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6 -->
판타지 월드
우주 낙원에 공간 이동을 시작하면서 생긴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는 수많은 자를 죽여나갔다. 승리와 패배가 있었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영광을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시체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 와중에 아스톨포는 홀로 이 전쟁터에 들어섰다. 물론 정말 혼자는 아니다. 군대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건 필요한 일이었으나, 아쉽게도 자치왕국과 함께하지는 못했다.
공을 논하는 데 있어서 아스톨포와 갈라서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를 표합니다.”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할 수 있었는데, 도렌 공왕이 솔직하게 말해줬다. 그 솔직함은 아스톨포가 도렌 공왕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올리게 하였다. 위대해질수록, 높은 곳에 있을수록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쨌든 아스톨포는 결국 다른 세력과 함께하기로 했다.
북부 불모지의 권속 악마들과 함께했다.
이번 전쟁에 참가한 북부 불모지의 권속 악마는 대단히 많았다. 드낙에게서 잉태되어 죽은 몸에서 살아있는 몸을 받은 것이 삼위 변종 악마(三位變種惡魔)였다. 그들은 거의 총력전에 들어섰다.
먼저 마법진의 힘을 빌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흰여우 새린과 악마 연금술사들이었다.
“가자.”
새하얀 꼬리를 여러 개 팔랑거리며 흰 피부를 지닌 미녀인 새린이 앞서 나갔다. 그 뒤에 있는 악마 연금술사들의 면모 또한 미인들뿐이었다.
이들은 곳곳에 마법진을 닥치는 대로 설치했다. 그곳에서 헤드스 하이에나들이 소환되었다. 헤드 하이에나들은 하급 권속 악마에 불과했지만, 기병이었고, 물약과 단단한 드워프 손길 갑주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들이 마법이 깃든 전신갑주를 원하면서 만들어진 드워프 갑주를 매입해왔다. 흑백사를 소환 가능하고, 폭풍을 일으켜 다양한 방식으로 바람을 이용 가능한 바람 귀공자 풀세트는 물론이고, 드래곤 전신갑주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오크들은 드워프가 사이가 이상하게 좋아서 그대로 드워프 손길 갑주를 쓴다는 듯했지만, 그 외는 아니었다.
그 덕에 헤드스 하이에나들은 드워프 손길 갑주와 다양한 중무장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일단 드워프 갑주를 입은 이들이 쏟아져나왔다. 척 봐도 총알받이로 쓰기 좋아 보였다.
수십 개의 대형 마법진에서 헤드스 하이에나와 악마 연금술사가 나왔고, 곧 포낙서스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몸을 개조하고 또 개조하여 거인과도 같은 모습을 지닌 그는 이번 전투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빅데몬 팩토리에서 나오는 짐승 형태의 중형 괴물, 빅데몬 비스트는 정말로 좋은 시설 파괴자로 쓸 수 있었다.
“시작해보자!”
새린이 고함을 내지르자 모두 환호성을 내지르며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그들이 하는 건 간단했다.
‘어리석은 놈들이야.’
“크크크.”
“하하하.”
포낙서스와 새린이 웃었다. 다른 이들도 실실거렸다. 아스톨포는 묵묵부답이다. 그는 다가올 싸움을 조용히 준비하는 자였다.
“멍청한 놈들이야.”
“정말로. 결국, 중요한 것은 깃발 꽂기 아닌가? 아스톨포 왕자의 생각은 정말 대단하다.”
“별말씀을. 그저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취해서 색다른 공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아스톨포에게로 주제가 돌려지자 그가 이동하면서 대꾸했다. 포낙서스는 연구자로서의 가치가 대단했다. 이론이 아니라 실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자였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빅데몬 프로젝트만 해도 상상 이상이었다.
‘드낙 님만 아니었다면, 뱀파이어로 만들고 싶을 정도다.’
뛰어난 연구자는 꼭 필요했다. 누더기 같은 빅데몬 비스트의 위용은 대단했다.
‘저런 걸 양산가능하다니...진짜 악마의 반열에 들어서지도 않았으면서...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먹은 거지?’
놀라움의 연속이다.
“깃발은 많이들 준비하셨습니까?”
아스톨포의 말에 그들의 주제가 그로부터 멀어져갔다. 그의 눈에 북부 불모지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해적 깃발처럼 새까맣다. 거기에 흰색으로 거친 글씨체로 불모지의 거친 환경이 표현되어있었다. 그 거친 곳에서 살아가는 자신들의 위대함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보통은 깊게 들어가지 못한다.’
피해가 클 수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외곽을 노리며 방어 시설을 파괴하며 공적을 세우는 것이 타당했다.
반면 북부 불모지의 권속 악마들에게는 그런 게 의미 없었다.
‘권속 악마니까.’
죽는 것보다는 상대를, 생명체를 죽이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었다. 의외로 반마에 불과한 드낙을 굉장히 잘 따르는 것이 아스톨포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뇌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폭력성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권속 악마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지...’
애초에 악마의 기질과 신의 기질이 뒤섞인 존재인 반마반신이라는 것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틀려도 단단히 비틀린 존재가 드낙이었다.
죽고 싶어하는 권속 악마들을 아스톨포는 최고의 공적을 그들에게 선물할 생각을 가졌고, 그건 그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서로 의견 합치가 되었다.
“닥치는 대로 돌격해서 중심부를 휘저으며 저희의 깃발을 꽂고 다니고 기록을 해둔다면 그것만큼 대단한 공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전략은 단번에 북부 불모지의 전략뼈대가 되었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다니면서 중심시설을 타격하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드낙 님은 지금쯤 엄청나게 휩쓸고 계시겠지.’
방어선 자체가 헐겁거나 아무도 길목을 안 지킬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워낙 넓은 것이 우주 낙원이었다. 485만의 정예병과 300의 오버로드 그리고 반신급 천사계급까지 죄다 드낙을 막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방어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일단은 뒤로 미루고, 적의 머리인 드낙을 죽이는 걸 우선시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드낙 님에게 몰릴 것이다.’
그전까지는 닥치는 대로 깃발을 꽂으면서 파괴를 자행해야 한다.
‘목적은 단 하나. 이 대국섬(大國島)의 절반에 북부 불모지의 깃발을 꽂는 것.’
온갖 시설을 깊게 들어가서 파괴했다는 전공을 세운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즉, 이러나저러나 피해를 입으면서 닥치는 대로 들어가야 할 때는 지금이다.
‘곧 다른 세력도 깨닫게 되겠지. 의외로 적들의 기세가 어디론 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드낙이 날뛰는 만큼 적들은 드낙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서서히 깨닫게 될 것이다.
“텅텅비어있군!”
포낙서스가 크게 웃었다. 그리면서 두리번거리며 닥치는 대로 신기해 보이는 것을 쓸어담았다. 그중에는 이족보행형 파괴병기 빌리언즈도 있었다. 트롤보다 조금 큰 신장을 지닌 포낙서스는 그걸 냉큼 들어 올려서 뒤로 물렸고, 최대한 작업장에 있는 걸 꺼낸 뒤에 그곳에 불을 지르고, 물을 묻힌 북부 불모지의 깃발을 강하게 꽂았다.
이들은 수많은 곳으로 뻗어 나갔다. 각개격파 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적을 만나지 않고, 시설을 파괴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를 간단히 기록해서 공으로 삼았다는 걸 증명한 마법 보석을 후방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제법 큰 적군을 만나기도 했다.
“적들이다! 만신전을 위해서!”
오직 3성 인조생명체로만 이루어진 놈들이었다.
거기에 그들은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기권에 돌입하며 공기 성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그 자원을 통해서 만들어진 인조 정령들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인조 생명체 시설에서 뽑혀 나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구름 성채 정령(Cloud Citadel Soul)이었다. 이들은 공기의 저항을 통한 강력한 저지력을 지닌 방패와 바람의 창을 날릴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칼바람 바람 정령(Biting Wind Soul)이 있었다. 혹한의 추위가 깃든 바람을 내뿜는 범위 공격을 감행하는 정령이었다.
“생산건물입니다.”
아스톨포가 단번에 마검(魔劍) 샤를로트를 뽑아들었다. 공적 중에서도 군침이 돋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격하라!”
포낙서스건 새린이건 아스톨포건 누구든 고함을 내질러 명령을 내렸고, 빅데몬 비스트와 헤드스 하이에나 그리고 악마 연금술사들도 내달렸다.
몸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뿐인 놈들이었기에 무기에 연금가루를 묻혀서 불길을 토해내거나 얼음을 솟아나게 하는 등 다양한 작업이 사전에 이루어졌다. 다만 거기에 방어 연금 물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두에 있는 드워프 손길 갑주를 입은 이들을 향해서 칼바람이 쏟아져 내렸다.
“아아아아아-!!!!”
고함을 내지르며 우직하게 헤드스 하이에나가 그대로 질주했다. 드워프의 손길 갑주는 온갖 능력이 스며들어있는 건 아니었다. 단단하고, 잘 부서지지 않으며, 무식하게 단단한 게 전부였다.
또 혹한의 칼바람을 완벽하게 차단해주지 못했다. 그대로 꽁꽁 얼어서 숨이 멈췄다. 기도를 통해서 들어온 공기는 너무나도 차가웠다.
일시에 수천이 떼 몰살 당했음에도 돌격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빅데몬 비스트는 헤드스 하이에나보다 느려서 뒤늦게 그 구간을 지나쳤다. 워낙 큰 놈이라서 칼바람에는 꿈쩍도 안 하고 그대로 지나갔다.
푸와아아아아악!
만개가 넘는 바람의 창이 비스트의 가죽을 찢고, 생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으며 단번에 죽였다. 그만한 힘이 모였는데 안 찢기고 배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끝없이 물결치는 악마의 공격은 끝을 몰랐다.
“웃!”
캉!
이글거리는 화염이 기어코 구름 성채 정령에 닿았다. 놈은 바람의 창으로 이를 막았다. 재차 싸우려고 했지만, 놈은 그냥 무식하게 몸을 밀고 들어왔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뒷놈에게 밀려서 닥치는 대로 밀고 들어오며 이내 뒷열에 있는 정령이 쥔 바람의 창에 목이 깊게 베였고 쓰러졌다.
동시에 입에 물고 있던 가죽을 퉤 하고 뱉었다. 가죽에서 물약이 쏟아져나오며 거센 화염이 그를 포함해서 15m를 화염으로 휩쓸었다.
“그으! 그으! 끄륵!”
목이 베여서 숨을 내쉬지도 못하면서도 불타는 헤드스 하이에나는 기어코 한 놈을 덮쳐서 쓰러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갔다. 자폭 행위는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걸 뛰어넘으며 또 다른 헤드스 하이에나가 무기를 휘둘렀다. 상처를 크게 입으면 쓰러진 상태에서도 억지로 가죽 주머니에 있는 공격용 물약을 기어코 찢거나 열어서 화염을 일으켰다.
검은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올라 왔다. 살을 태우고, 땅을 태웠으며 연금물약도 타들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왔다.
그 검은 연기 속에서 수만의 박쥐떼가 득실거리며 하늘을 뒤덮으며 후방으로 끝까지 뻗어 나가더니 이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아스톨포가 모습을 드러냈고, 마검 샤를로트에서 어둠이 퍼져나갔다.
“어?”
시각을 상실한 건 아니다. 그저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어둠 때문에 그냥 아무것도 인식할 수가 없었다.
부웅!
검이 바람 정령을 훑고 지나갔다. 물리적인 육체가 아니었기에 베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고, 허공을 베는 소리만 들렸다.
“아.”
바람 정령 하나가 그대로 바스러졌다. 어둠의 힘이 진득하게 묻은 마검은 거무튀튀했고, 거기에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힘’으로 이루어진 정령들은 덧없이 먼지처럼 죽어갔다.
상황이 끝나고 시설도 파괴하고 깃발도 꽂았다.
죽은 헤드스 하이에나들에게서 드워프 손길 갑주를 빼서 다른 이들이 입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
[방심하지마라! 반신급이 아니다!]
엘레우테리오가 닦달하며 명령을 내렸다.
5성급 존재들은 하나로 뭉쳐서 드낙을 노리고 있었다. 1:1로는 이미 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오버로드들 또한 50단위로 묶어서 드낙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400만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인조 생명체들이 드낙이 갈 법한 만한 곳에 잔뜩 몰려들어서 자리를 지켰다.
그들이 발목을 붙잡는 사이에 5성 천사계급이 도달하면 충분히 드낙과 승부를 띄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물론 환희와 자유의 신인 엘레우테리오는 전투에 참가할 생각이 없었다.
정신체였기에 단번에 드낙이 시설을 파괴하기 시작하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중립신의 진짜 챔피언이다.’
제국에서 발견된 반신 황제는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 진짜는 이놈임을 그는 뼛속까지 깨달았다.
‘그 힘을 모두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나서면 안 된다. 무슨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모른다!’
엘레우테리오는 두려움에 떨었다.
이미 못 본 지 오래되었음에도 확실하게 중립신의 그림자는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우주 낙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는 결코 잡을 수 없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만신전이 있는 지구로 항해해야 합니다.]
[왜?]
[카실레안 교본에 따르면 손 쓸 도리가 없는 패배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전략적 후퇴이기 때문입니다.]
[후퇴하면 난 끝이다! 만신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가장 큰 격전지에 날 보낼 거다! 기각한다!]
[피해는 누적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엘레우테리오가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한 놈이다.]
[471구역에서 시작된 소요 사태는 아직도 진정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그건 지금 중요한게 아니다. 그놈만 잡으면 끝이다.]
결국 엘레우테리오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제기랄, 싸우기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소요사태가 계속 진정되지 않는 것도 이상했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했다. 어차피 일부분에 불과했다. 우주 낙원의 구역은 수만개가 넘었다. 그 중에 몇 백개가 넘어간 것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