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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드낙은 드워프들의 회의에 강제로 남아야 했다. 물론 겉으로는 히죽 웃으면서 이에 화답해줬다. 아무래도 드워프 제국으로서는 드낙과 자주 볼 수 없어서 이번 기회를 더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듯했다.
‘나야 뭐 아무래도 좋지만.’
결국 다종족 연합이라는 것은 방치 플레이나 다름없었다. 종족들이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차원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내버려 두는 편이다.
‘선두주자는 나니까.’
그런 판단이 가능했다. 그리고 드워프 중에서 신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드워프가 없었다. 각성제 문화가 도입되어서였다.
‘나와도 문제없지.’
오히려 축하해줄 일이었다. 드워프의 전투력은 생각보다 낮았고, 신이 된다고 해도 드낙의 적수가 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런 게 문제였다면 드낙은 벌써 세파리아스를 죽였을 것이다.
‘신이 되어도 자유를 주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야망을 지녔다면 다른 차원으로 독립시키면 그만이었다. 또 내부의 힘이 많아지면 외부로 나아가면 될 일이다.
이런 판단 속에서 드낙은 조용히 드워프 제국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며 회의에 꾸준히 참석했다.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느낀 것은 황당함이었다.
‘뭐야? 이게...드워프 제국의 회의?’
마신의 종자, 나가에 대한 토벌단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된 갈등은 회의로 풀어나갔는데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이상해진 상태였다.
“천하제일 잠투력 대회를 열어야 한다!”
‘뭔 대회?’
“잠투력이 뭔가?”
“아아, 잠투력 말인가? 그것은 잠을 버티는 능력의 정도를 말한다. 드워프 고유의 능력지표지.”
“......”
동면 혹은 각성제를 자주 먹어야 하는 드워프들에게는 필수적인 문화이기도 했다. 드낙은 일단 이해했다.
‘충분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실로 그럴듯했다.
먼저, 드워프 제국이 있는 곳으로부터 서쪽 해안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하지만 나가를 잡기 위해서는 바다로 나아가야 했다. 드워프에게 바다는 결코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우주라는 무지막지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게 그들이다. 호흡하지 않는 종족이었다. 그런데도 일부 유기체적 특성을 보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중립신이 만든 최강의 육체 종족이었다.
‘마신의 객장(客將). 마신장(魔神將)의 카운터 종족이지.’
드워프의 손길이라는 범용성이 적지만 효과는 보장되고 반영구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초월 체계를 지닌 이곳의 드워프들은 방어력도 단단할뿐더러, 큰 대포 등과 같은 화약 무기를 사용한다.
자신의 그릇마저 붕괴시킨 발라쿠와는 다르게 일반적 마신장은 얼마든지 때려잡을 수 있는 게 드워프 종족이었다. 먼저 숫자도 많았고, 마신장의 즉발 마법에 사망자가 많이 생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너무 욕심을 부렸지.’
중립신의 안배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신장이 아니라 동면이 그들의 가장 큰 호적수가 되어버렸다. 그걸 해결시킨 게 <각성제 문화>였다.
특히 악마 각성제를 통해서 야금야금 드워프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게 드낙이었다. 아무튼, 이런 드워프 종족의 현재 상활을 생각했을 때, 잠투력이 높은 드워프를 나가 토벌에 보내는 건 불가피했다.
‘보급은 거리에 따라서 천지 차이로 벌어지니까.’
10명의 보급품을 하루에 한 번 보낼 수 있다면 차량 한 대로 충분하다. 하지만 10명의 보급품을 한 달에 한 번 보낼 수 있다면? 많은 차량을 써야 했다.
똑같은 인원이라도 거리에 따라서 보급량이 달라진다. 드워프들의 각성제 보급을 생각한다면, 잠투력은 하나의 선별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가를 처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베테랑의 기준을 꼽으라면 나는 첫째로 잠투력, 둘째로 잠투력, 셋째도 잠투력이라고 말하겠소!”
잠투력! 잠투력! 잠투력!
아주 그냥 잠투력에 미친 종족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경쟁 요소가 컸다. 또한, 새로운 지표였기에 사회이동도 가능해서 아주 뜨거웠다.
“좋소. 어차피 나가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드워프의 대적자라고 할 수 없으니까.”
땅! 땅! 땅!
단번에 결정이 났다. 천하제일 잠투력 대회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엄청나게 대규모로 일어났다. 참가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럴 수밖에.’
오랜만에 나타난 드워프 제국의 공적(公敵)이다. 술집 어디든지 가도 나가들을 욕하고, 마신을 저주하는 드워프들이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서 개최된 천하제일 잠투력 대회는 드워프들의 마음속에 장작 하나 듬직하게 집어넣는 일이었다.
명예를 거머쥘 수 있고.
지금까지는 술집에서만 이루어진 소규모 잠투력 내기가 아니라 국가에서 치르는 첫 공식전이었다.
하나같이 의미를 부여하면 끝도 없는 대회가 되었다. 토너먼트식으로 진행되어서 난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드워프들은 굉장히 좋아했다.
“참가자 6228번! 바닥부터 기어 올라온 방랑자! 매번 잠투력을 그 자리에서 성장시키는 질주하는 전사!!!! 선명한 구리끈!!!!”
우와아아아아!!!!
구리를 생산하던 노동자였던 선명한 구리끈. 그는 매번 저력을 보여주며 잠투력을 계속해서 성장시키는 괴물이었다. 처음 술집에서는 잠투력이 32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1100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 상대는! 참가자 9285번! 왕의 혈통! 산맥의 정기를 이어받은 산맥 가문의 위대한 지배자! 고고한 왕좌를 차지한 잠투력의 왕! 언덕 술집의 위대한 일인자!!! 언덕왕이라는 이명을 지닌 전쟁 산맥!!!”
두 명의 참가자가 단박에 올라섰다. 그리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곧 서로 테이블을 하나 두고 마주 앉았다. 테이블에는 온갖 각성제가 입맛대로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리고 드워프의 손길로 한 땀 한 땀 만든 큰 의자는 앉는 것만으로도 드워프의 동면을 가속화시키는 의자였다. 앉자마자 의자의 위에는 고블린 고용인의 주술로 만든 숫자가 올라간다.
“경기는 간단! 동면의 의자에 앉는 순간 잠투력이 측정되기 시작한다!!! 각성제를 먹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먹는 각성제에 따라서 잠투력의 감소가 이루어진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으면서 감소폭이 낮은 각성제를 알고 있는가! 그것마저도 중요한 것이 이번 천하제일 잠투력 대회 고유의 컨셉!”
그 말이 이어지면서도 두 사람은 신호에 맞춰서 앉았다. 그리고 자기만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를 바라보며 드낙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급과 같다.’
자신에게 맞는 각성제를 알고 있다면, 그것만 갖추기만 하면 된다. 드워프마다 자기 몸에 맞는 각성제는 제각각이었다. 이를 알게 함으로써 보급 효율을 갖출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개개인의 보급 소비율을 줄일 수 있었다.
드낙은 잠깐 구경하고, 드워프들이 잘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대회장에서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딸이나 보러 갈까?’
마신의 일은 드낙의 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놨다. 이제는 악마 개화를 위해서 최대한 힘을 쓰지 않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자연스럽게 자식에게로 눈이 돌아갔다.
‘최근 자주 못나기는 했지.’
특히 드낙은 다이앤타에게 큰 편애를 끼얹고 있었다. 쿼터 데몬이라고 말할 정도로 악마의 혈통을 잘 물려받은 게 다이앤타였다. 워낙 변수가 많은 드낙이었고, 부인들 또한 변수가 높은 인간이라서 그 이후로는 단 1명도 쿼터 데몬이라고 불리는 일이 없었다.
그저 악마의 특징을 조금조금 가지고 태어날 뿐이었다.
‘다이앤타는 특별해.’
수많은 변수를 꿰뚫고 몸의 1/4가 악마로 되어있었다. 이제 보니 그런 혈통이 나온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드낙은 날이 지날수록 다이앤타에게 애정을 듬뿍 퍼붓고 싶어지고 있었다.
*
신제국의 황제가 자치 왕국에 왔다. 그가 온 것만으로도 자치 왕국은 큰 대접을 해줘야 했다. 물론 세파리아스는 그냥 대접만 받으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4명의 공왕에게 선물을 건네줬다.
서로 금과 금을 나누었다. 거기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는 건 시민들이었다.
황제가 오면 돈이 풀리고, 축제가 벌어진다.
반면 공왕들 또한 손해가 아니다. 황제가 주는 선물만으로도 해결 가능한 축제였다. 거기에 시민들의 스트레스와 불만을 줄일 수 있었다.
즉, 황제가 오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공식이 발생한다. 자연스럽게 신제국의 평가가 좋아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자주 오세요?”
“결혼하고 나서 점점 날 홀대하는구나. 세리안.”
그렇게 말하는 세파리아스의 말 속에는 분노 하나 없었다. 오히려 따뜻함이 묻어났다. 남의 자식 목을 찔러 죽이는 미친놈도 자기 자식 앞에서는 따뜻한 아버지 노릇을 하는 법이다.
물론 세파리아스는 두 번째 삶을 살아가기 전에는 자식 앞에서도 철혈의 지배자였다. 그게 지금에 와서야 서서히 풀어져 있었다.
“아버지도 많이 변하셨으니까요. 다이앤타, 왜 그렇게 내 뒤에만 있어? 인사드려야지.”
“헤헤.”
세리안의 뒤에 있던 다이앤타가 옆으로 똑바로 서며 인사를 올렸다. 붉은 머리카락은 불파겐의 혈통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점점 붉은빛이 감도는 게 심해지는 눈동자였지만 그래도 확실히 녹안(綠眼)이 개화된 상태였다.
나이가 들수록 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엘프의 녹안은 훌륭히 악마의 피를 제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잘 지냈느냐? 나이도 어린데 벌써 숙녀가 되었구나.”
“악마의 힘 때문이죠. 그래서 요즘 성교육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어요.”
몸은 성인인데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게 다이앤타였다. 살아간 시간이 너무 적어서였다.
“쓸데없는 걱정이로구나.”
“여자니까, 남자는 제대로 만나야죠.”
그 말에 세파리아스는 왠지 조금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세리안은 너무나도 냉혹했고, 차가웠는데 딸 때문에 아주 못사는 엄마가 되어버려서였다.
‘인간은 변한다. 그렇기에 아름답다.’
신이 되어도 인격신(人格神)으로 남아 그 인간적 면모는 여전할 것이다.
“그래도 쓸데없는 걱정이다.”
포악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접근하는 남자가 있을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나중에 데릴사위가 어떤 기질을 지녔는지 벌써 알만했다.
문(文)을 숭배할 것이고, 강한 여자에게 휘둘리기 좋은 자일 것이다. 심약하면서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사고는 안 치는 그런 소극적인 남자가 다이앤타의 배우자가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씨앗을 낳기 위한 남자인 셈이다.
“요즘에는 뭘 하고 지내느냐?”
양지가 바른 곳에서 꽃과 풀 내음을 맡으며 티타임을 가졌다.
“차원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쁘죠. 고급 인력을 배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서요. 아카데미를 여럿 설립했지만, 졸업자가 적게 나오는 편이에요.”
“절대평가가 아닌 거냐?”
“절대평가에요. 그저 허들이 높을 뿐이죠.”
세리안은 고급인력을 만드는 것에 투정을 부렸다. 차원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몰랐기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듯했다.
“신제국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자주포만 계속 만들고 있다. 단기, 장기일지 모르면 화력을 높이는 게 최우선이지.”
“아.”
세리안이 작게 소리를 냈다. 그야말로 맹점을 찔려서였다.
“과연, 아버지세요. 확실히 자주포는 오크와 드워프들 덕분에 계속 발전된 기술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남의 기술을 다른 자원을 쏟아부어서 구매하는 격이다. 그렇기에 효과가 뛰어나다.
“다이앤타는? 요즘에 뭐하느냐?”
“헤헤. 공부요.”
“공부? 싫어하는 게 아니었느냐? 그럼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아니에요! 이번에 내기하기로 했거든요! 반드시 이겨야 해요!”
“내기?”
“크레시미르 왕자와의 내기에요. 제가 그렇게 엮이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자꾸 시비를 건다니까.”
“네가 자꾸 만나니까 그렇지.”
모녀가 서로 티격태격했다. 그 모습을 세파리아스가 흥미롭게 쳐다봤다.
‘이상하군.’
다이앤타는 악마적인 성격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손녀는 결코 크레시미르와 경쟁할 수 없었다. 이기지 못하는 분야가 많기에 무시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게 일반적이다.
‘세리안이 부추겼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기 마련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내기를 하기로 했느냐?”
“<전쟁의 비(Rain of war)>! 30cm짜리 피규어로 하는 싸움이요.”
상용화는 안 되었지만, 자치왕국의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의 위치는 높다. 당연히 알아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데. 나도 참관해도 되겠느냐?”
그 말에 세리안이 감탄했다.
“와주시면 고맙죠. 이번에는 다이앤타가 이길 것 같거든요.”
“그래? 이유는?”
“어쩜 불파겐을 그렇게 잘 이어받았는지, 기병 놀리는 솜씨는 탑이에요.”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그렇지! 기병을 잘 써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지! 꼭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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