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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반마반신을 뵙습니다.”
공왕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 모두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지배자들이 고개를 숙인 것만으로도 분위기 자체가 달랐고, 이를 받아들이는 드낙 또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자존심이 확 꽃을 피웠다. 그만큼 존경받은 이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짜릿했다. 천박한 감성이었지만, 그게 인간이었다.
“공왕들까지 모두 하프 드워프의 도시에 오다니, 화약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는 몰랐다.”
드낙이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먼저 자치왕국이 화약을 대하는 것부터 짚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도렌 공왕이 입을 뗐다. 도렌과 아크온이 서로 눈이 오고 갔다가 이내 그가 몸을 일으킨 것.
“자치왕국의 엘리트 숫자는 대단히 적습니다.”
“흑황제로부터 멸망의 기로까지 섰었던 옛제국인보다도 더 적다는 소리인가?”
그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 신제국과 자치왕국의 엘리트 계급이었다. 현대로 치면 중산층이다.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실질적인 알짜배기들.
“예. 중립신에게 희생된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희 또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출신 성분이 하찮은 이들을 고용하고, 위로 올렸다.
검증받지 않은 자들에게 자원을 주고, 기사로 임명했다.
모두 신제국과의 싸움을 위해서였다. 덩치를 키우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신제국의 상황은 빠르게 진정되었었다. 오직 단 한 명의 권력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세계는 그만큼 빠르게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다만, 드낙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세파리아스는 폭군 중의 폭군. 그런 자가 어찌 감히 평화의 시대를 나라 속에 펼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뿔쥐의 정보가 있다고 해도 그 정보를 통해서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사람인 법이다.
똑같은 정보라도 서로 다른 판단을 하기 때문이며, 드낙은 세파리아스의 ‘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다. 자치왕국의 엘리트가 신제국보다 적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군.”
“퀄리티는 저희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위인간(上位人間)이 된 기사는 마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신제국의 기사보다 더 오랫동안 싸울 수 있고, 더 많은 화력을 낼 수 있습니다.”
백병전에서도 2배의 위력을 보일 수 있었으며, 단순 화력전에서는 5배가 넘는 위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숫자가 적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
“자치왕국의 모든 곳을 방어할 수는 없겠지?”
“군대와 기사단은 공왕마다 1개씩 가지고 있기에 4방면을 보호할 수는 있으나, 피해는 감수해야 합니다. 차원전쟁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환상 마법을 통해서 통솔과 지휘를 해야 하는 기사들에게 경험시키고 있지만,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환상 마법진?”
드낙이 흥미를 가졌다.
“피규어 병정놀이 사업을 보며, 자치왕국 또한 느낀 바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전투를 위해서 존재하는 이들은 실전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제법 돈을 까먹었으나, 환상 마법진을 통해서 양질의 경험을 기사들에게 시켜줄 수 있습니다.”
중간간부나 다름없는 기사는 최대한 많은 걸 알고 있어야 했다.
간부나 되는 이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작전에 투입될 수가 없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아야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자치왕국은 실전 감각 경험을 축적시키는 환상 마법진을 통해서 차원 전쟁의 다양하면서도 최악의 시나리오를 뽑아서 기사들에게 간접 경험을 시키고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저희 자치왕국은 신제국보다 우월한 대응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다! 아주 좋아!”
드낙이 고함을 내질렀다. 자치왕국이 홀로 추진한 것치고는 굉장히 좋아 보였다. 물론, 강철의 비라 불리는 피규어 전쟁처럼 사업적인 면모는 약했지만, 오히려 군사적으로 굉장히 뜻깊은 시스템이었다.
‘증강현실을 통해서 훈련하는 군대 같아서 뭔가 테크놀러지하다.’
“나중에 나도 꼭 경험해보고 싶다.”
“예. 언제든지 방문해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도렌이 다시 착석했다. 오션 오크들 또한 장총, 블랙 피닉스를 부무장으로 선택하고 있는 이때, 화약은 모두에게 필요한 자원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가? 신제국은 모든 걸 걸었다.”
드낙이 대충 그들의 조항 중 몇 가지를 말해주자 모두 사색이 되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렌이 직감하며 마음속으로 신제국을 노려보았다. 세파리아스의 보이지 않는 검격이 어느새 도렌의 목젖에 닿은 것처럼 서늘했다. 반면 아크온은 즉답했다.
“아무래도 신제국은 자원비축을 상당히 오랫동안 한 것 같습니다. 전시체제에 돌입했음에도 여유 자원이 이렇게 많이 남는 것만 봐도 칼을 갈고 미래를 내다본 것 같습니다.”
한방 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일을 예상하고 비축했다는 소리인가?”
“예. 확신합니다.”
공왕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신제국의 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허어...그게 가능하다고?!”
그 말에 드낙이 혀를 내둘렀다.
‘국가적 차원에서 한 걸음 도약하기 위해서 전시민이 거기에 응답했다.’
“분명 법으로 이를 제정하고, 철저히 감시했을 겁니다.”
“아니다. 만약 그렇게 고통을 받는 이가 나왔다면, 뿔쥐들이 연락을 했을 것이다. 필요한 제재는 했겠지만,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회가 이를 인정했겠지.”
드낙은 서둘러 뿔쥐 정보원을 불렀다. 다른 공왕도 신제국이 어떻게 이토록 많은 자원을 타국에 사용할 수 있는지 대단히 궁금하였기에 뿔쥐 정보원을 기다렸다.
“우리들의 살아 숨 쉬는 신을 뵙습니다!”
“신제국이 자원을 너무나도 많이 축적했다. 다른 국가에 비하면 상당한 수준이며, 경악스러운 경우이다. 어떻게 이를 준비했는지 알 수 있나?”
“예!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농간이 신제국에 만연해 있습니다!”
‘농간!’
드낙이 눈을 부릅떴다.
“어떤 농간을 부렸느냐?”
“예! 간악한 혓바닥을 놀려서 먼저 신제국의 미래를 논하였으며 거기에 시민들을 동참시키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
전혀 농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뿔쥐들의 노골적인 세파리아스 혐오에 드낙은 속으로 만족하면서도 다시 한 번 단어를 순화시켰다.
“즉, 설득시켰다는 소리인가?”
“그렇게라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이시여!”
“어떻게 설득시켰지? 정확히 무엇을 논하였고, 무엇을 시민들에게 준다고 하였느냐.”
“위대한 꿈을 준다고 속였습니다.”
다른 공왕들이 이를 중얼거렸다. 위대한 꿈...현물도 아니고, 현실적이지도 않은 단어였다. 하지만 그게 시민을 움직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엇이냐?”
“먼저 드낙님의 처세를 말하였습니다. 굶는 이가 없다고 천명한 반마반신을 따라서, 신제국 또한 웅장한 꿈을 꿔야 한다고 말하며 곧 다가올 위협에서 인간이 다른 종족보다 우뚝 서기 위해서 모든 걸을 아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그렇게 하였느냐?”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신제국의 벌금은 항상 불법적 행위를 통한 취득보다 3배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없으면 노동을 해서라도 만들게 합니다.”
개인에게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개인은 범죄자이며, 선한 시민에게 상처를 주는 벌레보다 못한 놈들이다. <3배수 형법>은 신제국의 시민으로부터 가장 인기가 있는 형법 원칙이었다.
죄를 통해서 얻은 취득 가치보다 3배 더 많은 벌금!
“벌금을 통해서 불만 있는 시민들을 제어하다니...”
어차피 자원 축적을 위한 법률이었다. 어겨도 감옥은 가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할 수밖에 없었다. 세금을 더 많이 걷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 신제국의 분위기는 어떤지 알고 있나?”
“저는 하프 드워프 담당이라서...죄송합니다. 최대한 많이 파악하려 하고 있지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알았다. 그만 가 봐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드낙은 현재 신제국 분위기를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축제 분위기겠지.’
국뽕 치사량이 투입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매일같이 모았던 자원이 차원 전쟁 동원령을 통해서 확실하게 신제국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현대로 치면 그간 모은 달러를 전국민에게 1만 달러씩 빠짐없이 지급하는 셈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국가가 집을 구매하여 집 없는 사람에게 뿌리는 짓거리도 심심찮게 신제국에서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수많은 것들이 그간 모은 시민들이 한 것이라며 지급되고, 건설되고 있는 걸 보면 국뽕을 외치고도 남을 터였다.
‘거기에 이번에 화약까지 대량으로 가져간다면...’
크게 안정감을 느끼며 신제국의 시민이라는 것에 감사할 것이 분명했다.
‘어렵다.’
신제국은 오래전부터 자원을 축적시켜서 이번 일에 동원했고, 자치왕국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제시할 카드는 하프 드워프 입장에서도 보잘것없었다.
‘화약을 제공하는 하프 드워프도 이득을 많이 보면 기뻐할 것이다.’
드낙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부터 패배하고 이곳에 들어섰구나.”
뿔쥐가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싸움에서 모두에게 정보를 공유했다가는 괜히 뿔쥐만 입지가 안 좋아진다.
“신황제는 싸우기 전에 이기고 들어왔습니다. 이건 자치왕국의 실수입니다.”
도렌 공왕이 크게 패배한 표정을 지었다. 드낙이 그를 위로했다.
“누가 그렇게 할 줄 알았겠냐?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였다.”
차원전쟁이 예정되어있어도 그렇게 금방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 여겼다. 무엇보다 자치왕국은 신제국과 경쟁하는 처지였다. 그렇기에 내실을 다지는데 모든 것을 다했으며, 당장의 싸움에 집중했다.
반면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언젠가 이 테라로부터 뻗어 나가 세상 곳곳에서 인간을 죽이고 그 업을 탐하며 황금빛의 신성력을 토해내며 신으로 추앙받는 초월자를 망설임 없이 한 자루의 검으로 토벌하겠다는 결심을 한 상태였다.
서로의 방향이 크게 달랐고, 그 결과가 이렇다.
평화의 시대에 평화를 누리고, 더 많은 행복 추구를 하며 쓸데없는 곳에 자원을 허비한 자치왕국과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한 신제국은 가진 것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낸 자치왕국의 시민의 감정 가치는 높게 봐줄 만 했지만 이렇게 현실적인 격차에 도달하면 그마저도 부질없이 느껴지는 법이었다.
“어떻게 할 셈이냐? 욕심이 남아 있나?”
이에 공왕들이 허탈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여기서는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패배했는데, 패까지 뒤집을 이유는 없습니다.”
세리안이 말하자 다른 공왕들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드낙과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치왕국은 철수했다. 곧 다른 이종족들도 왔다가 금방 물러났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며 드낙은 세파리아스에게 술 한 병 들고 갔다.
“축하한다.”
순수하게 그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인제 와서는 감탄밖에 남지 않았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들였다.
“행패라도 부릴 것 같았는데, 쉽게 포기했군.”
이에 드낙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잘 짜인 판인데, 내가 뭣 하러 행패를 부려? 근데 너도 아주 징글징글하다. 그렇게 많은 걸 어떻게 잘 보관했냐? 보통은 쓰기 마련이잖아.”
이에 세파리아스가 손바닥을 펼쳐서 벽처럼 세우더니 그 뒤에 손가락을 쿡 하고 찔러넣었다.
“보통 인간의 사고는 딱 이 정도다.”
“그게 뭔 말이야?”
“턱 막혀있다는 소리다. 내가 널 보고 느낀 건 평범한 인간은 자신의 결심을 3일도 채 유지하지 못하고, 버리기 일쑤며 자신의 10년을 내다보기는커녕 다음 달에 뭘 할지도 모른다.”
“......”
“그 형국이 이렇다.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표현하기 딱 좋다. 하찮지. 실로 하찮아. 그렇기에 초월자들에게 가축처럼 키워지는 것이다.”
술잔에 든 술을 남김없이 마신 세파리아스가 소파에서 일어서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갑게 피어오른 달이 떠 있었다. 이를 손가락으로 단번에 가리켰다.
조금씩 움직이던 달에 의해서 그늘진 세파리아스의 몸이 은빛으로 잔뜩 물들었다.
영화와도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세파리아스가 지닌 알 수 없는 기세가 드낙을 압박했다.
“봐라! 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일이다. 수많은 종족을 꿰뚫고 저 달을 노려야 한다. 그게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다.”
드낙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몸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화려하게 피어올라 타올랐다. 그 이글거리는 열정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끈했다. 허나 세파리아스의 길에는 오직 죽음만이 보일 뿐이었다.
한 줌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사지로 내모는 세파리아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대영웅다운 면모였다. 그렇기에 드낙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큰 그림 오지네. 네가 다 해먹어라. 난 치킨이나 뜯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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