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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아스톨포 왕자의 몸에서, 검에서 어둠이 흘러나왔다. 뻗어 나간 어둠은 주변을 가득 메웠다. 또한 어둠은 서로 뭉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으며 마치 물처럼 흐르기도 하다가 그저 멈춘 채 잔뜩 모이기도 했다.
그 현상은 그가 어둠을 뿌리면 뿌릴수록 더욱 농밀해졌고, 더욱 넓은 반경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돌진하던 배불뚝 리전의 뿔쥐 대장이 고함을 내질렀다.
“겁먹지 마라! 3분대는 상쇄를 시작하고, 2분대는 우회! 1분대는 우직하게 들어간다!”
거침없이 찔러 들어가는 송곳의 형세이며,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신경을 분산시키는 포물선의 보조이며 후방에서 화살을 겨누는 궁수의 태세였다.
3갈래로 나누어진 모습을 보며 아스톨포 왕자는 고고하게 서 있었다.
‘은신이 뛰어나서 독특한 전술을 사용할 줄 알았는데, 하는 짓은 정석이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결코 비웃지 않았다. 정석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만큼 효과가 있어서였다. 괜한 이유가 아니다.
‘아쉽다. 광신도처럼 보여서 무식하게 덤벼들었으면 더 빨리 전투를 끝낼 수 있었을텐데...’
궁수처럼 후방에 선 배불뚝 리전에 소속된 정예 뿔쥐 10마리는 아스톨포 왕자가 뿌리고 있는 힘을 빠르게 상쇄하기 시작했다.
이마저도 아스톨포 왕자의 관심을 받았는데, 그 상쇄방법이 매우 발달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마왕(魔王) 발라쿠와의 싸움에서 상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꾸준히 발전시킨 결과였다.
뿔쥐들은 먼저 백금카드를 통해서 양각(陽刻) 마법진 형태의 굵은 철사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허공에 띄우고, 3D 마법진처럼 입체적인 구체 형태의 마법진을 만들었다.
기하학적인 형태를 지닌 이 마법진을 본 아스톨포 왕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실망도 있었고, 감탄도 있었다.
‘기술 발전이 기하학적이군! 입체적인 마법진인데 기하학의 발달은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어.’
뛰어나지만 조금 부족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존의 평면 마법진보다는 압도적인 효율을 내비치고 있었다. 단순 마력으로 상쇄하지 않은 것도 일품이다.
파아앗!
푸른 빛이 뭉쳐있는 어둠을 꿰뚫고 지나가고, 밝은 연두색의 구름이 강처럼 흐르는 어둠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착 달라붙어서 갉아먹었다.
‘공간 싸움을 할 줄 아네. 반신급의 존재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나? 의외인데.’
초월의 힘 공간 싸움. 새로운 전투 혁신이나 다름없었다. ‘힘’을 다루는 반신격은 마력 출력에 비해서 가진 마력이 많은 경우가 많았다.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 신과는 다르게 육체를 지닌 어중간한 반신은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초월의 힘을 체외로 뽑아내는 게 중요했다.
즉, 자신의 출력보다 더 많은 힘을 세상에 내비치기 위해서 힘을 미리 주변에 뿌려놓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마력’을 보유한 초월의 존재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둠의 힘(Dark power)’ 같이 가공된 힘이나 제어 가능한 마법을 뿌려놓아야 했다.
뿔쥐들은 이 정도까지는 몰랐다. 발라쿠의 경우에는 즉발 마법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워낙 거대해서 초월의 힘 출력이 대단했다.
중립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육체가 없는 정신체였으며 대신육체(大神肉體) 또한 거대한 육체였다.
세파리아스는 오히려 반대의 경우였다.
신성력의 황금빛마저도 상처가 생기고 피가 나와야지 보일 정도로 압축해서 꼭꼭 숨기고 다니는 게 세파리아스였다. 최대한 육신의 회복에만 전념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아스톨포 왕자의 전투는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뿔쥐들은 그저 하나씩 모두 대처했기에 얻어걸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했다. 정석이 대단한 이유였다.
허나, 부족했다.
그 상황에서 뿔쥐 1분대가 송곳처럼 아스톨포에게 도착했다. 그들은 돌진력을 이용해서 단번에 들이박았다.
캉!
어둠의 검과 뿔쥐의 대검이 부딪쳤다. 부딪치자마자 대검에서 화염이 아스톨포 왕자를 향해서 토해졌다. 동시에 대검을 부딪친 뿔쥐가 뒤로 물러났다.
“크흐!”
피숨결이 뻗어 나갔다. 롱소드가 화염을 뚫고 쑥 찔러졌다. 뿔쥐의 바이저를 긋고 지나갔다.
텅!
철로 만들어진 바이저가 그대로 뚝 잘려져서는 바닥에 떨어졌다.
“무슨?!”
믿을 수 없는 절삭력이었다. 어느새 마검 샤를로트의 검신은 검게 물들어있었다.
“하하하하하!!!!”
아스톨포 왕자가 웃었다. 화염이 그를 덮쳐서 그의 얼굴은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음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뿔쥐들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대단하군! 대검에서 마법의 흔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한 거지?”
드워프가 만든 것이었기에 표면에는 전혀 마법적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화염급습의 대검>이 정확하게 상대를 피해줬음에도 뿔쥐들의 표정은 좋아지지를 못했다. 척봐도 아스톨포가 건재해보여서였다.
화상으로 뒤덮인 얼굴이고, 머리카락에도 마법불꽃이 들러붙어 있었음에도 건재해 보였다.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아스톨포의 피부가 다시 재생되고,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났다. 코트 또한 탄 부분은 떨어지고, 새롭게 복원되었다.
딱딱하게 표정이 굳었음에도 뿔쥐 1분대는 해야 할 일을 계속했다. 우회하면서 아스톨포가 뿌려놓은 어둠을 마법과 주술로 3분대와 같이 상쇄하던 2분대가 도착해서였다.
합공.
샌드위치 치듯이 아스톨포를 향해서 뿔쥐들이 달려들었다. 아스톨포의 코트가 펄럭였다. 코트는 단번에 커지면서 박쥐의 날개가 되어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도서관의 책장이 날개와 부딪쳐서 뒤로 넘어가고, 책이 무너져내렸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뿔쥐들은 반쯤 그림자로 변해서 책장을 타고 오르고, 비행마법을 사용하며 추적하기도 했다. 그때, 아스톨포 왕자가 날개를 접고 그대로 대각선으로 추락했다.
3분대가 있는 곳이었다.
“쫓아라!”
20마리의 뿔쥐, 1, 2분대는 아스톨포 왕자를 쫓으며 마법을 사용했지만 그제야 어둠의 힘이 움직였다. 혈주술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어둠의 검, 샤를로트가 이를 제어했다.
퍼버벙!
뭉쳐있던 어둠의 구체 하나가 터져나가며 화살처럼 뿔쥐 1, 2분대의 마법과 주술을 제대로 요격했다. 부딪치고 상쇄되어갔다. 잔재로 남은 어둠의 힘은 느긋하게 움직이며 다른 어둠의 구체로 옮겨갔다.
한 치의 낭비도 없어 보였다.
“대응하라!”
3분대에 속한 10마리의 뿔쥐가 무기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방어마법을 사용했다. 충분히 어둠의 힘을 밀어났기에 가능했다. 아스톨포 왕자를 속박하거나 요격하지 않은 이유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농밀해진 어둠.
가시거리가 갑자기 확 줄어들었다. 뿔쥐의 눈으로도 볼 수 없었는데, 안개처럼 어둠이 짙게 깔려서였다. 아무리 좋은 눈을 해도 안개가 잔뜩 낀 곳에서는 눈 나쁜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꽈앙!
아스톨포 왕자가 그대로 방어막에 검을 찔러넣었다. 두 다리가 방어막을 밟았다.
콰직. 콰자자자작!
어둠의 검에 의해서 관통된 방어막은 그곳을 기점으로 끝까지 한순간에 균열이 나버렸다. 유리잔에 난 균열에 거무튀튀한 선 같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균열과 함께 있었다.
“놈!”
가까이 있는 뿔쥐가 무너져내리는 방어막과 떨어지는 아스톨포 왕자를 향해서 덤볐다.
훙!
“윽?!”
아스톨포 왕자의 몸을 갈랐음에도 베이는 맛이 없었다. 베여서 쓰러진 아스톨포 왕자의 모습이 어둠으로 변하며 허물어져 내렸고, 이내 안개처럼 사방으로 몽글거리며 퍼져나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마법시야를 통해서 초월의 힘에 대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당했다.
그 사이에 귀로 전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기만인가!”
“어째서 기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외쳤던 뿔쥐에게 들리는 아스톨포 왕자의 목소리에 그가 무기를 휘둘렀다.
훅!
깡!
동시에 뿔쥐의 옆구리에 아스톨포 왕자의 무릎이 들어갔다. 방어구를 입고 있었음에도 뿔쥐의 상체가 기울어지면서 무기의 궤도 또한 변해서 허공을 갈랐다.
“여기에 진짜가 있다!”
그렇게 공격당해서 충격이 전신으로 퍼져나갔음에도 뿔쥐가 아스톨포 왕자를 몸으로 붙잡았다. 뿔쥐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보통 뱀파이어 또한 육체 능력이 뛰어나다. 하물며 악마의 피에 의해서 지배받게 된 데몬 뱀파이어(Daemon Vampire)의 신체능력은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손 속에 자비를 뒀는데도, 날 붙잡아?’
피냄새를 맡았기에 뿔쥐가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놀랐다. 아파도, 괴로워도 그들에게는 적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존재했다.
“크으윽!”
육체변이를 한 아스톨포의 손이 뒤로 쭉 넘어가서는 그대로 뿔쥐의 투구를 돌려버리고, 뿔쥐의 바깥쪽으로 팔뚝을 잡아당겨서 제대로 힘을 못 주게 만들었다. 팔 관절이 위로 쭉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풀려났다.
휙!
목 아래에 툭 튀어나온 갑옷의 부분에 손가락을 넣은 아스톨포 왕자가 잡아당김과 동시에 발을 걸어서 넘겨버렸다.
쫓아오던 뿔쥐들은 능숙하게 피했다.
호다닥!
아스톨포 왕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30마리를 상대로 근접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한 손으로 열손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특히 백병전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호다닥 도망친 아스톨포 왕자가 말했다.
“이제 장난은 끝이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직 저 쥐들의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해서였다. 아스톨포 왕자는 실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오만했다.
*
이스핀은 순식간에 깡패들을 포섭했다. 그 뒤로 3일은 제법 편안하게 살았지만, 금세 꼬리가 밟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국제 연합 도시는 다름 아닌 게제라스 총리가 다스리는 도시였다. 그런 곳에서 도피 생활을 한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역시 국제 연합 도시야. 인재들이 많다.’
굳이 뒷골목 사정을 몰라도, 뒷골목 사정을 잘 아는 경찰이 있었다. 그런 놈들을 통해서 실무를 순식간에 파악한 똑똑한 관리들이 깡패 몇몇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게 끝났구나.’
이스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순금이라서 비싸다. 거기에 무겁기도 무거웠다. 딱 목걸이를 쥐었을 때, 느껴지는 포만감은 상당했다.
“이제 포기하시오. 이스핀 백작! 도렌 공왕부터 시작해서 자치왕국의 도시가 난장판이요, 난장판. 거기 가서 일을 돕는 것이 좋지 않겠소?”
관리가 골목길에 있는 허름한 여관을 두드렸다. 허름하다고 해도 연식이 오래되어있을 뿐,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있었다. 이스핀이 사람을 부려서 깨끗하게 만들었다.
“부숴.”
쾅!
건장한 경찰이 단번에 문을 부쉈다. 예비열쇠도 이스핀에게 줬기 때문에 평범하게 열 수 없었다.
이스핀은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갑시다. 백작.”
그 말에 이스핀이 고개를 돌렸다.
“예? 어? 당신들 누구야?”
“엉? 넌 뭐야?”
전혀 엉뚱한 얼굴이 있었다. 이스핀과 머리스타일이 같고 머리를 딱 돌리고 있으면 영락없이 이스핀으로 볼 만큼 복장부터 체형까지 똑 닮았다.
“저요? 전 레이온인데요?”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이스핀 백작이 있는 방이다! 그분은 어디 갔는가?”
“네? 아니, 이거 지금 무슨 행패입니까. 전 레이온이라고요! 남의 방에 들어와서 왜 이래요!”
그 말에 경찰의 눈이 여관 주인에게로 향했다. 여관 주인이 핏대를 세웠다.
“저 미친 새끼가! 어디서 내 탓을 해? 여기가 확실하게 백작님이 계셨던 곳입니다! 매번 요리도 여기로 보냈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경찰 하나가 익숙하게 레이온을 알아봤다.
“저 새끼, 저거, 깡패 새낍니다. 크게 죄를 짓지는 않았는데, 양아치로 유명합니다.”
대충 비정규 일하면서, 카드놀이 상대에게 협박질을 하면서 카드게임에서 승리하기로 유명한 양아치였다. 이길 때마다 동화 1닢만 가져가는 한 닢 양아치라 불렸다.
이 동네에서 카드 좀 한다는 사람은 모르는 자가 없었다. 또 사람을 때리지는 않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오는 용기를 내비치는 자도 있었다.
카드놀이 실력이 상당해서 실없는 자들에게 어둠의 카드사로 불리기도 했다.
“깡패라니! 양아치라니! 내가 죄지었냐고! 빨리 나가세요!”
“이 새끼가! 너 하나 때문에! 일이 얼마나 틀어졌는지 알아!”
경찰이 화가 나서 꿀밤을 먹였다. 이놈 하나 때문에 무려 20명의 경찰이 투입된 작전이 엉망이 되어서였다.
“어디 갔어? 이스핀 백작! 당장 말해!”
“그 사람이 누구냐니까...요.”
경찰의 덩치가 제법 커서 레이온이 뒤에 요를 붙였다.
“너너, 이거. 지금 차고 있는 그 금목걸이 뭐야?”
“주웠는데요.”
“연행해. 그리고 경찰 여러분. 조금 더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지켜보던 관리가 실로 죄송해했다. 말 그대로 이런 일에 투입되는 것마저도 경찰들에게 실례였다.
‘일하기 싫어서 도망친 백작 하나 잡는 데 공권력을 투입하다니...어디가서 쪽팔려서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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