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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옵시디안(obsidian) 가문.
제국의 영광을 제법 누렸던 가문이며, 수십 대에 걸쳐서 관리를 지내왔던 가문이었다. 중산층 계급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흑황제의 손아귀 속에서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주된 타겟이 아니었기에 살아남을 수는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흑황제가 죽고, 신제국이 들어서자 서서히 다시 옛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실력이 받쳐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덕에 신제국에서 제법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인 가문이 될 수 있었다. 그만큼 죽은 문인들이 많았다.
식량 혁명 덕분에 식재료 값이 많이 싸졌기에 요식업이 크게 부흥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도 툭 솟아 나온 레스토랑에 매일같이 밥을 먹으러 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옵시디안 가문의 수완가적 면모를 보여줬다.
이제 옵시디안 가문은 국제 연합 도시에서 게제라스 총리 아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레이디.”
레오니아 옵시디안(Leonia obsidian)이 게제라스 총리의 이번 달의 법 개정안을 보고 있을 때, 아스톨포가 다가왔다.
서로 말을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간 서로 얼굴을 마주치고, 눈을 마주쳤던 사이였다. 거기에 아스톨포 샤를로트는 누가 봐도 귀족적인 면모를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다른 자리가 많은데요?”
“다른 자리에는 없는 게 있어서요.”
부드러운 미소에 레오니아 옵시디안이 눈을 홱 돌려서 법령서를 바라봤다. 이에 아스톨포는 허락을 받지 않았음에도 합석했다. 곧 종업원이 간단한 차 한 잔을 놓고 사라졌다.
“제 이름은 아스톨포 샤를로트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레오니아 옵시디안이에요. 법 관련 관리죠.”
등급은 말하지 않았다. 그게 국제 연합 도시의 방침이었다. 관리의 부패를 어떻게든 막으려는 시도였다.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고위 관리만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고, 그 외에는 월급만 다를 뿐 복장 통일은 기본이다. 관리 내부에서나 대우를 받는 정도였고, 밖에 나가면 그냥 아저씨인 셈이다.
“국제 연합 도시의 법령서를 보고 계시네요. 법이라...대단한 일을 하시네요. 저번에는 육류 배급소 최소한도에 대해서 법령서가 곳곳으로 배포되었잖아요?”
그 말에 레오니아의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법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봐요?”
“귀족이라면, 자신에게 적용되는 법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깍듯하게 말하며 살짝 눈을 아래로 향한 아스톨포의 긴 속눈썹이 레오니아의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쿵쾅.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예쁜 여자에게 환장하는 남자처럼, 잘생긴 남자에게 환장하는 것이 여자였다. 서로 다른 점이 많은 것도 남녀지만,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 것도 남녀였다. 결국에는 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가슴이 뛰고 있는 게 느껴졌음에도 레오니아는 겉으로는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향적 인간이야말로 귀족적인 인간이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서 사교 스킬을 갈고닦아서 외향적 인간인 것처럼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동시에 신중했다. 실로 귀족적인 인물이 될 수 있는 게 내향적 인물이었고, 그런 인간은 특히 연애에도 신중함을 보이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애를 쓴다.
그것이야말로 아스톨포가 원하는 자신의 혈족이었다. 신중하며, 돌다리를 건너기보다는 현상 유지를 원한다. 위험한 모험은 하지 않고, 수백 년의 삶을 조용히 살아가면서도 혼자 놀기 좋아하는 이들. 그들이야말로 샤를로트의 일원이 될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스톨포의 작업은 금방 식을 수밖에 없었다.
일련의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 속에는 뿔쥐 정보원도 끼어있었다. 최근에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국제도시연합은 도시 내부의 치안 확보에 눈이 돌아간 놈들이었고, 게제라스 총리의 행정력을 통해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단 한 명의 구심점(求心點)이 만들어내는 카리스마는 국제연합도시 전체에 뻗쳐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치 않았다. 다만, 행정력이 높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스톨포 왕자가 불쾌감을 드러냈다. 지극히 계산적인 모습이었다.
저들은 국제연합도시의 비호를 받는 자들이며 게제라스 총리로부터 직함을 하사받은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후하게 대하는 것보다는 거침없이 하대하는 것이 귀족적이다.
남들보다 특별하게 여겨지기 위한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게 아스톨포였다. 남들보다 특별한 것이 귀족이다. 그게 아스톨포의 귀족다움이었다.
이에 다른 이들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국제연합도시의 경찰과 뿔쥐 정보원 앞에서도 하대하고,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들어내는 아스톨포의 모습은 대단한 만용을 부리는 것 같아서였다.
실제로 경찰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들은 감히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아스톨포 샤를로트의 격(格)은 반마(半魔)급이었다. 어중이떠중이 필멸자가 직함 믿고 나댈 수 없었다. 결국, 법정에 서면 아스톨포의 압승이다.
그는 세계에 필요한 인력이고, 경찰의 대체재는 많아서였다.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처럼 대체재가 없는 직업은 우대받기 마련이다. 해마다 의사가 적게 나올수록 기존의 의사들 몸값은 높아지고, 이는 교사부터 시작해서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희소성이 위대한 연봉을 만들어낸다.
그 진실을 아는 자들은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해도 악착같이 펜을 손에 쥔다. 뭉툭하게 튀어나온 집게손가락 마디가 그들의 훈장이다.
“아스톨포 샤를로트 왕자님. 자치왕국의 세리안 공왕께서 만나고 싶어 합니다.”
“알겠다.”
짧게 대답한 아스톨포 왕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에 경찰과 뿔쥐 정보원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
“왜? 더 말할 것이 있는가?”
“급한 일입니다. 필요하다면 저희가 가시는 데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아스톨포 왕자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 나는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의 말이 줄어들며 레오니아에게로 향했다. 흑발흑안의 미녀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느새 아스톨포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처세술을 터득하면 분명 좋은 귀족이 될 수 있어 보였다.
“정 자치왕국의 공왕께서 많이 급하다면 메시지 마법을 띄워 좋으면 한다.”
“예? 왕자님?”
“급하면 메시지 마법을 연결했겠지. 그런데, 나보고 찾아오라고 하지 않느냐.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닌 거다. 볼일이 끝났으면 물러가도 좋다.”
그가 축객령을 거침없이 내렸다. 이에 국제 연합 도시의 경찰들이 물러갔다. 뿔쥐 정보원이 쥐소리를 냈다.
“찍찍.”
‘생각보다 겉멋에 찌든 놈이다.’
아스톨포 왕자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저런 판단을 순식간에 내린 것만 해도 상당한 인재인 것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가오에 미쳐버린 놈이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서 자치왕국 세리안 공왕의 전언을 무시하고, 되려 메시지 마법으로의 연결을 명령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상종하질 말아야겠다.’
이 정보는 지하 연합에게 전달될 것이다. 하지만 뿔쥐들은 전혀 몰랐다. 아스톨포는 겉멋에 찌든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귀족적인 면모>를 매우 중시한다는 것을.
‘아’다르고 ‘어’다르듯이 그건 매우 큰 차이였다.
그들이 사라지자, 아스톨포 왕자가 레오니아 옵시디안을 바라보았다.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인가 보네요. 좋아요.”
아스톨포 왕자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건네자 짐을 챙기던 그녀가 대꾸했다.
“이 정도는 저도 할 수 있는데요.”
“이 정도 배려는 받아들이셔도 괜찮아요.”
이에 그녀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아스톨포가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짐도 주세요.”
“아! 으!”
손을 내민 게 가방을 달라는 소리인 것을 깨닫고 그녀가 서류 가방을 건넸다. 여자가 쓰기에는 대단히 투박한 업무 가방이었다.
밖의 벤치를 손수건을 꺼내서 말끔히 닦으며, 손으로 그녀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녀 또한 최대한 옷매무새를 고쳐잡았다. 상대가 저렇게 나오니, 마치 공주가 된 기분이라 절로 조신해졌다.
서로 자리를 잡자 아스톨포가 본론을 꺼냈다.
“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흡혈귀라는거요? 전에 설문지 조사 하는 거 봤어요.”
“어떠셨어요?”
“나쁘지 않아 보였어요. 확실하게 반마급으로 올라설 수 있잖아요?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드낙 님 또한, 반마반신이시고요. 그리고 그분은 생명을 소중히 하시죠. 또 우리를 지키려고 애를 쓰시고요.”
이 세상에는 뱀파이어라는게 없었다. 그 덕에 시작부터 국제 연합 도시와 드낙의 등을 업은 아스톨포 왕자의 평판은 썩 나쁘지 않았다.
특히 세속적인 이들이 많아짐으로써 자신의 피를 돈 주고 파는 걸 기쁘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소비로부터 오는 쾌감이 피를 파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보다 더 대단했다.
요리 대회 이후 요식업이 부흥했고, 먹거리만 해도 돈을 은근히 많이 먹어치우고 있었다. 하물며 카드놀이부터 시작해서 온갖 취미들도 한 몫 했다.
소비를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은 소비를 위해서 존재하는 선순환의 구조가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신을 제 일원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물으시는 걸 보니, 거부권도 있나 보네요?”
“그럼요. 귀족은 여유가 있을 때, 결코 상대방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거부하신다면 저는 깔끔하게 떠날 것이고, 당신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해지지 않을 겁니다.”
그게 바로 귀족이었다. 힘이 있다고 약자를 패고 다니면 그만큼 꼴사나운 것이 없었고, 가장 중요한 멋이 없었다.
“흡혈귀에 대한 정보는 많은 이들이 눈여겨봤어요.”
그도 그럴 것이 아스톨포가 잘 생겨서였고, 부드러운 인격을 지녀서였다. 그 덕에 한 번 크게 이슈가 되었지만, 아스톨포 왕자가 그 누구도 흡혈귀로 만들지도 않고, 실제로 피도 구매하지 않아서 흐물흐물해졌었다.
낮이라고 해서 힘의 소모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었을 때 가졌던 무언가가 소실되는 것도 아니었다. 상위인간처럼 흡혈귀 또한 인간의 상위종이었다. 그저 힘을 증폭하고,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혈액이 필요할 뿐이다.
아스톨포 왕자는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가족들과 상의 끝에 결정하고 싶어요. 신중히 결정하고 싶거든요.”
“좋습니다.”
아스톨포 왕자가 즉답했다. 이에 레오니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요.”
“그랬다면 오히려 제 눈이 잘못된 것이겠지요. 저는 당신을 택했고,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절 기쁘게 만들고 있어요.”
아스톨포 왕자가 긴 그녀의 생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손길에 레오니아의 볼이 확 붉어졌다.
“그럼 때를 봐서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여기 쪽지에 적어뒀으니, 필요하다면 불러주세요.”
“네.”
대화를 마친 아스톨포는 앞으로의 예정과 그녀가 지금 하는 일과 꿈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아스톨포의 사업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블러디샵은 인기가 대단하던데요.”
“구매력이 강한 상품을 팔고 있죠. 그런 것치고는 하나도 안 가지고 계신데요. 블러디 샵의 훌륭한 아티팩트들을...”
“아...”
아스톨포가 자신의 브로치를 떼어서 그녀에게 건네줬다. 손으로 잡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간 미지근해요.”
“체온 유지는 까다롭죠. 아침에는 춥고, 낮에는 덥고 그럴 때마다 옷을 입고 벗고 아주 불편할 때는 이 브로치가 많이 팔릴 수 있겠죠?”
“딱 봄이네요. 날씨도 흐르고 여우비가 내릴 때 가장 필요한 브로치에요. 제품명이 어떻게 되나요?”
“쇼핑을 잘 안 하시나 봐요. 국제 연합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죄다 샀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아스톨포의 말에 레오니아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법에만 관심이 있어서요...”
“그럼 부모님한테 선물로 가져다주시는 건 어떠세요?”
그 말에 레오니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그럼 일이 끝나시면 블러디 샵으로 와주세요.”
“네!”
서로 금방 헤어졌다. 하지만 그냥 헤어지지 않았다. 아스톨포는 능숙하게 부모를 볼모로 잡아서 그녀와의 당일 약속을 끌어냈다. 그에게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
“그, 그아아아아아아!!!!!”
드낙이 대신 육체의 엄지 발가락에 양손이 붙은 채로 고함을 내질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엄지 발가락과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 기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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