물론 이는 우주 낙원의 규모를 완전히 알지 못해서 생긴 총사령관 칼리스투스의 오해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치고 들어오다니.’
강력한 저지선을 마련하지 않고 갑자기 공세로 돌변했다. 이는 좀 어리석어 보였다.
‘전쟁은 상대적이라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다가 몸을 돌려서 다른 목적을 취하려고 하면 큰 손해를 본다.’
적장을 잡고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 자식까지 잡으려 하다가 화를 당하는 경우처럼 자신이 정한 목적 외의 부차적 목적을 취하는 건 그렇게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상대 또한 바짝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쟁은 항상 상대적이다. 똑같은 답안지를 내도 다른 성적을 받는다. 미칠 노릇이다.
깊게 침투하여 적들을 교란하고, 게릴라를 통해서 수급 또한 취하면서도 주목적인 파괴공작을 했던 일타삼피를 노렸던 엘프들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측면에서 적이 도달했다! 공중 타입!”
곳곳에서 적들이 튀어나왔다. 그 군세는 최소 만(萬).
‘한 번 얽히면 끝이다!’
묶이는 순간 연전(連戰)을 겪을 터였다. 즉, 그저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자연히 부담스럽다.
‘너무 부담스럽다.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면 적들이 얼마나 불쌍한 꼴이 될까?’
해도 너무하다고 욕지거리를 날릴 것이기에 칼리스투스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냈다.
“리틀 드래곤을 소환하라!”
명령이 하달되었다.
엘프들의 블루 드래곤 전신갑주는 레서 블루 드래곤 전신갑주와 또 달랐다.
아스톨포가 만든 전신갑주에 강력한 소환 주문이 깃들어 있다는 건 그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체계의 전혀 다른 계통의 힘을 다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바람귀공자 풀세트가 대단하게 여겨지며, 레서 블루 드래곤 전신갑주와도 견줄 수 있었다.
양산제작도 가능하다는 것도 뛰어난 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레서 블루 드래곤 전신갑주와는 다르게 엘프들의 블루 드래곤 전신갑주에서도 강력한 소환 주문이 깃들어있었다. 전쟁에서 중요한 건 머릿수이기 때문에 소환 주문을 넣는 건 좋은 일이다.
‘그전까지는 하지 못했지.’
효율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한계는 싹 밀어버린 지 오래였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가는 엘프니까.’
그들이 초월의 계단을 올라갈 수 있게 되면서 마법 체계 또한 변화가 일어났다. 과학의 발전처럼 엉뚱한 곳의 발전이 전혀 다른 곳의 발전을 이룩하는 것과 비슷했다.
푸른 전신갑주에서 밝은 청색 빛이 피어오르며 위로 뻗어 나가 드래곤의 날갯짓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것은 소환주문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날개라는 주문에 불과했는데, 아무런 공격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날개가 하는 일은 전신갑주의 출력이 낮다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마력 저장소>의 역할을 했다.
허공에 드래곤의 날개가 펼쳐지며 화려하게 빛이 났다. 날개에서 마력이 액체화가 되어서 뚝 흘러내리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환 주문을 사용했다.
날개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변하더니 이내 일그러지며 둥글게 변했고, 그곳에서 마법으로 만들어진 작은 아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삐익!”
“삐익! 삐이익!”
엘프들에게는 <삐익이>라고 불리는 블루 드래곤들이 날갯짓을 했다. 그중에서 새로운 소환 주문 숙련도가 낮은 엘프들의 손에 소환된 블루 드래곤은 날갯짓을 하다가 체중을 못 이겨서 바닥에 콩 떨어지기도 했다.
전신주문의 마법진과 엘프들의 마법 지식 및 제어력을 합쳐서 만들어내는 드래곤 소환이었기에 숙련도에 차이가 생겼다.
어느 너튜브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뚱땅뚱땅 걸어갈 정도로 몸이 땅땅했다.
종종 벼락의 힘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몸집이 중형견만해서 근접전 능력은 대단하지 못해서였다. 그런 아룡이 수천 마리에 달했으니, 그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드래곤들이 냉큼 날아갔다.
잘못 소환된 블루 드래곤 열댓 마리가 뒤뚱거리며 뛰어갔다.
꽈릉!
천둥을 동반한 벼락이 터져나갔다.
엘프들은 서둘러 후퇴를 감행했다. 계속해서 곳곳에서 적들이 튀어나와서였다. 서서히 그들의 규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체감은 커질 터였다.
후퇴하는 도중, 디아볼로스와 타락 엘프들은 후퇴하고 있는 자치왕국과 마주하기도 했다. 도렌 공왕이 이끄는 군대였다. 이들은 생각외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대신 이상하게 보급 물품이 적었다.
“보급물품은 어쩌고 몸만 후퇴하고 있는가?”
그와 친분이 있는 룩산드라가 다가왔다. 내정도 살피면서 또 군정(軍情)을 살피는 것이 도렌이었기에 그는 의외로 발이 대단히 넓은 공왕 중 하나였다.
특히,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찾아서 하는 배려심이 넘치는 공왕이라 일을 할 때 그를 그리워하거나 그와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하는 이들도 많았다.
“최대한 원거리로 싸움을 끝냈으니까. 그런데 후퇴가 빠르군? 엘프가 젤 마지막에 후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도 말게. 적들의 공세가 제법 매섭고, 규모가 커.”
부채꼴 형식으로 뻗어 나갔기에 적들을 많이 만나는 게 어려웠음에도 이 정도라면 조금 오싹할 정도였다.
“규모가 이상해서...적어도 백만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뭐? 설마 그 정도일까.”
룩산드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백만 군대라니, 듣기만해도 허황된 말처럼 들려왔다. 그 정도 군세를 유지하려면 식량이 얼마나 필요한지 생각만 해도 까마득하다. 반면 도렌 공왕의 눈에는 안타까움만이 가득했다.
‘적의 머리가 변변찮은 놈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이제 서로 죽고 죽이는 수밖에 없다.’
저지선을 만들어야 하는 건 자신들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도렌은 빠르게 후퇴를 하고 있었다. 저지선을 견고하게 만들수록 더 많은 병사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속도를 올려라!”
그가 더욱 빠르게 도망쳤다.
저지선의 구축은 도렌 공왕이 초안을 잡고, 시작했는데, 차근차근 다른 이들이 합류하며 가속화되어갔다. 도렌이 가장 중점적으로 둔 것은 자색 주포의 포진지를 최대한 많이 구성하는 것에 있었다.
“중형 마법진을 더욱 설치하라! 보급이 중요하다, 보급이! 더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중형 마법진을 서둘러 설치하여 자색 주포를 소환하는 한편, 보급도 차곡차곡 쌓아뒀다. 물약을 기본 보급량보다 늘려 3배에 가깝게 병사들에게 선보급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남들에게 주는 것보다는 자치왕국 병사들에게 많이 지급해야 한다.’
지금 다른 눈이 적을 때 해야 했다. 또 엘프들은 딱히 그걸 보고도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자치왕국의 병사 중에 마력을 지닌 상위 인간의 숫자는 3할에 불과해서였다. 그마저도 대단히 많은 숫자였지만 엘프들은 그들을 하찮게 보고 있었다.
하찮은 필멸자일수록 물약에 기대는 기댓값이 컸기에 방관했다.
어찌 되었든 도렌 공왕의 1순위가 포진지 극대화라면 2순위는 언덕을 쌓아올리는 일이었다. 오르막을 오르며 적의 기세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적들의 마법 폭격 속에서도 엄폐할 곳을 만들 수 있었다.
일거양득의 효과를 지닌 게 언덕 구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성벽을 쌓아올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언덕 지형을 만든다면 우리도 돕겠다.”
엘프들이 나섰다. 그들은 특히 곳곳에 높은 강철 언덕을 쌓아올렸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고블린들이 배변하는 강철을 엘프들이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서 간단히 가져올 수 있어서였다.
그 덕에 단번에 구색이 갖춰졌다. 가공을 거치지 않았기에 부실해서 높게 쌓을 수는 없어서 성벽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엄폐물로 쓰기에는 딱 좋았다.
“윽. 냄새.”
배치를 받은 병사가 코를 쥐었다. 고블린의 변 냄새는 끔찍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렬했다.
이들의 저지선은 <중앙 통로>라 불리는 곳에 생성되었는데, 우주 낙원에서 가장 넓은 통로 중 하나였다. 수많은 넓은 통로 중 하나였기에 저지선을 만드는 도중 적들이 벌떼처럼 나타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적의 군세도 결집하기 시작했고, 그곳으로 다종족 연합 또한 결집하기 시작했다.
“찍찍!”
심지어 뿔쥐들까지 후퇴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적들의 공세가 대단히 강력해서 다른 다종족 연합의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큰 손실을 보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드낙이 슬퍼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뿔쥐라도 포위당하거나 측면을 공격당하면 쉽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력이 빠지는데 자신들만 계속 나아간다면 포위되어서 죽는 결과 밖에 안 나온다.
포위가 이루어지면 아군이 충원도 안 되고, 허리가 잘리기에 전력이 반 토막 나는 효과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은 1:1의 싸움이 아니었기에 뿔쥐라도 적의 군세에 휩쓸리면 초개처럼 바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쥐께서 후퇴를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직하게 나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그 말에 대장쥐가 허리를 활처럼 휘며 배와 가슴을 당당하게 보여주며 말했다.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께서 그대가 죽으면 슬퍼하기 때문에 온 것일 뿐이다.”
“하하하.”
말 속에 걱정이 들어가 있어서 도렌이 기분 좋게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 뿔쥐들은 속정이 깊었다. 계속 어울리다 보니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동족 포식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컸다.
잔혹함이 커질 수밖에 없는 동족포식이었지만 드낙이 반마에 올라서고 많은 권능을 뿔쥐들에게 흘려보내 종족값을 높여줬다. 그 덕에 뿔쥐들이 낳는 후손들은 하나같이 뿔을 지니고, 검은 털을 지니고 있었다.
그 덕에 잔혹성이 빠르게 가라앉을 수 있었고, 다른 종족에게 인정을 베풀 정도로 여유로운 분위기가 생성됐다.
“적들의 군세는 끝을 모르고 모이고 있는데, 우리들의 충원 속도는 더디다.”
대장쥐가 이를 지적하자 다른 이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간이동을 통해서 충원되는 다종족 연합과는 다르게 상대는 달려서 오면 그만이었다.
규모적인 측면에서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물량을 옮길 수 있었다.
그 충원 속도는 끝도 없이 밀려오는 쓰나미와 비견해도 부족함이 있을 정도였다.
다만, 신제국과 녹슨 리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덕지덕지 뿔쥐 녀석...세파리아스와 어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대장쥐가 눈을 좁혔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전쟁 이후 논공행상에 신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폭풍이 될 소지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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