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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마을 최고의 미녀 엘라(Ella).
그녀는 가벼운 여자로 통하지만, 매우 탐욕스러워서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다. 한 번 해도(?) 공짜로는 안 해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남자들의 구애가 심했다.
그런 그녀가 마을에 온 잘생긴 떠돌이 소식을 듣고도 아스톨포를 찾지 않는 건 모순이었다. 젊음과 큰 가슴과 예쁜 얼굴로 이미 평생을 적당히 살 수 있는 돈이 있었지만 잘생긴 남자는 예쁜 여자에게도 으뜸이었다.
남자가 예쁜 여자를 찾는 게 당연하다면, 여자도 잘생긴 남자에 환장하는 게 당연했다.
자연의 법칙이다. 공작새조차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아.”
우물에서 물을 떠서 단번에 덮어쓰며 아침부터 차가운 물을 사용해서 몸을 씻는 아스톨포의 모습이 엘라의 눈에 들어왔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 덕분에 그의 탁한 금발은 더욱 신비스러웠다.
거기에 근육도 적당히 굵직하고, 탄성 있으며 윤곽이 확 잡혀있었다.
인기척에 아스톨포의 눈이 엘라에게로 향했고, 남녀의 눈이 딱 마주쳤다. 벽안(碧眼)을 지닌 아스톨포의 바다색 눈동자는 매우 깊었다. 엘라는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아스톨포 또한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찰 생각은 없었다. 미소를 한 번 날려주고,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천으로 닦고, 다시 옷을 주워입었다. 엘라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는데, 항상 맹렬한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남자들 덕분에 수동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환경이 기생인을 그렇게 만든 것.
이를 모르는 아스톨포는 싱긋 웃으면서 시선을 마주한 채 뒷걸음질 치더니 민가 사이로 들어갔다. 엘라가 서둘러 이를 쫓았다. 코너를 돌자마자 아스톨포가 있었고, 그는 능숙하게 엘라의 허리를 휘감으며 달려오는 그녀를 몸에 꽉 껴안았다.
잘록한 엘라의 허리는 휘감기 좋았고, 그녀의 큰 가슴은 풍만했다.
“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단단하고, 차가운 물을 엎어 써서 뜨거운 체온을 발산하는 강인한 남성의 육체와 동시에 뱀파이어가 발산하는 향기를 맡았다. 달콤한 향기였다. 향수가 필요 없는 게 뱀파이어였다.
그들은 오로지 인간을 통해서 삐져나온 종족이었다.
서로 웃음소리를 냈다. 아스톨포는 그녀를 곧바로 자신이 배정받은 집으로 데려왔다. 거부는 없었다. 그런 여자였고, 기생인이다.
죽으면 유해조차 남기지 못하고 토양을 좋게 만드는 드낙의 하급 권속 악마인 벌레가 되어버리는 존재였다.
방에 들어선 아스톨포는 그녀의 다리에 손을 가져가서 단번에 공주님처럼 안으로 침대에 던져놓았다.
“아하하!”
그녀가 웃었다. 아스톨포는 침대에 살짝 걸터앉아서 자신의 얼굴과 그녀의 얼굴을 마주친 상태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 서로 입술을 맞췄다. 깊은 입맞춤 속에서 엘라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아스톨포가 잘생겨서였다.
아스톨포도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손은 섬세했다. 거친 걸 좋아하는 여성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 자신의 취향이 아닌데도 그게 자신의 취향이라고 착각하는 여성도 많았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뱀파이어에 완전히 매료된 그녀의 목 옆. 그곳을 아스톨포가 물었다. 어깨뼈와 목의 사이에 있는 근육에 이빨이 박혔다. 하지만 엘라는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
어둠의 귀족인 뱀파이어는 남자는 여자든 맛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성적 취향은 확고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게이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읍?’
“퀡!”
피맛을 본 아스톨포가 코와 입으로 엘라의 피를 뿜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침을 모아서 입에 있는 피를 뱉어냈다.
환상 속에서 아스톨포에게 정신없이 사랑받고 있는 엘라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동공은 흐려져 있었다. 아스톨포는 인상을 썼다.
‘빌어먹을? 아카타베루의 맛이 나잖아.’
절로 개 같은 기분이 들었고, 맛대가리도 없었다. 악마의 피가 섞인 인간의 피는 스테이크에 삭힌 정어리 국물을 쏟아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스톨포는 그냥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풀어버리고, 그녀의 상처를 마법을 통해서 치유해주고 돌려보냈다. 그리 큰 부상도 아니었다.
그 뒤로 아스톨포는 자신에게 들이대는 미모의 여성 3명을 더 상대했지만 모두 아카타베루의 피맛이 느껴졌다. 하나같이 기생인이었다.
‘미남미녀는 전부 악마의 피가 섞여 있는 건가?’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럴 확률이 높은 건 사실로 보였다. 이 작은 마을에 권속 악마가 4마리나 있다는 게 황당했다. 그만큼 기생인의 생식활동은 1년 365일 발정하는 토끼나 다름없었다.
그 덕에 일단 잘생기거나 예쁘면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자 기생인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생식기나 다름없었다.
발정이라는 사전의 단어 뜻을 가장 실천하는 종마가 바로 기생인 남성이었다.
‘입맛만 버렸군.’
결국 아스톨포는 평범한 여자를 노렸다. 추녀를 노리기에는 아스톨포도 눈이 있었다.
“왜 이런 년이랑 노는 거야? 나는 뭐가 돼?”
꽃밭에서 평범녀와 서로 화관을 맞추면서 여자가 좋아하는 추억을 만들던 아스톨포의 앞에 엘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이에 아스톨포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만 좀 해.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랑 한 침대를 뒹군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인연을 만났어.”
“그럴 수는 없지. 그냥 육체적 관계만이라도 좋아!”
그 말에 꽃화관을 쓴 세사리아(Cesarea)가 입을 손으로 가렸다. 이제 17살밖에 안 된 그녀에게 있어서는 충격과 공포의 드라마나 다름없었다.
“세사리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아스톨포가 능숙하게 그녀의 귀를 손으로 막아주며 말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안 들릴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하는 말도 다 들렸다. 그야말로 생쇼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런 생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사리아의 볼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으으으!”
엘라가 결국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태는 보기만 해도 대박이라고 외칠 정도였지만 아스톨포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악마의 피가 섞여 있어서 맛대가리가 없었다. 신혼집에서 남편이 매번 간장밥을 부르는 밥구성이다.
“세시리아! 너도 속지 마! 남자는 모두 늑대니까!”
엘라는 다시 되돌아가면서도 경고를 잊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매료가 지니는 매력에 성욕의 끝을 본 엘라는 이걸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상황 때문에 돌아가겠지만 이런 시골에서의 취미는 몇 없었다.
지루할 때면 아스톨포와 함께했던 때가 자꾸 머릿속에서 그려질 것이다.
*
‘브라이튼 유화는 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야외용 물감인데, 정확하게는 빛에 의한 산란이 일어나는 물감이었다. 즉, 그림 자체에 설계가 필요했다. 드낙의 실력은 감히 그 정도라고 할 수 없었다.
물감의 정도에 따라서 모든 게 달라지기에 숙련자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기가 없다. 애초에 마법이 깃든 유화라니,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드낙은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전혀 보답 받지 못한 채 레이시아의 생일을 맞이했다.
“하압!”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화염 마법으로 죄다 걷어내고, 햇빛이 짱짱한 곳에 드낙을 비롯한 수많은 왕비와 자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자식은 오지 않았다. 어리기도 어려서였다.
참석한 왕비는 록시 몽펠리에. 아샤 파이룬. 안젤리카 에드윈. 케이샤 킹슬레이. 에이벨 빌라이언. 오리앤 토치라이트와 레이시아 왕비까지해서 7명이었다.
그중 에이벨 빌라이언과 오리앤 토치라이트는 자식이 참석하지 못했다. 최근에 출산을 했기에 어려도 너무 어렸다. 그 두 명의 왕비는 서로 찰떡같이 붙어있었다. 아무래도 자식과 함께 오지 못해서 서로서로 돕고 있는 양상이었다.
드낙은 부인들과 자식들에게 인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벌써 피곤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핏줄이라는 게 참 무서웠다.
자식을 보면 씻은 듯이 그 피로감이 사라지고 웃음꽃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주인공인 레이시아와 그녀의 아들 크레시미르 불파겐(Kresimir Bulpagen)이 드낙에게 예를 표했다.
“그래.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부담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된다.”
“예. 필사의 각오로 불파겐의 이름에 어울리는 왕자가 되겠습니다.”
드낙이 덕담을 줬지만 크레시미르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배자로 살아가야 하는 크레시미르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등을 바라보고 함께 걸어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기득권이라는 자리였다. 민중은 그를 바라보는 것조차, 따라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크레시미르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같이 기득권이라고 부를 만했다.
왕정 사회의 독이었다. 레이시아는 드낙의 옆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고, 크레시미르는 그의 어머니를 에스코트해주며 물러났다. 이번 자리는 레이시아를 위한 것이지만, 그녀의 자식이 그 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다음으로는 안젤리카 에드윈과 그녀의 아들인 아메리코 불파겐(Americo Bulpagen)이 섰다.
“가문의 일은 잘되고 있다고 들었다. 앞으로도 정진해서 훌륭한 가문을 세워라.”
“모두 아바마마의 덕입니다.”
거의 이야기가 안 되는 불파겐의 차남이 아메리코였다. 욕심이 없다기보다는 크레시미르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했고, 에드윈 가문의 가업을 이으려고 노선을 정한 상태였다.
안젤리카 또한 근근이 유지되던 가문을 세우는데 강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최소 2대가 노력하며 승승장구하면 가문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여겼다.
그 뒤로 줄줄이 인사를 올렸고, 드낙은 덕담을 한마디씩 해줬다.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틈틈이 봐주고 있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드낙은 모든 왕비와 자식들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그 상황 속에서 그림 대회가 열렸다. 당연하게도 드낙은 1등을 하지 못했다. 1등은 브라이튼 유화를 사용한 다이앤타가 가져갔다.
빛이 산란을 일으키며 폐허가 된 성장과 깨진 유리의 명암을 극명하게 비교하도록 만든 그림이었다. 그야말로 일품이다.
“후흐흐.”
레이시아는 드낙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받아들이며 행복하게 웃었다. 투박하지만, 몇 번이고 수정된 흔적이 얼마나 드낙이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에 관한 관심과 사랑을 느꼈다.
‘다른 왕비들은 전혀 받아보지 못한 것.’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
“비웃는 건 아니죠?”
드낙이 그녀의 얼굴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네. 정말 소중히 할게요. 전 하루하루가 꿈만 같아요.”
아직도 종종 악몽을 꾸는 게 레이시아였다. 아무도 없는 곳. 딱딱한 빵조차도 받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수틀리면 죽는다는 공포 속에서 복도의 코너를 도는 것조차도 손이 떨릴 때도 있었다.
지켜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그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꿈과는 다르게 현실은 꿈보다 더 행복했다.
‘좋았어!’
드낙은 레이시아의 반응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환호했다. 제대로 먹혔다. 역시, 남자는 우직하게 정성을 들여야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다.
즐거웠던 가족 그림대회도 잠시, 뿔쥐들로부터 심상치 않은 보고가 들어왔다.
“망국의 이계인이라고?”
“예. 완전히 궤가 다른 존재입니다.”
레이시아와 같이 잘 생각에 꼼꼼히 향수도 겨드랑이에 뿌리던 드낙이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뿔쥐의 보고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궤가 다른 존재라니?’
너무 거창한 묘사였다. 하지만 그런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분명 뿔쥐에게는 있을 것이다.
‘설마, 또 마신의 종자?’
꿀꺽!
드낙이 절로 긴장했다.
“뭐가 궤가 다르다는 거냐?”
“어둠의 힘을 다루는데, 그림자로 변한 뿔쥐를 찾아냈습니다. 보통 이계인이 아닙니다.”
“마신의 종자냐?”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지금은 뭘 하고 있는데?”
그 말에 뿔쥐가 조금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앞에서는 보통 놈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그 반대를 말해야 해서였다.
“그게...여자를 꼬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뭐? 여자를, 뭐 먹거나 그런다는 거냐?”
“아뇨...그냥 교미를 하고 다닙니다.”
“그게 끝이냐?”
“예. 다만,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저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들키고 난 다음에는 멀리서 주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드낙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레이시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상대가 이상한 짓을 한다면 더더욱 빨리 처리해야 했다. 순식간에 파동으로 변한 드낙이 다시 모습을 홀연히 드러냈다.
그가 동네 바보형처럼 웃으며 말했다.
“위치는? 위치를 듣는 걸 깜빡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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