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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그래도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복지를 하기는 해야 하잖아?”
“왕비는 그렇게 말해도 되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지금 당장 눈앞을 봐라, 마신의 종자가 드워프를 죽였고, 이계인들이 침투했다. 그런데도 늙은 놈들에게 돈을 주고, 자원을 쏟아붓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드낙의 짧은 말에 세파리아스가 제법 길게 조언해줬다. 그만큼 실버 타운은 점점 몸집이 커지고 있었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나라에 도둑놈이 없었고, 막대한 예산이 남아돌았다.
국가의 예산이 흑자로 계속 이월되듯이 달마다 국고가 쌓이고 있는 게 다종족 연합의 현실이었다. 막강한 국가였고, 뿔쥐들에게서 각종 비리가 들켜서 꾸준히 몰락하는 이들이 존재하여 사회 이동도 분주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오직 옳은 방법으로 돈을 버는 자만이 우뚝 설 수 있었다.
‘눈앞과 훗날.’
드낙은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래도다. 드낙은 약자로서 살았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노인들이 불쌍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아.’
거침없는 세파리아스의 말은 너무나도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너무나도 올곧고 편향된 시각을 지닌 게 그였다.
“신제국이 잘 돌아가고 있어서 안심했는데, 아직도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거냐? 그들은 최소한의 보살핌이 필요해.”
“지금의 실버타운은 최소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걸, 노인을 위한 젊은 고용인이라니, 우습다.”
세파리아스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드낙을 향했다.
“차원 전쟁의 상황이 지금 어떠냐. 충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 때문이지. 아무리 쌓아도 모래성일지, 난공불락의 요새일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중립신은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놓을 정도로 빨리 차원을 닫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넌, 우리는, 이 세상은 그와 견줄 수 있는가? 그 절박함의 하나라도 따라왔느냐 말이다.”
“나가들을 놓친 것도 큰일 아닌가? 드낙.”
“곧 박멸된다. 완전히!”
“드워프가 있어서 망정이지...그런 게릴라에도 휘둘리는데, 본격적인 침공이 개시된다면? 그때 가서는 뭐라고 말할 거냐? 쓸데없는 곳에 인정을 쏟지 마라!”
“적어도 자신이 불구가 된다면 돌아갈 곳이 있고, 지원해준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드낙이 말을 줄였다. 이 말은 결코 세파리아스를 설득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나도 알고 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만하지. 실제로 신제국의 처세는 조금 부드럽지. 하지만 드낙! 평화는 오로지 피로 이루어지며,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건 그저 평화가 도래한 태평성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모든 세대가 그런 혜택을 누릴 수는 없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게 떨어지는 것은 밤마다 자신의 잠을 괴롭히는 PTSD뿐이다.
“전쟁이 터지면 모든 것이 끝이다.”
거듭 세파리아스가 강조했다. 드낙은 크게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은 정론이다. 특히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어떤 종말을 맞이했는지 드낙은 모를 수가 없었다.
표창장 하나 주고 끝나는 세상이다.
결국 드낙은 레이시아 왕비를 찾아갔다.
“신제국의 황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예. 그러니까 아무래도 삭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세요?”
레이시아는 몇 가지 근거를 물어보았다.
“차원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은 이미 확정된 건가요?”
드낙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이미 이계인도 침투한 상황이라...”
“그들은 외부 차원 노동자들이 아니었나요?”
언제적 정보를 가졌는지 레이시아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만큼 약자들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해버렸다.
“예. 나중에 알아보세요. 고위직은 열람이 가능하니까요.”
레이시아는 별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노인이고 나발이고 지원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굶주린 병사는 예술품까지도 장작으로 쓴다. 그만큼 전쟁은 두려운 것이었다.
북괴가 쏜 미사일에 대한 공포처럼, 그만큼 전쟁론은 강력한 힘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존재했다.
이계인이 그러했고, 나가가 그러했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시아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사치스러운 일이 실버타운이었다.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 중에서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소한도로 유지하도록 하세요. 게제라스에게도 연락을 보내놓을 테니까, 상의는 그와 함께하시고요.”
“네.”
레이시아가 수긍했다. 다종족 연합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국제 연합 도시의 총리 게제라스였다.
“그것보다 크레시미르가 이번에 전쟁의 비를 다이앤타와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네. 그렇게 제가 말렸는데도 자꾸 다이앤타와 티격태격...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레이시아는 세리안과 각을 세우는 것조차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녀와는 다르게 커리어 자체가 너무나도 다른 것이 세리안 불파겐 왕비였다. 그래서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가 서로 마주칠수록 레이시아는 위가 아파져 올 지경이었다.
“보기 좋은 겁니다. 남매 사이라는 게 확 티가 나지 않나요?”
드낙이 웃음 지으며 말해도 레이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나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요. 보시면 그런 생각은 못하실 거에요.”
그녀의 거듭된 말에도 드낙은 이를 믿지 않았다. 결국에는 한 핏줄이고, 세리안과 다이앤타는 향후 신이 되어서 독립할 사람들이었다.
차원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에 실버타운의 예산을 삭감했지만, 실버타운을 곤죽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드낙의 무른 생각은 한 두 마디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의 전쟁의 비가 지하에서 개최했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게 드낙이었다. 오랜만에 다종족 연합의 중추를 초대했다. 그 덕에 지하는 청량한 공기가 통하도록 주술 토템이 떡하니 입구와 출구 그리고 벽 곳곳에 기둥처럼 배치되었고, 곳곳에 청소의 흔적이 존재했다.
“오랜만입니다!”
도렌과 함께 가장 먼저 와있던 이스핀이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드낙이 그 두 명을 차례대로 포옹했다. 지배하는 땅의 넓이가 커지자 서로 보는 일이 적었다. 이제는 서로 가정도 있어서 더더욱 보기가 힘들었다.
“도렌 속을 그렇게 썩이고 있다고?”
“무슨 그런 말씀을! 정말 일만 하는 저놈이 이상한 겁니다.”
이스핀이 자신의 억울함을 차례대로 토로했다. 반면 도렌은 딱히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드낙 님. 이스핀에게 제대로 술 사업하라고 하시죠. 요즘 그냥 대충 남한테 하청 놓고, 괘씸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뭐? 난 주류 사업은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고새 남한테 물려준 거야?”
“헤, 헤헤...원래 이 술이...”
“변명은 하지 마라. 어떻게 이렇게 뺀질거릴 수가 있지?”
이스핀이 땀을 뻘뻘 흘렸다. 도렌에게 일을 적게 받기 위해서 주류 사업을 냉큼 다시 손으로 움켜잡고 열심히 했지만, 고새 또 게으름이 도져서 다른 놈에게 대충 맡겨버리고 놀기 바빴다.
그게 딱 들킨 것이다.
‘그걸 이제 말하는 것조차도 음흉하다!’
이스핀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도렌, 드낙과 한 자리에 딱 모였을 때 도렌 욕의 물꼬를 틀 것이 분명했기에 도렌 또한 한 가지 가지고 있다가 확 터트린 것이다. 이제 더는 이스핀은 도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저 피규어들 보셨습니까? 정말 장관이던데요.”
그 말에 드낙이 고개를 돌렸다. 전장의 넓이만 해도 3천 평에 달하고, 피규어들이 대기하고 있는 연병장은 300평이었다. 아직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는 도착도 안 한 상태였다.
“적색 깃발이 다이앤타 공주입니까?”
“그래. 청색이 크레시미르 왕자고.”
30cm 피규어들이 무장한 채 연병장에 사열해있었다. 병과마다 소지 무기도 제각각이었고, 같은 병과라도 무장의 상태가 조금조금 달랐다.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는 편이었다.
‘점점 규격화되겠지.’
다이앤타의 적색 군대는 기병 50, 궁수 200, 보병 750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크레시미르의 청색 군대는 기병 50, 궁수 600, 보병 350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척 봐도 싸움의 결과가 보입니다.”
도렌의 말에 드낙이 호기심을 느꼈다.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전장의 크기 때문에 허공에는 곳곳의 전장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이를 통해서 가만히 앉아서도 모든 곳을 볼 수 있었다. 이를 위한 옵저버도 여럿,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당연히 그들은 전장을 볼 줄 아는 군사학자들이었다.
“없는 지형이 없군요. 하지만 적어도 크레시미르 왕자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합니다.”
“무조건 언덕이겠지.”
“예. 강도 좋은 판단이 될 수 있는데, 장애물을 만들 나무가 근처에 적습니다.”
강은 상대의 시간을 뺏기 좋았다.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이앤타는 크레시미르의 병과를 알고 있고, 크레시미르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이앤타는 결코 도강할 수 없었다.
“언덕 싸움이 되겠군.”
“보통은 그렇게 판단하겠지만, 전 다릅니다.”
“뭐라?”
드낙이 절로 놀랐다.
“다른 변수가 있나? 언덕은 양쪽 모두에게 비슷한 거리에 있어.”
“예.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숲을 거쳐야 합니다. 반면 공주님께서는 평지입니다.”
“그래도 엇비슷하게 도착할 수밖에 없어.”
언덕의 정상은 다이앤타가 먹을 공산이 크지만, 반대로 숲을 통과한 크레시미르의 기병이 견제를 넣을 수 있었다. 군대의 이동 속도는 가장 느린 보병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기병 싸움이 평지에서 일어나겠군.”
쟁점은 곳곳에 존재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이들과 근황을 나누는 사이에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도 도착했다. 서로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현실은 화살 한 발 쏘기도 어려워. 알고 있지?”
“적어도 보병에게 칼침 맞기 전에 조질 수는 있지.”
“기대해.”
전술적으로는 궁병보다는 보병 우세가 많았다. 시작 전부터 크레시미르는 약세였다.
우루루루!
30cm짜리 피규어들이 명령에 따라서 착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지하에서 사람들은 마실 것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확대된 곳에 양측의 피규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드낙이 다이앤타의 적색 군대를 보자마자 감탄했다. 이미 봤음에도 달려나가는 속도 때문에 그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전부 경보병이다!!!!’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음흉한 한 수! 실로 드낙의 딸답게 그 속내를 드러냈다. 상대를 기만하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육중한 중보병으로 보였던 것이 다이앤타의 보병이었다. 거대한 중형 방패는 그냥 화살 따위 씹어버리고, 무식함으로 상대하겠다는 소리였다. 거기에 멋들어지게 입혀놓은 붉은색 로브는 나 여기있소~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덕에 크레시미르는 장궁병이 많았다. 명중률과 충격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방패를 사용해도 화살은 그 틈을 노릴 수 있었고, 그 빈틈에 한 대라도 맞으면 큰일 난다.
거기에 체력까지 쉽게 닳아버리는 게 중보병의 단점이었다.
‘그런데!’
터덩텅터덩!
묵직한 방패는 시작하자마자 버렸다. 그럴싸하게 입혀놓은 붉은색 로브 또한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냈다. 판금 갑옷도 버리고, 체인메일만 입고, 천으로 껴입어서 소음을 줄였다.
타다닥!
단번에 경보병 950명이 내달렸다. 그들은 숏소드와 버클러를 꼬나쥐고 내달렸다. 절로 속도가 재빨랐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언덕이 아니었다.
‘숲이다.’
<지휘관실>에서 자신들의 피규어가 보는 시야와 최소한도의 전술시야만 가지고 있는 것이 다이앤타와 크레시미르였다. 그녀의 기만술을 크레시미르는 모르고 있었다.
크레시미르의 청색 군대가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찍 전투가 끝날지도 모르겠는데.”
그의 말대로 크레시미르는 너무 정석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이라는 점은 정석이었기에 척후병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없는 보병을 척후로 돌리다니, 이건 다이앤타도 생각 못 했겠지.”
최대한 조언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와 그녀의 날 것 그대로의 재능을 볼 수 있었다. 다이앤타는 기만술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게 절로 보였고, 크레시미르는 일단 정석을 추구하는 모습이었다.
“도렌, 어떻게 될 것 같냐?”
그 말에 도렌 공왕이 짧게 답했다.
“숲에서는 기병도 소용없습니다. 청색 군대의 척후와 경보병이 서로 마주했을 때, 크레시미르 왕자님의 판단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 날 듯합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답은 없습니다.”
그 말에 세리안 왕비가 한 마디 했다. 그 모습에 드낙이 미소를 지었다. 상반된 의견이 나왔다.
“내기라도 하는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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