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5 -->
판타지 월드
드낙이 땀을 흘렸다. 양피지에 미친 듯이 써내려가는 그의 손은 수전증 환자처럼 떨렸다.
‘오션 오크 선박 파견단에 속한 천 명의 엘프들을 가만히 놓게 한다면, 최장 10년 동안 사라지는 잉여 마력과 노동력이 너무나도 한(恨)이 된다.’
머리를 굴린 대가는 혹독하게 찾아왔다. 드낙은 서서히 이것이 중립신의 안배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혹여나 잘못되어도 드낙이 제대로 된 차원 지배자로서 태어나지 않게 끝없이 방해하고 있었다.
중립신의 그림자.
그건 드낙이 정신을 차릴수록,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와서 그 목을 움켜쥐는 귀신과도 같았다. 드낙은 제갈량을 떠올렸다. 죽어서도 사마의를 돌려보내고, 한 방 먹인 그의 위대함은 이제 중립신의 모습을 통해서 보였다.
‘크크크.’
보기에는 냉철하지만 결국에는 복수에 눈이 먼 세파리아스에게 현혹당해서 내달렸던 자신이 후회되었다. 중립신은 차원 운영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애초에 그렇게 하려고 모든 걸 조정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할 줄 알고?’
1천 명의 엘프가 만들어내는 생산성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5년 10년 오션 오크와 지낼 것이다. 매번 엘프들은 파견단의 인원을 바꾸며 휴양을 즐길 터였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시간은 흐르고, 차원 밖의 존재는 생각보다 강대할 여지가 있었다. 그 전쟁 속에서 이 차원을 끝없이 유지, 보수 해나가며 <지구>로 향하는 문을 열어 문화적 교류를 한다는 평화로운 생각은 이미 걷어찬 지 오래였다.
춘추전국시대나 다름없는 게 현재 차원 상황이었다. 이를 드낙은 보지 않았음에도 알고 있었고, 실제로 느끼지 않았음에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사냥꾼이 곰의 변을 보고 놈이 식인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아는 것처럼 꿰뚫어볼 수 있었다. 활의 너머, 화살의 너머. 숲과 나뭇잎을 지나 목표물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눈처럼.
드낙이 양피지를 돌돌 말았다.
“뿔쥐는 거기 있느냐!”
“뜨낙!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을 뵙습니다.”
피숨결을 거침없이 내뿜으며 뿔쥐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무릎을 꿇었다. 드낙이 그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진행하라.”
“뜨낙!”
뿔쥐가 고개를 조아리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 뿔쥐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낙은 거기를 보지 않고 술을 몇 병이나 꺼내 들며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손을 떨었다.
“크으! 이 맛도 좋지만 역시 난 소주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들은 뿔쥐가 귀를 쫑긋했다. 소주. 매번 홀로 술을 마실 때마다 반마반신이 그리워하는 술이었다. 진땀이 날 정도로 노가다질을 하고, 소주에 돼지국밥을 먹을 때 느꼈던 그때의 그 지독하고 끔찍한 삶은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벌컥! 벌컥!
술을 미친 듯이 입에 털어 넣는 드낙에게 뿔쥐가 이내 보고하였다.
“반마반신이시여. 이계인들이 움직였습니다. 드워프 제국에 사달이 났다고 여겨집니다. 마신이 궐기했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한 정보는 없느냐?”
“하루에서 이틀 내로 드워프 제국 쪽의 정보 또한 이곳에 닿을 것입니다.”
“그럼 그때 이야기하라. 제아무리 마신이라고 해도 드워프들이 있지 않느냐? 내가 차원전쟁을 괜히 했으려고.”
그 말에 뿔쥐의 코에 달린 긴 털이 꿈질거렸다.
‘평상시의 반마반신이 아니시다. 왜 이렇게 지쳐 보이시는 거지?’
“꺼어어어억!”
크게 트림을 한 드낙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이런...’
독한 술을 수백 병이나 마신 상태였다. 반신이라도 안 취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억지로 해독하지도 않았다. 뿔쥐는 결국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전까지 드낙이 노력해서 쓴 양피지는 피숨결 검은 뿔쥐의 손에 의해서 오션 오크 쪽으로 전달됐다.
그 명령서를 본 오션오크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제대로 된 차원 전쟁 대비가 시작되는 것 같군.”
대족장 규르소모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지나칠 정도로 드낙은 오크들에게 <큰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크들은 일단은 바다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오크 인구의 증가를 위해서였다.
그 덕에 오크들의 개체수는 대단히 많아진 상태였다.
염장한 생선만으로도 엄청난 식량 가치였다. 염장한 건 또 조금 태워서 구이로 먹으면 또 맛이 살아나기도 한다. 산뜻한 과일을 뿌려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면 밋밋한 식물에 싸서 먹어도 좋다.
크고 작은 생선을 그냥 다 때려 넣어서 염장해버려서 오크들에게 보급하는 것만으로도 오크들의 식량사정은 기존의 250배는 더 이득을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식량 혁명이 일어났다.
인류 또한 강에서 살며 어업을 통해서 큰 이득을 본 것처럼 오션 오크는 <흰등 가시혀 육식고래> 등 수많은 해양 괴물들로부터 막대한 식량을 챙기고 있었다.
<군 달라인(깊은 바다, Gun dalain)>이라는 이름을 지은 호위함(Frigate) 덕분이었다. 그 덕에 수많은 어선이 우후죽순처럼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반마반신, 드낙이 움직였다.’
오크에게 제대로 된 명령을 하달했다. <종족 연합>에 소속된 이후로 그저 발전만을 이룩하고 있었던 오크에게 쥐어진 첫 번째 미션이었다. 다른 종족이 하는 사업을 도우라는 말은 많았지만, 기존에 하던 자주색 주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천 명의 엘프가 오는 것과 딱 떨어집니다.”
“겉으로는 경박해도 속은 깊다는 것인가. 무섭군.”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아니겠나?”
“어찌 되었건 바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지 않았나? 중요한 건 숲이지 나무의 방향성이 아니야. 때로는 나무가 기괴하게 자라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숲인 것이지.”
주술사들이 한 마디, 두 마디 툭툭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며 대족장 규르소모스가 크게 웃었다.
“뭔 있는 척을 해! 맨날 반마반신이 미친 워터파크 토목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고, 난리를 쳐놓고서는!”
“에헴!”
“커흐허허험!”
주술사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돌렸다. 드낙이 뭐 한 번 픽 어긋나면 신나게 떠들면서 우리 오크 최고라고 외치고 다녔던 게 그들이었다. 내부를 다지기에는 외부를 욕하는 것이 아주 좋았다.
자부심을 얻기 좋아서였다. 평범함이 자부심으로 변할 수 있었다.
“명령서의 내용은 간단하다. 차원 전쟁을 대비하여 초장거리 요격 미사일을 탑재한 거대 함선을 제작하라는 소리다. 엘프 천 명의 기술자가 있으니, 능히 가능할 터다.”
“그 함선의 이름도 혹시 있나?”
“당연하지. 그리고 제법 그럴듯하다.”
규르소모스가 거대한 손으로 양피지를 폈다. 주술사가 주문을 읊어서 이를 베껴서 짙고 거무튀튀한 녹색빛으로 허공에 띄웠다.
“반마반신의 글솜씨는 너무 거칠기 짝이 없군.”
“왜 이렇게 급하게 썼지?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다급함이 느껴지는 필체야.”
주술사들은 드낙의 필체를 두고 잡담을 떠들었다. 그만큼 격렬한 필체였다. 피맺힘마저 느껴졌기에 예술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반면 대족장 규르소모스는 무덤덤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롱쉽(longship) 혹은 드래곤쉽(Dragonship)이라 불리는 물건이다.”
“지나치게 길지 않습니까?”
“상대가 정면에 있다면 맞추기 힘들지. 측면이 아쉽지만, 솔직히 말해서 강점이 하나 있는데 굳이 그걸 직사각형으로 만들 이유는 없다.”
대족장의 말대로 드래곤쉽은 지나칠 정도로 길쭉했다. 하지만 폭은 좁았다. 그런데도 거대했기에 폭은 50m에 달했고, 길이는 1200m가 넘었다.
“층수는 5층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엘프가 없으면 만들 수조차도 없다.”
철갑선이고 호위함(Frigate)이기도 한 <군 달라인>을 만들어봤고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지만 그건 길이가 고작 60m에 불과했다. 그것의 20배가 넘는 미사일 함선을 만드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하지만 그런 욕심도 엘프 천 명이면 가능하지.”
“맞습니다. 거기에 이건 <자주색 주포>와는 또 다른 무기 체계입니다. 아마 공중 요새를 만들고 있는 뿔쥐들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드낙의 아이디어였지만 오크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이미 뿔쥐들에게 오크 통나무를 수출하고 있으니, 우리 또한 오크 통나무 미사일을 뿔쥐에게서 수입 받으면 그만 아닙니까?”
“되려 공동 개발도 할 수 있겠지.”
오크들이 키우는 오크 나무는 똑같이 따라 해도 그 오크 나무가 안 된다. 강철과도 비견될 수 있는 나무가 바로 오크 나무였다. 그렇기에 뿔쥐들과 <통나무 미사일>을 공유한다면 능히 미사일 관련 부분에서는 걱정을 크게 덜어도 된다.
“이 드래곤쉽의 이름은 노군 탱거(녹색하늘, Nogoon tenger)다.”
하늘을 뒤덮는 미사일의 향연. 그리고 그 미사일의 길이는 10m가 넘게 설정되어있었다. 하지만 길쭉할 뿐, 세워서 적재하면 말 그대로 엄청난 화력을 한 번 뿜어낼 수 있었다.
걸어 다니는 주술고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차원 전쟁에서 톡톡한 활약을 할 수 있었다. 길이도 긴 만큼 사정거리 또한 길 수밖에 없었다.
“그 엘프들은 놀려고 왔을 텐데, 아주 끔찍한 노동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흐흐흐.”
“하하하.”
오크들 또한 좋아할 만한 계략이었다. 다른 종족이 자신들을 위해서 노동한다? 재미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오크들도 열심히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점점 바다로 나갈수록 힘에 부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자색 주포는 힘의 크기에 따라서 화력이 결정되는 편이지.”
드워프, 오크가 힘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통나무 미사일의 경우에는 지하 연합과 오크가 합쳐서 만드는 것이다.
드워프의 손길은 한계가 있었고, 오크의 <자색 주력> 또한 주술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효율성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즉, 더 강한 파괴력을 위해서는 그냥 더 많은 힘을 넣어야만 했다.
화약 한 줌으로 천둥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반면 통나무 미사일의 경우에는 일단 미사일의 형태, 오크 나무에 많은 걸 새겨넣을 수 있었다. 고로 발전 가능성도 컸다.
이를 사용하게 될 <노군 탱거>는 확실히 강력한 함선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강한 해양 괴물도 골로 보낼 수 있었고, 강한 해양 괴물이 몸을 쳐도 쉽게 전복되지 않는다. 측면이 위험하다고 해도 덩치가 있고, 무게가 있었다.
“반마반신의 명령서를 보여주면 엘프들도 찍소리 못할 겁니다.”
“크크크.”
“킬킬킬.”
오크 주술사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
깊은 심연으로 드워프의 피가 흘러내렸다. 오벨리스크에게 많은 드워프가 죽었고, 그들의 피는 모조리 오벨리스크로 들어갔지만, 마신의 오벨리스크의 지배력보다 더욱 강력한 끈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투둑. 툭.
걸쭉한 드워프의 피가 떨어져 내리고, 이내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찾지 못하는 깊은 심연 속에서 중립신, 엘 마르토 카사다민이 눈을 떴다.
한 번의 죽음으로 이곳에 이미 와본 적이 있는 그였다. 두 번째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로 이곳에 그를 오게 하였다.
‘차원 전쟁이 일어났나? 모르지.’
드워프의 피는 극히 일부만 중립신에게로 흘렀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판단은 불가능했다. 누군가에게 흡수당하고 그 찌꺼기만 이곳에 흘러들어왔을 수 있었고 그냥 죽어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일 수도 있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인가.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때>는 지나고 <시대>가 변했다.’
남은 힘도 없었다. 드낙의 끈처럼 운 좋게 그런 게 손에 들어오면 몰랐지만, 그 기회가 언제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중립신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런 안배 따위 얼마든지 곳곳에 뿌려두었다.
드워프의 피 속에 얽혀있는 마신의 존재 또한 느꼈다.
‘마신의 지배력은 무섭지.’
오우거조차도 아래에 둘 수 있는 자신감은 마신이 가지고 있는 힘, <지배력>에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게 마신이고, 강대한 힘을 지닌 것이 마신이었다. 가만히 두면 검버섯처럼 삽시간에 퍼지는 질병이었다.
그 속에서도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게 마신이었기에 상대는 폭우에 옷 젖듯이 한순간에 훅 가버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중립신은 그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드낙이 신격을 획득하기 전에 기회가 찾아오면 나도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끝나면 방법이 없다.’
중립신은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힘이 필요했다.
깊은 심연 속으로 중립신이 더욱 가라앉았다. 지금은 모든 것을 숨겨야 할 때였다. 동시에 중립신이 눈을 뜬 순간부터 드낙의 손길을 받지 않은 인간들의 업이 중립신에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권속 악마가 되기 전에 드워프가 죽어서 천만다행이다. 이런 행운이 나에게 찾아오다니...이건 헛된 희망인가, 아니면 세상이 아직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건가.’
중립신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드낙이 자신을 배신한 것? 그런 것에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미래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
[작품후기]
6041자
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