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884화 (883/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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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크레시미르 불파겐.

그의 어머니는 레이시아 플래티넘이고, 그의 아버지는 드낙 불파겐이다. 그리고 그는 악마의 힘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 또한 드낙의 피를 이어받아서 악마의 피가 조금은 있지만 <쿼터 데몬>인 다이앤타 불파겐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 많은 것을, 그 모든 열등감을 불사르는 장작이 되었다.

허나, 결코 불사조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자신을 새하얗게 태우는 장작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장작은 언젠가는 꺼지기 마련이다.

꽈악.

크레시미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는 타버린 재 같은 모습은 하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만인(萬人)을 위해서 봉사하는 신전의 총애를 받는 레이시아 플래티넘의 아들이고, 장남이다.

부모님의 후광(後光)을 보고, 그 덕을 보기 쉬운 게 자식이다.

재벌 2세만 해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데도 크레시미르는 재벌 2세 같은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의 라이벌은 다이앤타 불파겐이었다. 고로, 타오르는 장작은 꾸준히 새로 생겨났고, 추가되기 바빴다.

“수고하셨습니다. 일취월장하는 모습이 잘 보입니다.”

검술을 봐주는 기사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직 20살도 안 된 크레시미르였지만 그 또한 불파겐의 피를 이어받은 혈육. 거기에 세파리아스가 관심을 보인 무인(武人)이었다.

주변에 주저앉은 기사도 하나 있었고, 노기사들은 서로 모여서 싸움에 대해 의논을 하기 바빴다.

“자세? 자세가 나쁘기는...그런거 따지면 사람 근육부터 새로 잡아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네가 신황제라도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신황제는 그런 건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신경 안 쓰겠지! 시작부터 괴물이니까!”

“크레시미르 전하도 괴물이다. 20살 전에 기사 3명과 싸운다는 게 말이 돼?”

“불파겐이니까, 가능한 거지.”

툭하면 의견이 충돌했다. 늙으면 자존심 세우기 바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왼쪽에 대한 대응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하단이지.”

“모든 검사가 그렇지 않나?”

무기 쓰는 사람치고 왼쪽 하단에 대한 방비가 능숙한 이는 드물었다. 아무리 해도 결국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었다.

“좌수(左手) 기사를 호위로 쓰는 게 좋지.”

그것을 대비하는 방안으로는 자연스럽게 왼쪽에 대한 방비가 좋은 좌수 기사를 쓰는 것이었다. 황당한 논리였지만 그 외의 해결방법은 전무했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단점이 있으면 패왕녀(覇王女)에게 승리를 따내지 못하겠죠.”

물을 마시며 그 말을 듣던 크레시미르가 말했다. 그 말에 너도나도 딴소리했다.

“이미 패배한 왕녀를 왜 찾으십니까? 이미 다 끝난 게임이죠. 지금 자치왕국을 보십시오. 모든 이들이 만왕자(萬王子) 전하가 진정한 후계임을 다 알고 있습니다.”

“대련에서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상대가 추진한 대련에서 말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다시 싸운다면 제가 패배할 것임을 상대도 알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일찍 승부를 냈죠. 꿍꿍이가 있으니까요.”

크레시미르가 먼 곳으로 시선을 뒀다. 하늘은 끝이 없었지만, 기분은 절대 좋아지지 않았다.

달려나가도.

뛰어나가도.

언제나 제자리인 것 같았다.

‘상위인간이 되고, 반신격을 지나 신격을 획득한다고해도...’

이미 시작선상이 다른 여동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도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크레시미르를 따르고 있었다.

자신이 그저 ‘싫다.’고 하며 물러가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 어깨에 짓눌리는 크레시미르는 결코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자고 있어도.

깨어 있어도.

끝나지 않는 영원한 족쇄였다. 그리고 그 족쇄는 ‘족쇄’라고 불리지 않고, <충성>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었다. 충성을 통해서 크레시미르는 왕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신분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그가 죽지 않는 이상은 벗을 수 없는 옷이다.

새벽부터 오전까지 이루어진 무술 단련을 마치고, 식사했다. 식사에는 언제나 가족끼리 모여서 했다.

“아바마마께서는 오늘도 안 계십니까?”

크레시미르의 말에 레이시아 왕비가 부드럽게 웃었다.

“만인을 위한 분이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오늘도 몸을 단련하셨다고...”

“네. 적어도 한 번 이긴 상대에게 또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물론, 상대는 그런 생각이 없겠지만요.”

“스스로 자처하여 2등이 되고자 하는데, 왜 그렇게 집착하십니까?”

레이시아의 말에 크레시미르는 포크를 놓았다.

“너무 많은 이들이 저를 따르고 있어서입니다.”

그녀 앞에서는 크레시미르는 솔직했다. 레이시아의 그릇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컸다. 자기편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살았기에 지금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그녀는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오면 오는 것이고, 가면 가는 것이며 그 순간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걸 하면 될 일이었다.

“그것이 즐거울 때는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그것이 힘들 때는 다른 방법을 찾아도 괜찮습니다.”

“글쎄요...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왕자가 아닌 크레시미르? 상상하기 힘들었다. 다만, 크레시미르는 자신에게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큰 안도가 되었다. 정말 모든 게 부러졌을 때, 만능의 왕자라 불리는 자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는 되돌아갈 곳이 있었다.

“도망이 아니라, 물러서는 것이지요.”

“아바마마도 도망은 칠 수 있을 때 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야 다음이 있으니까요. 고기 요리는 입맛에 맞는가요? 제가 오랜만에 요리했습니다.”

“왕비께서 그런 일을 하시면 밑에 사람들에게 얕보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레이시가 한가득 웃었다. 어찌나 무게를 잡는지, 매우 진지했다.

‘사춘기가 왔구나.’

왕자에 대한 화두(話頭).

그 속에서 크레시미르는 권력과 보이지 않는 책임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끝에 어떤 자신을 만들어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도와준다고 하면 어긋나고. 조언해준다고 하면 딴 길로 새는 것이 자식 농사.’

레이시아가 샐러드에 손을 가져갔다. 이때 드낙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극과 극을 달리는 남편이었다.

점심 이후에는 법과 제도를. 그리고 처세를. 경제를. 마지막으로 자치왕국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3달에 한 번씩 바뀌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을 겪어보기 위해서였다.

그 속에서 크레시미르는 빠르게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꽃피웠다. 만개(滿開)하는 만개의 꽃봉오리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황금의 길을 걷는 왕자의 모습은 기득권층에게도 큰 안도를 주기에 충분했다.

레이시아와 세리안은 드낙에게 가장 신뢰받는 부인들이었고, 틈틈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기도 했다. 특히 레이시아는 자식만 셋이고, 세리안은 둘이나 가지고 있었다. 모두 드낙의 허릿심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쪽지를 보낼 때는 일단 운동남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처럼, 세리안은 운동녀였고 레이시아는 귀품이 있어서 언제나 봐도 좋은 여자였다.

최근에는 드낙도 밤기술이 좋아졌는데, 하나하나 열심히 경험치를 올려서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가 되었다. 결국 순풍산부인과 여러 편 찍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의 사이는 여전히 안 좋았다. 그런데도 서로 마주치기는 자꾸만 마주쳤다. 인과율이 있는 건지, 그냥 서로 악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틈만 나면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 일쑤였다.

“여기는 내 단골집인데...”

“내가 먼저 왔는데...”

술집을 앞에 두고 양측이 떡하니 섰다. 가장 피크 타임이 시작되는 해질녘에 하필이면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가 술집을 하나 두고 섰다.

신분을 생각하면 결코 올 수 없는 지나치게 클래식한 곳이었다. 어찌 된 술집인지 간판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유명했다. 두툼한 돼지 스테이크 위에 놓이는 꿀통 세례!

그 퍼포먼스는 보기만 해도 박살 나게 재밌는 요리였다.

“저...서로 양보하시면...”

입구를 지키는 덩치가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 수십 명의 눈총을 맞아야 했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을 끌고 온 것이 두 사람이었다.

한 걸음을 옮겨도 같이 옮기고, 몸이 부딪쳤다. 힘으로 밀리는 건 크레시미르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크레시미르가 무릎을 조금 움직이자, 다이앤타가 뒤로 빠졌다.

뭔가 걸려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인원수도 열다섯 안팎인 것 같은데, 공주는 1층에서 먹으면 되지 않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당연히 2층이 상석인데 제가 왜 1층으로 제 사람들을 이끌고 가야 하죠?”

강렬하게 서로 부딪치려고 했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죽을 맛이었다. 부딪쳐봤자 이득이 없어서였다.

크레시미르 측은 하루가 다르게 강맹해지는 다이앤타와 본격적으로 싸우고 싶지 않았고, 다이앤타 측은 일단 터지면 엉망이 되는게 다이앤타의 행보였다.

몇몇 이들로부터는 리틀 드낙이라는 칭호까지 얻은 게 다이앤타일 정도!

“왕자님. 여기서는 어른스럽게 행동하셔서...”

“공주님. 그래도 오라버니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결국 서로 몸을 거칠게 돌렸다.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흥! 운이 좋은 줄 아세욧!”

서로 물러갔다. 그사이에 끼여서 결국 양측 손님 모두를 잃은 주인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등이 터져도 이렇게 등 터지는 건 또 처음이다.

*

세파리아스는 여전히 <국제 연합 도시>에 있었다.

전쟁, 전투.

이런 거 나오면 사족을 못 쓰는 게 세파리아스였다. 겉으로는 부정해도 속은 뼛속까지 정복자의 기질이 있었다. 심지어 그가 지금 그리는 <차원 독립> 또한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로 인간들을 이끌고 있었다.

물론, 대의명분은 존재했다.

인간은 그저 초월자에게 있어서 업의 재료에 지나지 않았다. 상위인간도 아닌 인간의 힘으로 그들을 처단한다.

막상 들으면 가슴이 뛰고, 숭고한 임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실상은 그저 피떡이 되어서 대지에 죽어가는 인간의 숫자를 늘릴 수밖에 없는 피의 길이었다.

이를 세파리아스는 충분히 알고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피규어 병정놀이. 이거라면 그 피해를 3/10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

전쟁터의 사망자 중 7할이 신병이다. 신병 중에서 살아남으면 제법 오래 살 수 있을 때도 있다. 고로, 그 신병 시절을 시뮬레이션으로 패스할 수 있다면?

병사 하나하나가 전부 간부급 베테랑 병사가 된다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효율성이다.’

결국 돌고 돌아서 효율성이었다. 그 때문에 세파리아스는 되돌아가지 않고 아예 공장에 눌러앉은 상태였다.

“누추하지만 먹을게 이것뿐입니다.”

드워프들은 이를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 수작질을 부렸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먹을 것이었다. 식사가 개 같으면 폭동도 나기 쉽다. 밥이라도 잘 나오면 개 같은 중소소기업에서도 1년은 버틸만했다.

그런데 밥이 맛이 없다? 허둥지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전쟁의 시대.

그곳에서 태어나 피와 권력 그리고 재능으로 승부한 세파리아스의 삶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호화로운 궁전은 고사하고, 항상 전쟁터를 누벼야 했다. 그건 한 영지의 영주라고 하기에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삶이었다.

“맛있군.”

간도 안 된 육포도 쉽게 먹을 수 있었고, 돼지 비린내가 심한 야채 스프도 남김없이 먹었다. 그 모습은 되려 사람을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 뒤로 다시 정상적인 음식이 나왔다.

이를 세파리아스는 나무라지 않았다.

하나의 자잘한 실수와 잘못을 강하게 짚어 넘어가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이 없었다. 또 권력자일수록 한 번 참는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좋았다.

“마력 피부를 만들어서 덮어씌워 그게 다 사라지면 죽은 것처럼 하는 건 어떤가? 시도해봤는가?”

자연스럽게 세파리아스는 오크 주술사들과 효율성 논의를 따졌다. 일단 <초월의 힘>이 가장 먼저기 때문이다. 다만 돌아오는 건 아쉬운 소리뿐이었다.

“주술 체계가 아직 마법처럼 잘 잡혀있는 게 아니라서 힘듭니다.”

“마법사가 있다면 가능하다는 소리군.”

불가능한 소리나 다름없었다. 드낙이라면 가능했지만 세파리아스의 손에 있는 마법사는 많았지만 모두 제 할 일이 있었다.

‘단순히 크기를 줄이면 되겠지만, 그래서야 제대로 된 전투 맛을 못 본다.’

드낙은 <피규어 경기장>을 구경하여 스포츠 문화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세파리아스는 달랐다. 직접 피규어들 사이에서 전투를 경험한다면, 베테랑을 쿵쿵 도장 찍듯이 만들 수 있었다.

그가 그런 걸 선택할 리가 없었다.

‘다른 선택지는...’

세파리아스의 눈이 반짝였다.

‘드낙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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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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