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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근데...여기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 내분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드낙의 고분고분한 말 속에 깃든 흥미로움. 그걸 본 레이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분명, 이대로 그를 보낸다면 케이슨 성기사가 아주 힘들어할 것이다. 하지만 막을 방도가 없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진 것이 드낙이었다. 그나마 그를 멈출 만한 사람은 게제라스 총리와 세파리아스 신황제, 세리안 공왕 정도였다. 그래도 그들도 못 막는 경우가 있었다.
‘제때 도착해야 하니까...그게 쉬울 리가 없어.’
이 때문에 다종족 연합은 통신 기술 발달에도 힘쓰고 있었다. 일단 ‘멈춰!’라고 소리를 즉각적으로 드낙에게 다이렉트 슈플렉스처럼 내다 꽂아버릴 수 있어야 했다.
알게 모르게 드낙은 남의 말에 많이 휘둘리는 성정이라, 일단 멈추고 조금이라도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그 성격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통신의 발달이 필수였다.
물론 이 또한 일의 경중(輕重)에 따라서 달라진다.
게제라스 총리가 교통량이 많은 사거리를 엎어버리는 드낙을 막지 못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교통량이 많아서 문제가 툭툭 뱉어지는 곳을 더 확장했는데 때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강행한 것이 드낙이었다.
당장의 이득보다는 훗날의 이득을 좋아하게 된 것은 중립신 탓이 컸다. 왠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분명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며 현재를 버리고 미래를 도모하는 드낙의 모습은 행성파괴의 괴물이었다.
“파벌 싸움은 인간의 특성 아니겠어요. 너무 불편해하지는 마세요.”
신전의 내분. 당연히 파벌 싸움이었다.
“그래도 신전은 그래서는 안 돼.”
드낙이 단호하게 말했다.
‘스스로 가장 아래로 향했던 신전의 새로운 인물들이 파벌이라니...’
흥미를 넘어선 화가 났다.
“신성력이라는 큰 자원을 다루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빼앗아야지.”
“그건 안 될 말씀이에요. 그걸 누가 관리를 해요?”
드낙이 물끄러미 레이시아 왕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이 매력적으로 흔들렸다.
“사양할게요. 사람들이 얼마나 돌변하는데요. 정말 힘들다구요.”
권력에 관심이 없어 하는 게 그녀였다. 자식들의 교육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게으름을 피우는 건 딱 집어서 말하는 편이었다. 그 외에는 자유롭게 놔두는 것이 레이시아 왕비의 자식 교육법이었다.
자유는 주되, 시간을 아낄 줄 알아야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교육하되, 최소한으로 그쳐서 자신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다.
그 덕에 크레시미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검에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정해진 일정이 적었고, 이미 최소한의 교육을 스스로 마친 상태여서 매우 자유로웠다. 역량이 있다면 한 분기 동안 배워야 할 최소한의 교육을 1달 만에 끝마치는 것 또한 가능했다.
모든 것이 자기 하기 나름에 따라서 변화한다.
그건 너무 재밌는 일이었다. 잘하면 더 많은 걸 떠안게 하기보다는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엄마가 레이시아였다.
“그러기에는 자선사업을 그렇게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요?”
드낙이 미소를 지으면서 레이시아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손은 조금 차가웠고, 계속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드낙이 레이시아의 손톱 한 부분이 부러진 것을 깨달았다.
“어쩌다가 손톱이 깨졌어요?”
“안 하던 짓을 하려다가요...”
레이시아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뭘 하려고 했는데요?”
“목공이요...”
드낙이 깝짝 놀랐다. 왕비가 목수 짓을 하다니?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헛소리를 해대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들이 많다고 해도 드낙은 아니었다.
세상 풍파 한 번 제대로 맞아본 사람이라면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신분과 배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굳이 하라고 하지 않아도 학벌이 중요하다고 고래고래 부모들이 난리를 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세상은 소름 돋을 정도로 모든 것을 비교하는 냉혹한 정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레이시아 왕비가 목공에 손을 대었다는 건 아주 큰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
“많았죠. 지금 그 사람들은 제가 할당량을 배부해서 가구 만들기 바빠요. 저도 어제 의자를 만들었는데, 한 번 보실래요?”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단순한 의자였는데 문제는 한쪽이 기울어졌다는 점이었다.
“하하하!”
“실수를 좀 했죠...”
드낙은 기울어진 의자 다리에 푹신한 덮개를 덮어서 높이를 맞췄다.
“와!”
레이시아가 크게 기뻐했다. 결함품이 완성품으로 변했다. 대단한 발상이었다. 드낙은 코를 쓱 비볐다.
“뭘 이런 거로.”
“전 그런 생각을 전혀 못 했어요! 대단해요!”
드낙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의자 다리에 덮개 하나 씌운 거로 칭찬을 받다니,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레이시아가 순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날까지 레이시아와 함께하다가 드낙은 자치왕국에 있는 신전으로 향했다.
‘많이 바뀌었네.’
예전에는 도시에서 멀어진 곳에 신전 하나가 뚝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그 도시의 수준은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애초에 크기만 클 뿐, 그냥 오두막만 가득했다.
드낙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울타리 하나 없는 도시였다. 주변에 야수나 괴물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앙! 앙!”
“허윽! 헉헉!”
오두막 속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또한 일부러 헉헉 소리를 내며 서로의 성욕을 들끓게 하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남자는 섹스를 할 줄 모르는 남자다.
‘허이구, 지랄 났네. 대낮부터.’
드낙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에 여자와 남자 모두 기생인(寄生人)이었다.
죽으면 아카타베루를 위한 시체가 되는 게 아니라 땅의 양분을 좋게 만드는 벌레로 되는 덧없는 최하급 권속 악마였다. 드낙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전체적으로 못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오두막 위에 빨랫줄이 있었고, 곳곳에 빨래가 널려있었다. 길에 쓰레기는 없었지만, 소일거리 하는 여자들이 힐끔 드낙을 쳐다봤다.
‘돈 많은 양반이 왜 이런 곳에...’
하지만 그게 반마반신인 거는 못 알아차렸다. 드낙이 다가와서 은화 한 닢을 튕겼다. 아줌마 하나가 귀신같이 이를 낚아챘다. 마치 범이 토끼의 목을 무는 것처럼 재빨랐다.
“실례합니다. 지금 뭘 만들고 있습니까?”
“도련님이구만. 호호호.”
아줌마들이 드낙이 자신들을 존대하자 순식간에 야만인처럼 굴며 드낙을 겁박했다. 아주 건방진 년들이었다. 존대를 받고, 반말로 받아치다니. 그런 괘씸함에도 드낙은 태평했다.
대응할 가치가 없어서였다.
“빗자루의 아랫부분이야. 이걸 이렇게 조금 덜어내서 일렬로 나열하면 빗자루처럼 보이지?”
“아, 정말이네.”
처음 볼 때는 그냥 머리카락을 작은 구멍 크기로 묶고 있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근데 무슨 털입니까?”
“뿔쥐털이 거칠어서 빗자루로 쓰기에 아주 좋아.”
“원래는 멧돼지털을 많이 썼었는데 요즘은 뿔쥐털 빗자루가 으뜸이지.”
“거친털 안쪽에 잔털도 있어서 작은 먼지도 깔끔하게 가져간다니까. 나중에 따로 털어버리거나 씻어서 말리면 끝!”
“뿔쥐털 빗자루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잔털 때문에 만드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오히려 귀찮으니까 돈이 되지!”
서로 수다를 떨기 바빴다. 드낙이 뿔쥐털을 손에 움켜쥐었다. 확실히 거칠기 짝이 없는 털에 짧은 잔털이 보였다. 이런 잔털에는 작은 먼지도 잘 들러붙을 터였다. 즉, 청소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빗자루였다.
‘뿔쥐털이 빗자루로 쓰기에 최적합이라니. 황당하네.’
거기에 돈까지 된다는 것도 웃겼다. 하지만 실제로 작업하는 모습을 보니, 손놀림이 굉장히 빨랐다. 동시에 입도 정신없이 움직이기 바빴다.
드낙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아아!”
소년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는 아이들의 숫자는 물경 100명이 넘었다.
‘우와, 씨!!!’
드낙이 깜짝 놀랐다. 어린아이 100명의 무리가 미친 듯이 달리면서 웃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쫓는지도 모르고 그냥 앞에 애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냥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이를 가까이서 보면 무섭기만 했다.
실로 무질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드낙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달려나가는 애를 쫓아가기 바빴다.
우루르르르르!
‘무슨 저런...’
흩날리는 먼지를 바람 마법으로 진정시키고 드낙이 다시 걸어나갔다. 신전은 생활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위대함보다는 이웃의 느낌이 크다.
대기줄이 많았지만 드낙은 순식간에 앞질러가서 걸어갔다.
수습 성기사가 그런 드낙에게 다가왔다.
“실례지만 외부인은 줄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질서야말로 문명인의 소양이고, 지능 있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드낙 또한 웃으며 말했다.
“드낙 불파겐이다. 케이슨 성기사를 만나러 왔다. 수행원이 없는 건 미안하다. 바쁘게 온 것이라.”
“헙. 바, 바로 알리겠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던 수습 성기사가 다시 몸을 돌렸다.
“왜?”
“그게 요즘 사기꾼이 많아서...”
‘이 새끼가.’
드낙이 순식간에 그의 뒤를 잡았다.
“이걸로 됐지?”
“어, 어느 틈에...!”
수습 성기사가 깜짝 놀랐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확 드낙에게 꽂혔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성기사의 뒤에 나타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발생했다.
허둥지둥 수습 성기사가 빠져나갔다. 드낙은 그러든 말든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성기사들은 전혀 그를 막지 못했다.
감히 자신이 가진 신성력을 부여해준 이의 발걸음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삭막하군.’
신전 내부는 컸지만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급조로 만든 벙커 시설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부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하나같이 드낙을 막아섰지만, 뒤를 잡히고 나서는 태도가 급변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더 좋고. 케이슨 성기사는 어디에서 뭐 하고 있지?”
“지금 회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럼 회의장에 가면 되겠네. 앞장서.”
“옙.”
사제가 걸어나갔는데, 그 걸음걸이가 너무 느렸다. 이에 드낙이 그 등을 쿡하고 찔렀다.
“예?”
그가 돌아보자 드낙이 말했다.
“빨리 걸어야지.”
“예!”
실로 거만한 작태였다. 성인을 쿡쿡 찌르며 빨리 걸으라니, 꼰대고 이런 꼰대가 없었다. 직장상사와 출근길에 만났는데 쿡쿡 찌르면서 빨리 걸으라고 닦달하는 미치광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제는 결코 반항할 수 없었다.
회의장에 도달하자 드낙은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웅성거림 속에서도 드낙은 순식간에 그 대화를 귀에 담아냈다.
“신성력을 하나의 권리로서 대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이들에게 줘야 합니다! 상위인간을 만드는 것보다 행복 추구에 신성력을 써야 합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덜컹!
“반마반신께서 오셨습니다!!!”
사제의 말에 모든 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드낙이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훑었다. 가히 500명에 달하는 사제와 신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대단한데?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할 일이 없나 봐? 신성력을 품고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 시간은 있고 말이야. 그것도 500명이나 되는 놈들이.”
드낙의 말에 모두 사색이 되었다. 그는 거침없이 걸어나가서 빈자리에 턱 앉았다.
“......”
“왜 이렇게 조용해? 하던 거 계속해. 구경이나 좀 하다가 가야겠다.”
이에 성기사 케이슨이 다가왔다.
“저, 반마반신 님.”
“응. 말해.”
“여기에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 말에도 드낙은 빈정거렸다.
“뭐? 가장 낮은 곳으로 스스로 찾아서 가? 내 눈에는 그냥 신성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싸우면서 서로 물고 빠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렇게까지 신성력이 중요하면 빨리빨리 써야지.”
쿡. 쿡.
드낙이 케이슨 성기사의 가슴판을 검지로 눌렀다.
“왜 이렇게 몸에만 담아두고 있어? 상위인간이 될 신성력을 제외하고는 맘껏 쓰라고 했잖아.”
“그 사용 방법을 정하는 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드낙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위에 다리를 턱 얹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하던 일 하라고.”
이에 그들이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산딸기 사제가 냉큼 드낙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지금 케이슨 성기사는 신성력을 통해서 상위인간을 만드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신성력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직도 한 곳에서는 사람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한 곳이라도 관심받지 못한 이들은 존재했다. 행성의 그늘 속에 보이지 않는 궁핍한 자들이었다. 이에 케이슨 성기사가 반박하기 시작했다.
단번에 열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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