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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드낙이 내기를 제안했다. 도박의 흥! 그건 드낙이 가장 좋아하는 흥이었다.
“판돈은 내가 올리지. 금궤 10짝.”
드낙이 내기 판돈을 순식간에 올렸다. 금화만 1만 개. 그 모습에 도렌 공왕이 물었다. 당황한 눈치였다.
“게제라스 총리와 이야기가 된 겁니까?”
“국고 상황은 항상 흑자야. 나라에 도둑놈이 없거든.”
화폐를 찍고, 민간에 풀고, 다시 세금을 통해서 회수하고를 반복하며 소비를 촉진하고 있는 게 다종족 연합이었다. 인간 화폐, 오크 화폐, 엘프 화폐 등 화폐는 모두 제각각이라서 환금률을 통해 최대한 시장의 동태를 살필 수 있도록 한 것도 컸다.
현재로써는 가장 비싼 화폐가 오크 화폐였다.
대부분 자급자족한 오크들은 화폐를 국가사업이나 되어야 쓰기 때문에 보기가 드물어서 으뜸으로 쳐주고 있었다.
“전 다이앤타가 승리하는 거로 할게요.”
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도렌 또한 똑같이 말했다. 중보병이 경보병이 된 순간부터 게임은 끝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만큼 다이앤타의 기만술은 훌륭했다.
“그럼 내기가 안 되잖아.”
드낙이 다시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지금만 보면 승리의 여신은 다이앤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툭툭.
“세파리아스. 넌 어때?”
“아직은 반반이다.”
“왜?”
드낙이 순수하게 물었지만 세파리아스는 대답해주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경보병이 된 보병은 순식간에 숲으로 들어섰다. 크레시미르가 숲에 있는데도 먼저 그 경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진형이 엉망진창인 경보병들과 궁수 거기에 기병들은 그대로 휴식에 들어가며 다시 모습을 갖추었다.
크레시미르는 진형을 갖춘 채 숲으로 들어섰기에 해당 작업은 필요했다. 면과 면의 싸움이 냉병기 싸움이었다. 이리저리 어긋난 면으로 부딪치면 돌출된 부위는 맞아 죽고, 오목하게 들어온 곳은 상대가 들어와 주질 않는다.
물론 숲에서는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지형 탓이다. 고로 틈틈이 해주면 좋지만, 이동 내내 망가뜨려 지는 걸 억지로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재정비를 마친 다이앤타가 숲으로 들어섰다. 물론 기병들은 평야에 남아서 말머리를 꺾었다. 크레시미르의 적색 군대의 기병이 평야로 향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기병전투가 시작되겠군.”
“모두 중기병이잖아?”
섬멸전인 특징상 경기병 따위 한 기도 없었다. 서로 제대로 붙기 위해서 준비를 한 상태고, 후퇴는 곧 패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제한된 전술전’이 된 상태였다.
언제든지 후퇴해서 적 지휘관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는 게 가장 큰 이득이라고 가르치는 전술교본에 반하는 전투인 셈이다.
“제대로 한 판 붙겠네.”
드낙이 손을 주억거렸다. 하지만 세파리아스가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또, 또. 좋은 그림 나오는 거 방해하려고.”
“이건 전투 훈련이다. 서로 승패를 가르는 것인데, 기병전을 할 필요는 없지.”
“아.”
그제야 드낙이 수긍했다. 그 또한 야수 기사, 그라돈의 전술교본을 몇 번이고 탐닉한 전술가였다. 물론 단 한 권만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실제로 군을 맡기면 가장 말아먹기 좋은 위험한 전술가였다.
그나마 그라돈 토치라이트가 지닌 전술 능력이 뛰어났기에 나쁜 책은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인 셈이다.
“한쪽은 싸울 필요가 없구나.”
딱.
세파리아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정답이라는 소리다.
다이앤타의 군세를 견제하러 간 중기병과 조우한 다이앤타의 중기병은 굳이 크레시미르의 중기병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숲에서 보병 간 싸움이 일어난다면 승리하는 쪽은 다이앤타가 될 공산이 컸다. 즉, 굳이 기병전을 벌여서 변수를 크레시미르에게 줄 이유가 없었다. 그저 묶어두기만 하면 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중기병도 견제 수단으로만 이용될 수 있다.’
현실이었다면 그런 판단을 기병단장이 내려야 했기에 보기 드물었지만, 이 <전쟁의 비>에서는 참전하면서도 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휘관을 기르기에 너무 좋은 것 같은데...”
“치고받고 싸우기만 한다면 모르겠지. 옆에 군사학자를 두고 상황에 따라서 뭐가 뭔지 가르쳐야 한다.”
자연스럽게 비용이 드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한국만 해도 장교 및 부사관 예산이 10조가 넘게 소모된다.
지휘관과 부사관급의 인사를 키우는 데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수준으로 돈이 들어가야 했다. 그래야 오직 전투와 전쟁을 위한 인간이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오히려 전쟁의 비를 통해서 얻는 결과물은 들이는 돈에 비하면 높은 효율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당장 드낙만 해도 전술적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재미를 느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게 전쟁의 비였다.
“재밌는데? 이러면 150cm 피규어를 만들 필요가 있어?”
“어리석은 소리를...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곳에서 죽는 사상자의 7할이 신병이다. 그런 <신병> 자체를 없앨 수 있는 게 인공 협곡 프로젝트고. 전쟁의 비는 지휘관을 양성할 뿐이다.”
군대 전체가 베테랑이라면, 사상자의 숫자 또한 현격히 줄어들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세파리아스와 자치왕국이 추진하고 있는 인공 협곡이었다. 최근에는 쉐도우 위스퍼로부터 해당 정보를 구매한 오크나 엘프들도 발을 들이밀고 있는 형편이다.
‘돈 냄새를 맡은 거지.’
복불복 로또 카드 긁기나 다름없는 것이 지휘관 양성이다. 이놈이 제대로 된 놈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란 전쟁이 직접 터져봐야 알았다. 거기에 전쟁의 비를 통해서 파악한다고 해도 뇌절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오죽하면 유능한 지휘관을 5% 이상 배출 가능하면 무적의 나라가 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그에 반해서 <인공 협곡 프로젝트>는 베테랑 병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곳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를 경험하면 웬만하면 전부 베테랑 병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곳에 발을 들이밀지 않으면 바보였다.
푸르륵!
그러는 사이에 양측의 중기병이 평야에서 마주쳤다. 엉뚱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이앤타의 중기병은 가만히 크레시미르의 중기병을 지켜보며 거리를 두고 졸졸졸 따라다니고 도망쳐다녔다.
‘어떻게 벌써 평야를 지나갈 수 있었지?’
크레시미르는 당혹감을 느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중기병을 통해서 언덕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다이앤타는 이를 허용해주며 끈질기게 간격을 유지했다.
청색 중기병이 적색 중기병과 기묘한 관계를 이어나가며 텅텅 빈 언덕을 확인했다.
동시에 숲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척후를 맡은 청색 보병들이 적색 경보병에 의해서 공격당했다. 단번에 수풀을 헤치고 튀어나온 경보병의 숫자는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부웅! 붕붕!
적색빛을 뿌리는 주력무기가 적색 경보병의 손에서 뽑혔다. 숏소드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자연의 주력.
마력과는 다르게 파괴적인 성질이 전혀 없는 주력은 피규어 병정놀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무기였다. 특히, 조그놀트(Zognolt, 주술)라 불리는 새로운 주술을 통해서 잘 자리 잡혀있었다.
부우우웅!
청색 군단의 보병들은 롱소드를 뽑았다. 자연스럽게 청색빛이 튀어나왔다. 현란한 빛무리 속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버클러로 롱소드를 막고, 양옆에서 치고 들어옴과 동시에 전방의 적색 경보병도 냉큼 달려들었다.
한순간에 청색 척후들의 진형이 붕괴하며 난잡하게 난도질당했다.
파지지직!
스파크가 일어나며 피부의 곁에 있는 마력피부가 벗겨지며 그대로 마비되듯이 허물어졌다.
쿵!
방어구 덕택에 몇몇 조그놀트 숏소드를 막아낸 척후병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옆으로 들이박고, 넘어지고 난 다음에는 목에서 스파크를 뿜어내야 했다.
‘경보병의 숫자가 많다!’
지휘관실에 들어간 크레시미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택의 때가 왔다.”
세파리아스가 말했다. 드낙이 그걸 보며 툭 내뱉었다.
“말하기 싫다면서 말하네?”
“......”
세파리아스가 드낙을 무시하자 드낙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드낙도 이를 세파리아스를 통해서 인지할 수 있었다.
‘양측 중기병은 개입할 수 없다.’
‘후퇴하면 패배.’
‘싸워도 큰 피해를 주고, 패배.’
전투라는 것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끔찍한 싸움터였다. 그 속에서 크레시미르는 후퇴를 선택했다. 매우 빠르게 사방팔방 도망치기 시작했다.
“졌네.”
드낙이 담백하게 말했지만 세파리아스가 웃음소리를 입에서 흘려냈다.
“뭐야? 왜 웃어?”
“저게 후퇴로 보이느냐? 재밌군.”
드낙이 자세히 이를 살폈다. 확대된 화면에서는 후퇴하면서 잡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넓고 거대한 경기장 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달랐다.
‘산개.’
후퇴와 산개는 다르다. 그리고 저 모습은 드낙 또한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팔뚝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순찰자?’
도망치는 장궁병들은 서로서로 도우며 경보병들을 요격하고 있었다. 이는 순찰자의 방식과 비슷했다.
“대단해. 공멸할지도 모르겠는데? 숲이라서 완전 난전이 되어버렸어.”
“네 자식이라서 그런지 하나같이 불쾌하기 짝이 없지 않느냐?”
그 감탄에 세파리아스가 찬물을 끼얹었다.
“뭐라고?”
드낙이 세파리아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오로지 냉소뿐이다.
“나이가 자라면 저런 모습도 서서히 옅어지겠지만 사라지지는 않겠지. 한 명은 기만, 다른 한 명은 편법을 쓰지 않느냐. 정석이라고는 없어.”
다이앤타는 승리하기 위해서 중보병을 경보병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버려지는 장비는 값이 제법 나갈 수밖에 없었다. 현실이었다면 황금 덩어리를 버리는 것과 같았다.
크레시미르는 승리하기 위해서 편법을 사용했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장궁병을 순찰자처럼 운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피규어라서 그런 역량을 보였지, 현실에서 장궁병을 숲을 뛰어다니면서 화살을 쏘라고 하라면 10명 중 1명도 따라 하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했을 것이다.
그만큼 험지에서 장궁을 사용하는 순찰자는 미친놈들이었다.
“임기응변에 능하다고 해야지.”
“훈련 상황이다. 승리를 위해서 저렇게 악착같이 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점수를 따고 싶다면 저런 요행스러운 상황을 유도하는 상대에게 정석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그럼? 저렇게 순찰자식 싸움을 하는 장궁병이 있다고? 그것도 한 군데에 100%의 비율로 존재한다고? 그렇게 만들려는 거냐? 적어도 신제국은 그런 비효율적인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비가 오고, 사람 만나기 힘든 곳을 돌아다니며 보급도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들쑥날쑥 습기에 따라서 크기가 변하는 나무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순찰자는 평범한 인간, 뛰어난 병사, 위대한 기사도 따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야말로 인류를 위해서 화살이 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장궁병으로 쓰는 병신은 없었다. 과잉 훈련이고, 그런 실력을 보일 기회도 적었다. 장궁병은 장궁병에 맞는 자원을 투입해야지, 장궁병에 많은 자원을 투입해서야 본말전도였다.
고로, 이 전투는 말 그대로 그 어떤 알맹이도 없었다.
“두 분 다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요.”
냉랭한 분위기에 세리안이 말했다. 두 명의 눈이 절로 세리안에게로 향했다.
“이 싸움은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 둘의 감정 싸움이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 불러올 생각 말라고 했잖아요.”
“...그렇군. 내가 실언했다.”
오로지 전술적 측면과 객관적 평가를 했던 세파리아스가 수긍했다. 드낙의 멍청함 때문에 급발진한 것을 인정했으며 사과했다.
“커흠...”
드낙도 세파리아스가 사과하자 물러났다. 무인답게 그래도 굵직굵직한 것이 세파리아스였다.
전투의 행방은 결국 다이앤타 쪽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난전을 유도했다고 해도 버클러와 조그놀트 숏소드로 무장한 것이 경보병들이다. 1:1에서 지는 게 힘들었다. 기병전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몰랑 확 질러버리는 짓은 두 명 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판정을 통해서 다이앤타가 승리했다.
“재밌는데?”
관전했던 이들은 모두 호평을 내놓았다. 특히 전술적인 시야 및 판단이 흐린 자들은 특히나 흥분했다. 문인인 자신이 군대를 다루며 다른 이들과 싸운다. 그것도 자신의 몸에 어떤 위험도 없이!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제법 군사서적을 읽은 자들은 시스템의 문제를 크게 거론하며 토론하기 바빠서 제법 표정이 무거웠다.
드낙은 이번 일을 통해서 시스템을 더욱 수정할 것을 지시했다.
크레시미르는 크게 분통을 터트리며 도망치듯이 벗어났다. 가는 내내 다이앤타가 그 옆에서 종알종알거리는게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궁병? 궁병이 많은 군대로 여동생은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하던데...오만 왕자라고 내가 아는 왕자가 있는데 소개해줄까? 응? 왜 대답이 없어? 오만 왕자님. 앞으로 오만 왕자님이라고 불러줄게. 오라버니보다 더 극진한 말이잖아?”
“크으으윽!”
특히 멀리서봐도 크레시미르 왕자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어서 수치심으로 가득했다. 목까지 붉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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