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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퇴근한 아스톨포는 뿔쥐와의 전투를 생각했다.
‘최소 중급 권속 악마.’
반마급을 상대했기에 허망하게 패배한 것 같았지만 그들의 수준은 하나하나가 중급 권속 악마에 달했다.
‘미친 소리지.’
인간들을 봤다. 비록 신제국의 황제 기사단을 보지는 못했고, 세파리아스도 보지 못했지만 사실 대다수의 인간은 아직도 그릇이 생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신성력을 부여받는다고 해서 갑자기 벼락 치듯이 ‘초월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생기는 건 아니다.
열등한 인간이 땅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동맹? 협력? 하하!’
그들이 협력하고 있는 모습은 실로 모순적이었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 역사는 승리자를 위한 역사일 뿐이다. 그 정도로 승자에게 돌아가는 트로피의 무게는 무겁다.
클 수밖에 없기에 욕심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하는 게 인간들인데.’
황당했다. 명분이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그런 명분 세우기를 잘해야 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아스톨포에게 있어서 이 지하 연합은 너무 웅크리고 있었다.
‘아쉬운 건 뿔쥐들이 악마의 피가 섞여져 있다는 점이다.’
아카타베루의 것은 아니었다.
아스톨포 왕자는 뿔쥐들의 피맛에 질색했다. 마시고 싶지 않았다. 특히 아카타베루로부터 피의 지배를 받는 아스톨포는 악마의 피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다.
불호음식인 셈이다.
물컹거리는 연어회를 못 먹는 사람과 비슷했다. 오직 그들만의 호불호였다.
‘마시면 힘이 증가하기는 하겠지만...’
먹고 싶지 않은 걸 먹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귀족적인 판단이었다. 아스톨포는 밤위 귀족이며 그렇기에 자신이 먹고 싶지 않은 걸 안 먹을 사명감이 존재했다. 귀족의 기품은 남들이 잘 먹어도 ‘노 맛’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했다.
그게 바로 귀족이었다.
“너인가? 크놀의 피를 원하다니, 신기한 놈이군!”
으슥한 골목길에 크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혼자 오지 않았고, 자신의 동료나 친구를 여럿 데려왔다. 그만큼 뒤가 쑤시는 거래였다.
“물건은?”
크놀로 변한 아스톨포의 말에 크놀 하나가 잘 동봉된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그렇게 많이 필요가 없었다. 건네주며 크놀들은 툴툴거렸다.
“크놀이 연금술이라니, 말세다. 말세. 지하 연합은 너무 큰 자유를 주고 있어. 크놀이 가장 활약할 수 있는 건 강철을 다루는 일인데. 쯧쯧!”
“나 때는 말이야...하기 싫어도 가장 돈 버는 일을 했다, 이 말이야.”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야지. 노동이 무슨 취미생활인 줄 아나? 꿈이라면 집어치워! 먹고 살고, 입에 풀칠해야 해!”
아스톨포는 인상을 찌푸렸다. 딱 봐도 젊은 크놀들처럼 보였는데 말하는 꼬락서니는 나이 80 먹어서 오늘내일하는 꼰대의 마음이었다.
‘벌써 마음이 저렇게 늙어버렸다니, 불쌍하군.’
“여기. 대금이다.”
“크큭. 이걸로 드디어 카드팩을 살 수 있겠어.”
<사냥꾼 리즈드낙 팩>. 최근 큰 이슈를 끌어모으고 있는 카드팩이었다. 처음에는 약한 사냥꾼 리즈드낙이 주력카드다.
다양한 임기응변 카드들을 통해서 적들의 막아내고, 존버하며 승리하는 덱이 바로 사냥꾼 리즈드낙 팩이었다.
성장하는 맛이 있었기에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팩 가격은 만만찮았다. 경매식으로 정해진 물량을 구매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 덕에 카드를 매입하고, 판매하는 중고 카드 상점도 제법 있었다. 본격적으로 카드에 인생을 건 이들이 창업하는 게 중고 카드 상점이다. 카드를 구매하고, 이를 재판매하는 식이었다.
“엥? 이렇게 많이 준다고? 혹시 피 더 필요한가? 연금술 실험은 실패도 하잖아.”
“필요 없다. 그냥 흥미가 생겨서 조금만 할 생각이니까.”
아스톨포가 선을 그었다. 굳이 이목을 끌 필요가 없었다. 그가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사회성을 보여줌으로써 혹시나 생길 의심과 경계심을 지웠다.
그의 뒤로 크놀들이 수다 떠는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정말 지를 거야? 경매 장난 아니라던데.”
“사냥꾼 리즈드낙 카드만 팩에서 얻고 나머지는 카드 상점에서 개별적으로 구매하는 게 낫다더라.”
“그거 구라야. 임기응변 종류 카드가 워낙 많아서 상점 갈 필요가 없다더라. 중복되는 카드를 얻는 게 더 힘들다던데.”
“내 견해로는 솔직히 임기응변보다는 성장 카드가 더 중요하지...”
“아니아니. 성장카드는 사용하면 강화되어서 무덤으로 가지 않고 덱으로 돌아가잖아..”
“미친놈들아. 너희는 가지고 있지도 않잖아! 뭔 훈수야.”
“구매 안 했다고 모르냐? 남들 싸우는 거 봤거든.”
그걸 들은 아스톨포는 이내 청력에 집중하는 걸 그만뒀다.
‘미친놈들이다.’
차원전쟁 준비를 하면서도 저렇게 카드 놀이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다니.
보통의 지배자였다면 전시체제에 돌입했을 터였다. 안일하다는 증거였다. 이는 지하 연합의 정확한 규모를 알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대악마(大惡魔)의 침공을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다.’
끔찍한 소모전이 일어나는 것이 악마 침공이다. 꼭꼭 숨겨둔 설비 따위 필요 없다. 군대가 모일 수도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전 국토로 떨어져 내리는 게 악마 침공이었다.
사람이 살든 안 살든 오지에도 떨어져 내라며 검버섯처럼 피어난다.
그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태평성대는 기반이 금방이라도 엎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자신에게 배정된 임대 주택으로 돌아온 아스톨포는 곧장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집에 있는 지하실에는 연금설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대로 속이려면 돈을 써야 한다.’
실로 귀족다운 생각이었다. 말은 돈이 들지 않기에 거짓말을 하기 쉽지만, 귀족이 보기에는 실로 위태롭다. 거짓말을 한다면 완벽해야 한다.
고로, 돈을 써서 진실로 보이는 거짓말을 만드는 건 실로 귀족적이다.
남들은 하지 않을 짓이었다.
“햝햝.”
아스톨포가 바로 크놀의 피를 핥았다.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크놀들 또한 드낙으로부터 권능을 받고, 그의 피를 통해서 강화가 어느 정도 종족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상태였다.
“퉤.”
바로 침을 모아서 뱉었다. 입을 헹군 아스톨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 연합의 신은 악마다. 하지만 악마의 피가 옅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악마의 피 농도에 비해서 크놀들의 강화 수준은 높은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낙은 반마와 반신의 힘을 동시에 적용한 상태였다. 그것이 바로 악마와는 다른 <권능 부여>였다.
모든 정보를 시각적으로만 획득한 아스톨포였기에 아직 완벽하게 이 세상을 알지 못했다. 뿔쥐 정보꾼이라고 해서 굳이 드낙에 대해서 모두 알 필요가 없었으므로 드낙에 대한 능력 데이터는 검은 돔의 중추들만 알고 있었다.
몇몇은 기적 행위를 통해서 신앙을 고취하는데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드낙의 모든 능력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찌되었든, 이제는 뿔쥐 사회로 스며들어 봐야 한다.’
검은 돔에 간다고 기만해놓고, 크놀 사회를 경험한 아스톨포는 이제 말 머리를 돌렸다. 검은 돔으로 갈 생각을 가졌다.
‘아직까지 날 못 찾는 걸 보니, 확실하게 먹혀들었어.’
크놀의 모습을 한 아스톨포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 어떤 전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도 지하 연합은 아스톨포를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데이터를 모으고, 쓸데없는 몽타주를 걸고, 매번 크놀들에게 와서 순찰을 돌았으며, 혹시 모를 경계심을 꾸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좋은 반응이었다.
아스톨포의 진면목에 대한 대처가 전혀 되지 않다는 뜻이었다.
‘좀 의심스러운 게 있기는 하다.’
처음에는 봉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뒤에는 슬그머니 봉쇄가 풀렸다. 다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가로막히면, 경제적으로 깊게 연관된 지하 도시들이 서로 큰 손해를 입는다.
한쪽에서는 휴지를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가축을 도살한다. 그런데 서로 교류할 수 없다면? 휴지는 쌓이고, 고기 또한 쌓여 썩힌다.
그 손해는 도시 규모로 일어난다.
도시 규모로 봉쇄해서였다.
‘특히 지하 연합은 심하지. 번호로 도시를 지정할 정도니까.’
라고 말할 정도로 도시 계획을 치밀하게 짜놓았다. 이는 산업 효율성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굽이 굽는 골목길로 하지 않고, 직각으로 이루어진 평탄한 도로로만 만들어도 교통에 효율성이 생긴다. 하물며 도시를 그렇게 만든 지하 연합의 도시간 긴밀성은 대단했다.
‘그 덕을 봤다고 해야겠지만. 의심스럽다.’
자신을 너무 쉽게 본다는 감각이 좀 있었다. 사상자를 안 내서라기에는 지하 연합의 초기 대응은 완벽했다. 하지만 이제는 뭔가 축 늘어져서 게으름을 피우는 기분이었다.
크놀의 피를 다시 묶은 아스톨포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벼락과도 같은 섬광이 득달같이 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그 어떤 조짐도 없었으며, 그 어떤 낌새조차도 없었다.
단 한 순간.
드낙은 방심하지 않고, 반마급 존재를 그대로 죽이는 걸 선택했다. 말끔하게 목이 달아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푸솨아아아악!
목에서 피가 솟구쳐 올라 천장을 가득 물들였다.
“Easy. EZ!”
드낙이 실로 경박하게 굴었다.
*
이스핀은 강철마가 아닌 일반 말을 통해서 마차를 끌고 향하려고 했지만, 관리와 병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이스핀 백작님. 마중 나왔습니다. 기차가 준비되어있습니다.”
“산업 기차뿐 아니었나?”
이스핀이 모르쇠를 시전했다.
“산업 기차라고 해도 귀중한 인력 보충을 위한 수송 칸이 존재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매우 극진히 이스핀을 모셨다. 이스핀은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이미 드낙에게 한 소리를 들어서였다.
‘물론 가만히 갈 수는 없지.’
타오르는 분노.
소인배 같다고 욕하겠지만, 이스핀은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풀었다. 괜히 속담으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생긴 속담이었다. 즉, 안 하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스핀에게는 대의명분이 존재했다. 남들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소리다.
“어어, 어디 가십니까? 왜 자꾸 창문 밖을 크게 두리번거리십니까?”
“아니, 창문 밖도 못 봐?”
가는 길 내내 은근히 빤스런 각을 취했다.
“여기 기차는 어디에 정차하지?”
“예? 그것이...”
“어!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지금 내가 도렌 공왕한테 일감 받으러 가는데, 지금 그걸 의심하는 거냐고.”
“...아닙니다.”
그 덕에 이스핀을 에스코트했던 병사들과 관리는 다크서클로 가득해졌다. 잠자는 척하면서 눈을 감은 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게 보이는 닫힌 눈썹을 본다면, 그런 이스핀의 모습을 마주한다면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남의 고통으로 스트레스를 푼 이스핀이 도렌 앞에 섰다. 그는 변방의 도시에서 관리 공고문을 내고, 빠르게 실무 투입 가능한 이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도망쳤다지?”
“대신 주류 사업으로 나오는 돈을 매번 사회에 공헌하잖아.”
“그래서 드낙님께서는 그 말에 뭐라고 답하셨어?”
“내가 일 안 하는 게 문제라고 하더라.”
도렌이 웃음을 터트렸다. 실로 드낙 님 답다고 여겼다.
“후우!”
이스핀이 한숨을 쉬며 손을 파닥거렸다.
“일거리나 내놔. 쉬운 거로.”
“기름칠할 사람이 필요한데?”
이스핀이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미쳤어? 내가 지금 백작되고 사람 상대하며 기름칠을 왜 하고 다녀?”
“엉? 그러려고 너 부른 건데.”
“됐고. 그, 여러 가지 있잖아. 하나만 대충 던져줘. 기름칠은 무슨, 그런 건 아랫사람들 시켜.”
“제대로 하는 놈이 없으니까, 그렇지.”
도렌은 그렇게 말하며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이스핀은 서둘러 혁대에서 술병을 꺼냈다.
“야,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진짜. 이거 마시고 확 풀어. 잘 안 되도 어쩌겠어? 그게 인생이란 거야.”
“치워. 술 안 마신다.”
이스핀은 하는 수없이 술병을 다시 걸었다.
‘뿔쥐한테는 잘 통했는데.’
그 덕에 제법 사건이 터지고 나서도 일을 안 할 수 있었다. 남들 훈련에 들어갔을 때, 이리저리 쉬다가 마지막 훈련 날에 온 기분! 그것만으로도 이스핀은 뿔쥐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장에 올라설 후보가 다섯 있다. 놈 중에 제대로 할 만한 놈만 가려내. 사람 볼 줄 모르는 놈들이 많아서 누구한테도 못 맡기겠다.”
“네가 하면 되잖아. 다음.”
그 말에 도렌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시장 후보를 다섯으로 줄인 것만해도 도렌의 행정능력이 돋보였다. 거기에 이스핀이 들어가서 시장을 확정시킬 놈을 가려내고, 그 사람과의 관계에 기름칠 해야했다.
“농담! 농담도 못 하냐? 공왕되고 나서는 아주 잘 났어.”
“나중에 돈으로 줄게.”
“썩어 넘친다! 아내 껴안고 잠자는 게 낙이다. 낙!”
“자식은?”
그 말에 이스핀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아들은 소용없어. 딸이 최고야.”
이스핀이 냉큼 도렌이 쥐고 있는 서류를 챙겨갔다. 아주 제대로 바쁜 모양이다. 다만 이스핀의 아들딸 편견에 도렌이 한 소리했다.
“지나친 일반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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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