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913화 (912/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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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그림 대회가 불파겐 가족 내에 공표되었다. 모두 나쁘지 않다는 평가였다. 특히, 레이시아 플래티넘은 전과 다르게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다.

남을 배려하고 싶어 하고, 남을 돕고 싶어하는 게 레이시아의 아이덴티티였다.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은 왕비들이 많았다.

핍박받았기에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천성이 착했다.

그 덕에 부인들이 종종 찾아오곤 했는데, 그녀의 생일을 맞이하여 가족 대회가 열리니 나쁘지 않다는 것이 여론이었다. 금은보화로는 레이시아를 크게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까.”

드낙이 그렇게 말하면서 그림 공부를 했다. 하는 김에 1등을 노리기로 했다. 그럴 여유가 있었다. 마신의 종자, 나가에 대한 대책을 드워프와 권속 악마에게 맡겨서 한숨 돌렸다.

이제 느긋하게 악마가 될 수 있도록 업을 보존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가만히 있는 게 최고였다. 힘을 쓰려고 하지 말아야 했다.

사건·사고는 최대한 다른 이들이 해결할 터였다.

‘애초에 내 손으로 오는 게 이상하지.’

신급 세력은 되어야 드낙이 움직일만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드낙은 확실하게 업(業)을 소모해버렸다.

‘이제 그런 일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그 속에서 드낙은 중립신의 안배를 느꼈다. 자연스럽게 겁을 집어먹었고, 최대한 빨리 악마가 되고 싶어 했다. 설사 다른 생명이 꺼트려 져도 일단 신급존재가 되어야지 뒷일을 막을 수 있어 보였다.

‘앞으로 최대한 업의 소모를 줄인다.’

그 방침은 드낙의 겁쟁이 같은 면모 덕분에 철칙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나뭇잎인데 그냥 붓으로 툭툭 찍으라고?”

“예. 원래 그게 요즘 트렌드입니다.”

드낙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화의 세계는 생각보다 특이한 게 많았다. 일단 나뭇잎을 그리는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생각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감각적인 붓터치를 해야 했다.

붓으로 톡톡 찍고, 나뭇가지는 힘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서 굵기가 달라진다.

생각보다 재밌었다. 새하얀 공간에 자신을 채우는 행위는 오로지 자기 생각대로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익숙해지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제 초상화 쪽으로 가면 되겠어.”

“사람 얼굴을 그리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화가의 말에도 드낙은 요지부동이었다. 적어도 레이시아의 생일인데, 그녀의 초상화도 그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다.

“나쁘지 않은데?”

눈부터 비대칭인데도 드낙은 만족했다. 처음치고는 발군의 실력이라 여겼다. 화가가 우물쭈물했다. 비판을 하기에는 드낙이 지닌 지위가 너무 높았다.

“헤, 헤헤, 처, 처처음치고는 정말 대단하신 실력이십니다.”

“봐라, 너도 그렇게 말하잖아. 가능성이 있다니까?”

화가는 권력에 타협했고, 드낙은 곧이곧대로 들었다.

내성에서는 그림 그리기가 유행을 탔다. 왕비들이 움직이니, 자연스럽게 트렌드가 되었다.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그림 피크닉을 즐겼다. 이는 곧 민간에게도 흘러갔다.

다종족 연합의 교육정책은 졸업이 없다. 학교는 있지만, 자신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을 이수하는 것뿐이다. 이수하면서 시험을 치고, 자격증을 딸 수 있다. 고작 3시간밖에 배우지 않았음에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시험에 합격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 덕에 소위 ‘취미’라고 할 것은 잘 배우지 않는다. 일단 유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의 비 같은 이슈몰이에도 휩쓸리지 않은 게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화창한 날씨에 밖으로 나가서 차를 마시며 서로의 인간관계를 발전하고 유지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고, 대화를 하지 못하는 전쟁의 비는 썩 좋은 취미로 여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아하지 못했다.

딱히 배우지 않아도 커뮤니티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깔깔거릴 수 있는 그림 피크닉은 새로운 관점의 미술이었다. 보통 미술은 자기 혼자서 그리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과정 자체에 주목한 것이 그림 피크닉이었다.

발상의 전환.

그림 피크닉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손바닥 뒤집는 것에 불과할 정도의 발상 전환이었지만 그마저도 신선했다. 혁명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드낙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마치 자기가 미술을 세상에 보급시킨 기분이었다. 절로 콧대가 높아졌다.

‘다른 애들의 그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러 갈까?’

드낙은 가장 먼저 다이앤타에게로 갔다. 몸은 성장했지만, 아직도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이 다이앤타였다. 성인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어디다가 숨겼지?’

드낙은 곳곳을 누볐다. 그리고 다이앤타가 꼭꼭 숨겨놓은 걸 기어코 봤다. 아예 창고 하나를 자신의 그림 창고로 만든 게 다이앤타였다.

“푸흐흐.”

다이앤타가 그려놓은 것들을 몰래 보면서 드낙이 웃음소리를 냈다. 나뭇잎 찍기는 쉽지만, 나무를 그리는 건 영 엉망이었다.

‘나무 주름이 무슨 이렇게 많이 그려놨어?’

너무 난잡할 정도로 나무 주름을 많이 해놓은 그림을 보며 드낙이 웃었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자 드낙이 냉큼 숨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연신 감사를 표하는 상인과 화가 그리고 다이앤타, 3명이 들어섰다. 그들은 드낙이 낄낄거렸던 그림의 앞에 섰다. 하얀 천으로 가려진 것을 벗겨내자 주름이 많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흔들의자와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손바닥만 했고, 나무는 그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십시오. 주름 많고 큰 나무와 주름 많은 이 할머니의 조화를요. 거기에 여기 여백에는 다이앤타 불파겐 공주님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꼭 제가 사들이고 싶습니다. 결코 다른 이에게 팔지 않고, 전시할 생각입니다. 누구든지 보도록 제 가게에요.”

“대금은 아시죠? 요즘 브라이튼 유화 구하기가 많이 힘들어요. 전 반드시 크레시미르 왕자에게 이겨야 한다고요.”

“대량을 약속해드리겠습니다. 또 언제든지 실버즈 상단을 이용해주십시오. 퍼디난드 창고장이 항상 이곳에 상주해있습니다.”

그들은 드낙이 비웃은 그림을 애지중지하며 가져갔다.

“......”

드낙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둘러 그림 연습을 하러 움직였다. 상품성 있는 미술품을 그리는 다이앤타에게 진다면? 쪽도 그런 쪽이 없었다.

‘브라이튼 유화? 다 죽었다. 뭔지 모르지만 분명 좋은 것일 거야.’

*

데몬 뱀파이어(Daemon Vampire).

악마에 의해서 심장이 변질된 뱀파이어. 그들은 결코 악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 아카타베루는 이를 통해서 반신급 존재를 소모품처럼 사용했다.

밤의 귀족이라 불리는 뱀파이어 중에서도 왕자라고 불려지는 아스톨포(Astolfo) 왕자를 거침없이 다른 차원에 보내서 암약하게 하였다.

길쭉하고 얇은 목함을 들고 아스톨포는 마을 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재잘거리며 놀고 있는 소녀들의 복장은 깔끔했다. 나뭇가지 들고 뛰어다니는 소년들도 제법 유복해 보였다. 적어도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이는 없었다.

“잘 사는 마을인가 봅니다? 규모는 이렇게 작은데요.”

“무슨 소리를요. 돈을 버는 게 시원찮아서 다 도시나 성으로 가고 있는데요. 그나마 먹고살고 있습니다.”

그를 안내한 청년, 헤리손은 겸손을 떨었다.

“헤리슨은 무슨 일을 합니까?”

“약초꾼이죠. 마력을 증폭하는 푸른 물결 버섯을 숲과 언덕에 알아서 자생(自生)토록 최대한 도와주는 거죠.”

그리고 그런 아스톨포의 눈에 밭을 갈고 있는 농업 골램이 눈에 들어왔다.

“헙?”

“아. 농업 골램은 처음 보나요? 이건 국가에서 주는 건데...”

“국가에서 공짜로?”

“예. 당연히 공짜죠. 골램이 얼마나 비싼데요.”

‘궭?’

아스톨포가 어리둥절해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지배층을 위한 안전한 지배체계였다. 없는 놈들에게 자신이 만든 법을 입에 쑤셔 박는 것이 국가의 시작이다. 그런데 공짜 골램? 있을 수 없었다.

“놀랄 일이 많을 겁니다. 하하하.”

헤리손이 웃었다. 그리고 마을은 아스톨포를 환대해줬다.

여행자나 상인들이 머무는 빈집을 공짜로 내어줬다. 그렇게 그들이 공짜로 내어주는 모습에 아스톨포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런 곳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시골은 자원이 적다. 그렇기에 외부인이 들어오면 어떻게든 뭐라도 건져야 하는 게 그들이다.

계곡에 가면 밥이 만원이 되고. 닭이 10만 원이 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방문객이 적으니까! 어떻게든 한 놈만 걸리라는 식으로 장사를 한다. 이제는 가면 호구 소리 듣는 여름 해운대만 가도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은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벗겨 먹으려는 놈들 천지라는 것을.

‘여름에는 농부. 겨울에는 도적단이 되는 것이 시골의 정체성인데...’

팔은 안으로 굽고, 눈까지도 안으로 굽는 것이 시골 인심이다. 헌법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게 마을내규다. 헌데, 이렇게까지 친절하다고? 무언가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는 새벽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애초에 잠을 자려면 관이 필요했다. 뱀파이어는 관이 아니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누워도 눈은 말똥말똥하다. 그리고 잠은 뱀파이어의 굶주림을 조금 해소시킬 수 있어서 제법 중요했다.

‘흠.

틈틈이 아스톨포의 빈집을 지나가는 자경단 2명만 슥슥 보일 뿐이다. 되려 그들이 아스톨포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도 날 완전히 받아준 게 아니라서 마음이 편하긴 하다.’

아스톨포는 목함을 열었다. 주변이 어떤 전조현상도 없이 어두워졌다. 횃불조차도 밝기가 줄어들었다. 어둠의 검이자 마검인 샤를로트(Charlotte)가 목함에서 삐져나오자마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검에는 샤를로트 가문의 혈족 인자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대의 살과 피 그리고 뼈를 녹여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검 샤를로트는 틈틈이 기회가 될 때마다 샤를로트 가문의 피를 먹어야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삭.

엄지에 피를 내서 한 방울만 마검의 검면에 놓았다. 단번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냉큼 목함을 닫았다. 그런 아스톨포는 고개를 홱 돌렸다. 평범한 바닥이었지만 존재감이 순간적으로 느껴져서였다.

‘뭔가가 있다.’

어둠의 귀족이자 왕자인 아스톨포는 4,800살에 달하는 흡혈귀다. 흡혈귀 중에서는 젊은 축에 속한다. 그렇기에 왕이 아니라 왕자였다. 그래도 그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었다.

어둠이 어찌 그림자에 숨은 존재를 모를 수가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와라. 난 싸울 의지가 없다. 하지만 계속 숨어있다면, 나도 나의 안전을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 말을 하고 난 다음에도 침묵이 내려앉았다. 결국 아스톨포가 목함에서 마검 샤를로트를 집어 들었다. 어둠이 농밀하게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찍?”

진한 어둠은 그림자로 변해서 숨어있던 뿔쥐를 단번에 튀어나오게 하였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바닥이 아니라 천장에서 뚝 떨어졌다. 그건 아스톨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내가 실수를 하다니? 분명 기척은 바닥에서 느껴졌는데, 예삿놈이 아니다.’

그림자로 몸을 두르고 있었지만 명확하게 특정된 뿔쥐가 몸을 일으켰다. 이에 아스톨포는 검을 아래로 두었다. 롱소드의 형태를 지닌 검이었기에 한 손을 떼서 올렸다. 그 손은 오른손이었다.

자연스럽게 싸움이 일어날 상황으로 보이지 않았다.

“진정해라. 난 싸울 의사가 없다.”

그 말에 뿔쥐는 순식간에 창문으로 도망쳤다. 어둠 속의 그림자였기에 아스톨포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세계에 거대한 비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뭐였을까.’

크기는 작은 곰만했다. 털 쪘다라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로 뿔쥐들은 포동포동 살이 오른 상태였다. 털 때문에 키도 더욱 크게 보여서 잘 자란 북방민족처럼 풍채가 제법이다.

‘어찌 되었든 정보를 모으기 전까지는 조심해야겠군.’

피를 흡혈하는 것 또한 조금 번거롭게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가장 번거롭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을 쓸 생각을 가졌다. 그건 바로 미남계였다.

사랑을 하면 남자든 여자든 거세게 타오르는 활화산과 같았다. 그 속에서는 그 무엇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되려 자신의 반려자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할지도 모른다.

살인자여도 잘 생기면 한 번은 해보고 싶은 게 젊은 남녀의 심리였다. 그리고 아스톨포는 누가 말해도 잘 생긴 미남이었다. 걸어 다니는 흥분제나 다름없었다.

특히 기생인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문화가 융성한 수도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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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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