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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통계는 얼마든지 조작 가능했다. 특히 드워프조차도 들어가지 않은 전력 통계 수치는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지적에 세파리아스가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드낙의 컨디션이 좋나 보군.’
그가 세상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해온 것이 세파리아스였다. 무엇보다 세파리아스 또한 ‘죽지 못하고’ 속박돼 중립신에 의해서 함께 때를 기다리는 처지에 내몰렸었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거늘.’
마침표를 찍을 줄 모르는 신이었던 엘 마르토 카사다민을 그때부터 크게 혐오했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기에 신으로 향하고 있는게 세파리아스 불파겐이었지만 중립신처럼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해도 전투 상황에서 엘프 기사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간 그가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다. 심장이 멈춰도 몸을 움직여서 여럿 데려간 놈이 불세출의 무인(武人)이 바로 그였다.
“이 간악한! 이 불표막심하아아안!”
드낙이 잔뜩 흥분해서 서류를 내던졌다. 이에 다른 이들이 허겁지겁 주워들었다. 드낙이 밑바닥에서 구른 노가다꾼마냥 손가락질을 해대며 허공에 쿡쿡 찌르며 이놈, 저놈 거리기 시작했다.
“진정해라. 이번에는 우리들의 실수가 있었다.”
“못 알아차렸으면 그냥 넘어갔겠지! 배운 놈들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똑같다! 어쩜 이렇게 구질구질한 짓거리를 하는지!”
“구질구질? 이권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게 문제라는 거야. 좀 정직하게 살면 안 되냐? 빵! 하고 제대로 승부를 했어야지.”
“암살하는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서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먼저 지친 건 세파리아스였다. 하는 꼴을 보니 온종일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만! 파비앙 부관!”
“예! 반마반신이시여! 부디 이것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이게 현재 신제국이 하프 드워프에게 줄 가협약의 조항들입니다.”
드낙이 거칠게 그것을 손으로 낚아챘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1. 하프 드워프는 신제국의 제1우방으로 여겨질 것이며, 경제적인 협력 또한 그 어떤 이자도 없이 금궤 3,500관의 지원 또한 요청할 수 있다. 또 필요하다면 군대 10만에 대한 군사적 지원요청을 할 수 있다.]
‘미친놈인가?’
군사적 경제적 협력이라고 치기에는 너무나도 큰 조항이었다. 거기에 요청하면 신제국은 거기에 응해야 했다. 그렇게 할 것처럼 굴 정도로 적극적 조항이었다.
“1조항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거냐?”
“차원전쟁을 앞두고 있다. 군대 10만은 하프 드워프들이 자신의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차고 넘치는 숫자지.”
“네놈...”
드낙이 으르렁거렸다. 그 또한 귀족에게 하도 시달렸던 남자다. 지금 세파리아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연 알고 있었다.
‘이 10만의 군대는 버림패다!!!!’
그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10만, 차원전쟁이 발발했을 때, 응당 하프 드워프를 구원하러 떠날 것이다. 그러나 그 10만. 징집병이나 다름없을 병력 구성이 분명했다.
말 그대로 죽으러 가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물론 그 속에 소수의 정예를 끼워 넣을 터였다. 하프 드워프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굴려지는 군대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날 속일 수는 없지.’
징집병은 약자. 그저 창 한 자루 꼬나쥐는 게 전부였다. 그런 자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게 드낙이었다. 이것은 그가 강했기에 마음이 여유롭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곧장 죽을 위기 속에서는 이놈, 저놈 다 버릴 것이 드낙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이 10만 명을 다 소모품 취급할 생각이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꼴이 우습구나.”
드낙의 눈이 세파리아스의 눈과 마주쳤다. 그 속에 깃들어있는 하찮음. 그게 드낙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인간을 위해서 나아갈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냐.”
“전쟁통에 만인(萬人)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나와봐라. 넌, 그 모두를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냐? 전쟁에서 죽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어딨느냐.”
그 말에 드낙이 입을 다물었다.
이 세상은 정예병들의 세상이었다. 산맥에 향하면 순찰자와 오크 전사가 서로 싸운다. 평야에는 10년 이상의 베테랑들이 날뛰는 곳이었다.
병사는 대부분 모병해서 기사라는 엘리트에 의해서 교육받는다. 그런 놈들의 싸움에서 사망자 없는 전투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세파리아스는 오히려 소모품처럼 병력을 만들어서 보내는 것조차도 기쁘게 여기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신제국은, 제국의 시민은 더더욱 안전해질 것이다. 하프 드워프로부터 화약을 대대적으로 받을 수 있어서였다.
반면 하프 드워프에게로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앞에 세울 고기 방패 10만으로 안전하게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방위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서로 윈윈이다.
신제국은 하프 드워프가 자신들을 선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하프 드워프는 신제국이 정말로 말을 지킬 줄 아는 국가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후일에 서로 큰 도움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음흉하게 말이야. 경제적인 지원인 척하면서 뒤에 군사적인 조건이 진짜 조건인 것도 실로 치밀해.’
첫말에 금궤 3,500관을 쑥 집어넣으면 보는 이로 하여금 거기에 집중하게 한다. 금궤 하나에 금화가 1천 닢 들어간다는 걸 생각한다면, 깜짝 놀랄 정도의 규모였다.
잘 생각해보면 하프 드워프가 그런 요청을 할 리가 없었다. 즉, 진짜 조건은 10만의 군사 조건인 셈이다. 만약 드낙이 ‘사람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다면 돈 때문에 칼춤을 췄을 것이다.
헛손질하는 짓거리였지만 거기에 걸려들지 않은 게 운이 좋았다.
“어쨌든 10만은 너무한 거 아냐?”
“흥. 대량의 화약을 통해서 세울 수 있는 방위 전략을 생각해봐라. 지킬 수 있는 시민은 그 수천 배가 넘는다.”
아무리 흑황제에게 의해서 몰락했다고 하나 제국의 인구수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후일을 도모하며 잘 도망쳤다. 또 의외로 <왕국>보다는 <제국>을 칭하고 있는 신제국으로 향하는 남부인도 제법 있었다.
그 덕에 지킬 사람이 많은 게 세파리아스였다. 그리고 그는 시민들이 자기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벌레 같은 놈들임을 또 잘 알고 있었다.
‘충격적인 일이지.’
감히 자신조차도 지킬 자신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가 생각하기에 정말로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이제 그런 인간들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 세파리아스였고, 냉철하게 10만을 버리고 시민을 지킬 때가 왔다.
조항을 훑으며 드낙은 신제국이 제대로 준비하고 왔음을 느꼈다.
“안 봐도 딱이네. 신제국이 가겠네.”
드낙이 혀를 찼다. 이 정도로 많은 자원을 하프 드워프의 화약과 교환하려는 건 신제국이니까 가능했다. 머리가 4개인 자치왕국으로서는 할 수 없었다. 그런 결단이 불가능했다.
‘화약의 다른 대체재도 있고.’
절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절박한 이에게 내어줘야 하는가?’
그건 고민해봐야 할 일이었다.
“드낙,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그냥 구경이나 하다가 가라. 네가 나설 곳이 아니다.”
“그건 내가 정한다.”
그가 몸을 일으켜서 가볍게 걸어나갔다. 허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왠지 모르게 예전 생각이 나서였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영지를 다스릴 때가 생각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남에게 맡겼다. 자신의 영지보다는 밖의 일에 더 신경 쓸 때가 많았었다.
지금도 다종족 연합의 일이었으나 드낙이 하는 건 몇 없었다.
편하기도 편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공허했다. 게으름이 그 빈틈을 노리고 삐쭉 튀어나왔다.
타오르지 않는 장작처럼 식어버린 드낙이 자치왕국의 공왕들이 지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더니 이내 뚝 멈춰 섰다.
쾅!
드낙의 주먹이 벽 한구석을 그대로 찔러넣었다. 건물이 드득거리며 흔들렸다. 놀란 이들이 튀어나왔지만 드낙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네. 그래서 대체 뭘 하고 싶다는 거냐?’
다종족 연합의 모든 것을 관리하기에는 역량도 없고, 게으름도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신제국이 알차게 준비한 것에 함께하지 못해서 답답하기도 했다.
이러니, 저러지도 못한 채로 드낙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내면에는 하루라도 빨리 온전한 초월자로서의 격(格)을 갈구하고 있었다.
*
상위인간(上位人間).
선택받은 인간.
드낙 불파겐이라 불리며, 반신임과 동시에 반마이기도 하며 다종족 연합을 이끌고 있으며 수많은 종족을 규합하여 하나의 테두리 안에 만든 존재.
그분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이가 꽃을 피우고, 그렇게 마력이 들어찰 그릇이 만들어진다. 레이시아 왕비로부터 시작된 상위인간의 탄생은 신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상위인간이 된 이들은 드낙을 매일같이 찬양했다.
그 기간은 짧게는 3일. 길게는 1년에 달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더는 감사하지 않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위인간이 되는 건 좋았지만, 그조차도 일상이 되어버려서였다.
일상을 감사해 하는 사람은 적다. 불구가 되고 나서야 팔이 소중했음을 깨닫는다. 걷는 것조차 불가능한 외팔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팔이 없음을 소중히 여긴다. 거기에는 팔이 있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잃은 것에 비해서 받은 것은 쉽게 잊히고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그 과정에 ‘고통’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겉으로라도 자치왕국의 상위인간들은 반마반신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판크라스(Pancras). 자치왕국의 젊은 기사 중 하나였다.
‘미쳤어. 난 전쟁을 위해서 이렇게 상위인간이 된 것이 아니야.’
그 예의는 지금에 와서는 뚝 끊어졌다. 멋들어진 금색의 실을 가위로 싹둑 썰 듯이 손쉽게 끊어져 버렸다.
‘차원전쟁이라니!’
그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을 했다.
모든 전쟁이 끝난 시대. 그곳의 첫 수혜자인 판크라스는 전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영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전감각을 갖추도록 관련 커리큘럼이 존재했다.
그 덕에 그는 죽지 않고도 다양한 전투 환상 속에서 베테랑이 될 수 있었다.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서 만들어진 엘리트 기사였다. 허나, 그렇게 해도 <가짜>.
차원 전쟁 동원령 선포는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 충분했다.
‘진짜로 싸워야 한다.’
덜덜!
피가 흩뿌려지거나, 적을 죽이는 건 어려움이 없었다. 아무리 가짜라고는 하나 충분히 면역되어서였다.
그저 사람처럼 생긴 표적판을 총으로 쏘는 훈련을 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인간을 향해서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더 수월하게 당길 수 있었다. 하물며 환상 마법진을 통해서 다양한 실전경험을 누적시킨 판크라스는 더더욱 쉬운 일이다.
‘차원전쟁이다. 끔찍하다.’
대규모 전투만 해도 사람은 덧없이 사라지고, 죽어간다. 범위 마법 하나에 100명이 죽는 건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것보다 더한 전쟁이다.’
거기에 동원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앞으로 누릴 것이 산더미처럼 있었는데!’
중산층이라고 부를 만한 훌륭한 봉급. 남에게 존경받는 기사라는 직업. 강력한 전신갑주는 더 말할 것도 없었으며 무인임에도 마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전신갑주의 활용 및 전력 유지 시간도 길었다.
그게 자치왕국의 엘리트 기사였다. 하지만 그런 엘리트 기사도 한 줌에 부서질 것 같은 것이 차원 전쟁이다.
‘진짜 세계와 세계의 싸움이다. 진짜 최강자들의 싸움이다.’
신과 신의 싸움이며, 악마와 악마의 싸움이었다.
그 거대한 스케일에 비교한다면 자신은 그저 기사 한 명에 불과했다. 덧없이 바스러지는 잡초와 다를 바 없을 게 분명했다.
짐을 싼 그가 가방을 등에 멨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탈주 기사가 되는 것이다.
‘개죽음당할 수는 없다. 어디로든 도망쳐서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
그곳에는 그 어떤 신념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누릴 것을 누리고, 땀을 흘리며 자신이 강해졌음을 깨달을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 이상의 싸움에는 겁쟁이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아득히 큰 상대와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호다닥!
그가 그대로 빤스런을 쳤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있다고 해도 텅텅 비어있는 신념, 그저 대우받고 남에게 큰소리치며 돈을 벌기 위해서 기사가 되었던 자의 태도는 위기 때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었다.
여기에는 기사도. 마법사도. 병사도.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오직, 판크라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자치왕국의 곳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드낙이 발동한 <동원령>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는 알면 알수록 그저 끔찍함밖에 들지 않는 암울한 전운(戰雲)이었으며 필멸자가 느끼기에는 그저 절망의 낭떠러지에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그 추락감 속에서 해방되려는 이들은 백사장의 쓰레기들만큼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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