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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그래도 빨리하려면, 저와 하는 게 좋을텐데...곧 동원령 아닙니까.”
아스톨포가 네스토르 옵시디안에게 한 번 더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난색을 보일 뿐이었다. 이에 아스톨포 왕자는 설득을 깔끔히 포기했다.
‘한 번 권유했으면 됐다.’
무릇 샤를로트 가문의 귀족이란,
무릇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로서의 귀족이란,
한 번 권유하면 될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귀족적이다. 물론 그 대가는 그 대상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그 결정에 따라서 아스톨포 왕자 또한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야 했으나, 이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가주의 아내인 둘시네아 옵시디안에게로 향했다. 긴 속눈썹과 깊은 눈동자. 부드러운 이미지의 미남인 아스톨포는 실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옵시디안 가문의 가족애는 돈독했다.
가문원이 결혼하는 족족 분가하여 사는 것만 봐도 특별한 가문이었다.
“저는 딸에게서 받을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레오니아에게 블러드 컨트롤을 배우게 해서 이른 시일 내에 뱀파이어로 만들도록 해보겠습니다.”
이에 아스톨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조차도 그렇게 하는데, 아내가 아스톨포와 딥키스는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옵시디안 가문은 크게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영생을 얻었다. 아스톨포 왕자는 귀족적인 존재였기에 그렇게 심하게 그들을 굴리지는 않을 것이다.
기품이 있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했다. 여유는 충분한 시간에서 나오며, 풍족한 곳간에서 나오기 마련이었다.
아스톨포 왕자는 레오니아와 거실에서 블러드 컨트롤에 대해서 가르쳤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맥동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 시절에는 느낄 수 있어도 이를 통해서 변화를 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레오니아는 뱀파이어다. 평범한 뱀파이어도 아니었다.
반마의 격에 올라선 왕자를 배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흡혈귀 가문이었다.
쿵...쿵...쿵...!
그저 손을 올린 것만으로도 내달리는 피의 감각이 레오니아에게 느껴지자 그녀가 크게 몸을 들썩이며 손을 놓았다.
“헉.”
이상한 기분에 그만 무서워졌다. 이에 아스톨포가 손을 살포시 잡으며 말했다.
“곧 익숙해질 겁니다. 그저 심장 소리만 들어도 뱀파이어의 필수 기술은 블러드 컨트롤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차근차근하면 돼요.”
아스톨포는 레오니아를 봐주고, 곧 게제라스 총리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뱀파이어의 숫자를 늘려서 차원 전쟁에서 약간의 공을 세워 체면치레라도 하여 귀족의 의무를 실천하려 했으나, 그것이 공(空)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를 옵시디안 가문에게 짊어지게 하는 것은 귀족답지 못했다.
‘그렇게 편협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이지.’
그는 아스톨포 샤를로트 왕자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회피하는 귀족이 아니며, 자신이 얻어야 할 이득을 위해서 남의 고혈을 빨아들이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 불명예스러운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게제라스 총리는 아스톨포 왕자의 요청을 당일에 바로 받아들였다. 물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서로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아스톨포 왕자.”
게제라스 총리가 예의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아스톨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와 똑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매번 환대해주니, 감사하기가 이를 때 없습니다.”
서로 빙긋 웃었다. 게제라스 총리와 아스톨포 왕자는 제법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국제 연합 도시에서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뱀파이어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옵시디안 가문을 혈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사업도 잘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게제라스 총리께서 살펴봐 주신 덕분입니다. 선정을 베풀었기에 모든 이들이 저의 사업에 대해서 이것저것 도와줬습니다. 그것이 총리를 위해서라는 이유라는 걸 듣고는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아닙니다. 어찌 저 혼자만 그렇게 위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열심히 일했을 뿐입니다.”
“그게 대단한 것이지요. 권력의 속성이란 것은 모든 인간에게 독한 마음을 품게 하는데, 총리께서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권력을 휘둘러서 자기 자식을 속박하는 부모들도 넘쳐난다. 그런 자들은 독재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모는 뜻밖에 많았다. 아스톨포는 이를 두고 모든 인간은 부패할 수 있고, 독재자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피를 구매하는 건 언제가 될 것 같습니까?”
게제라스 총리가 아스톨포 왕자의 핵심 이슈 중에 하나를 콕 집어서 물었다. 이참에 알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만나 뵙자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뱀파이어의 숫자를 늘리는 건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차원전쟁에 임하고 싶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다면 돕겠습니다.”
그간 아스톨포의 행보를 보고를 통해서 계속 받아온 게제라스 총리였기에 냉큼 올라탔다. 이에 아스톨포 왕자가 감사를 표했다.
“들어보지도 않고, 찬성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빚으로 달아두셔도 됩니다.”
“빚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지금까지 왕자께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믿음이 갔습니다. 왕자님의 언행이 저를 미리 움직이게 한 것뿐입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칭찬 릴레이를 또 십여 분 하고 나서 이야기가 다시 진행되었다.
“<바람귀공자> 사업입니다.”
“바람 귀공자 사업...? 굉장히 독특한 사업명이군요.”
게제라스 총리가 구미가 당겨 했다. 이에 아스톨포가 조금 사족을 달았다.
“본명은 아닌데, 닉네임처럼 스스로를 바람 귀공자라고 칭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인간 무장 체계가 바로 바람 귀공자 사업입니다. 일종의 뱀파이어가 인간을 위해서 만든 장비 풀세트를 말합니다.”
“흠!”
게제라스 총리가 머리를 굴렸다.
‘인간 전용, 레서 블루 드래곤(Lesser Blue Dragon) 전신갑주를 엘프들이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 물량은 한계치가 명확하게 존재했다. 엘프의 숫자는 인간보다 적기 때문이며, 전신갑주는 아무리 인간용으로 성능을 낮춰서 양산체제를 갖추어 대량으로 찍어낸다고 해도 한계치가 존재했다.
‘여기에 뱀파이어...’
그것도 반마가 끼어든다면, 양적 수준이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었다.
“좋습니다. 어떤 것인지 말씀해보십시오.”
아스톨포는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바람귀공자>라는 말답게, 이 장비를 갖추면 바람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윈드 브링어(Wind Bringer) 상하의 갑옷.
가장 많은 그릇을 지닌 면적이 넓은 갑옷을 모두 사용하여 바람을 크게 불러올 수 있도록 한다. 이게 바람귀공자가 되기 위한 필수장치였다. 가장 중요한 핵심 장비라고 볼 수 있었다.
“바람을 갑옷에 불러왔다면, 이를 해방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폭풍 해방 대검(Windstorm Release Greatsword)였다. 190cm에 달하는 대검은 다루기가 쉽지 않아 보이지만 윈드 브링어 상하의 갑옷을 통해서 바람의 힘을 다룰 수 있기에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인부터 시작해서 다수를 상대로 바람의 위력을 조정할 수 있고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바람은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거기에 이 폭풍 해방 대검의 크기도 크기 때문에 바람 제어를 돕는 걸 넣는다면, 수월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좋군요.”
누구나 쉽게 사용 가능하다는 점을 어필하자 게제라스 총리가 추임새를 넣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바람귀공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
갑자기 급발진하는 아스톨포의 말에 게제라스 총리가 의문을 띄웠다. 딱 지금까지만 생각해도 충분히 바람 귀공자라고 부를만했다.
“무릇 귀공자라면, 소환수 하나 정도는 다뤄야 하는 법입니다.”
“......그럴지도요.”
“특히 바람귀공자라 불리려면 소환수는 필수적입니다.”
“어떤 소환수 입니까?”
아스톨포가 손을 놀렸다. 제법 큰 공간이었기에 소환물을 소환할 생각을 가졌다. 뱀파이어의 육체 변형은 악마보다는 낮았지만, 동물과 같은 소환수를 만들어내는 건 악마보다 월등히 좋았다.
검은색의 비늘에 새하얀 배를 지닌 아름다운 중형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는 3m에 달했고, 굵기도 사람이 양팔로 한 아름 안을 정도로 굵고 컸다.
“등자를 놓기만 하면 기병으로 충분히 운용할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곁에서 싸우기도 좋습니다. 비늘의 굵기가 굵어서 갑옷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고, 안쪽에 있는 피부 또한 단단하여서 웬만한 공격도 버텨낼 수 있습니다.”
“오...”
게제라스 총리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만졌는데 단단함이 나무처럼 딱딱했다.
“어떤 지형이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차원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범용성은 군대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니...”
적을 분쇄하는 중기병보다 경기병의 숫자가 많은 이유는 예산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기병이 날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모든 상황에서 대처 가능한 흑백사(Black White Snake)는 좋은 소환수였다.
“대단합니다. 대인 마법, 다수 마법의 경계를 넘어서 바람을 적고, 크게 다루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고, 화력을 높였습니다. 거기에 소환수까지...!”
대인 마법을 넣을 곳. 다수 마법을 넣을 곳. 등등을 제외했기에 다룰 수 있는 바람의 양은 3배에서 5배에 달할 것이다. 이는 평범한 전신갑주보다 가진 화력의 양이 3배에서 5배임을 의미했다.
다양한 마법을 버렸기에 얻을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대인, 다수에 대한 대처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거기에 중형 소환수까지. <뱀파이어>였기에 가능한 수법이었다. 이것은 블러디 아티팩트였고, 흑백사는 뱀파이어가 소환하는 소환수였다. 다른 소환수보다 형편이 좋았다.
“거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부릇 귀공자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기품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신갑주는 전투용. 결코, 아름답게 꾸밀 수는 없습니다. 실용성을 추구해야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곧 큰 승리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멋을 포기해야 하지요.”
모든 이들이 알렉산더 대왕처럼 황금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아스톨포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배하고, 이끌어가야 할 민초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귀족이었다.
“어느 상황에서든지 전신갑주를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예. 그렇기에 <23시 23분>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건 뭡니까?”
“뱀파이어, 흡혈귀의 시간에는 다양한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그 시간대는 수십 가지가 되며, 그중에서도 23시 23분은 합일(合一)과 물건(物件)의 시간입니다.”
아스톨포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 시간에 맞춰서 만든다면 전신갑주를 피부에 융합시킬 수 있고, 언제든지 불러오고 해제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게제라스 총리의 눈이 크게 커졌다.
“그, 그런!”
이는 전신 갑주의 단점 중에서도 가장 큰 단점을 지우는 일이었다.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그 모습에 아스톨포 왕자가 웃어 보였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인간의 피가 많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게제라스 총리께서 많은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총력을 동원하여 돕겠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엄청난 장비나 다름없었다. 피부 이식이 가능한 전신갑주, 바람 귀공자 사업을 게제라스 총리가 단번에 밀어주기로 했다.
물론 한 가지 여지를 남겨두기도 했다. 행정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프로토타입을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미안합니다. 그렇게 흥분해서 확답을 줬습니다만...”
“하하하! 괜찮습니다. 증명되지 않은 전신갑주와 대검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흑백사가 순식간에 핏물이 되어서 다시 아스톨포 왕자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뒤로 프로토타입 바람 귀공자 풀세트가 평범한 인간 기사에 의해서 시험 됐다. 결과는 놀라웠다. 능숙해지는데 단 3일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전신갑주에서 모아서, 대검을 통해서 해방하여 사용 가능한 바람의 출력은 일반 전신 갑주의 5배에 달했다.
흑백사 또한 월등히 좋은 중형 소환수였다. 애초에 소환 마법이 크게 발전하지 않은 것이 이 세계였기에 더더욱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ON/OFF가 가능한 것도 대단했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23시 23분을 맞춰야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신비는 뱀파이어에게 매우 필수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국제 연합 도시는 동원령 선포를 통해서 온갖 자원을 쏟아붓고 있는 다종족 연합 중에서도 특히나 신제국과 자치왕국의 인간들의 피를 공식적으로 구매 의사를 밝혔고, 많은 이들이 이에 동참했다.
물론 단순히 동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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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귀공자] [흑백사] [23시 23분]님에게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