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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그 문제는 매우 중대하며, 대단히 접근하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설 날.’
연휴를 앞두고 받은 보너스는 예나 지금이나 30만 원도 안 되어야 할 텐데, 사장이 무슨 이유인지 500만 원을 줬다. 그런데 설날이 끝나고 회사 사정이 급하다고 그 500만 원을 회수하려고 하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지금 드낙이 하려는 일이었다. 포낙서스의 조언을 무시하기에는 일단 ‘초월자’에 올라서야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이유. 이상하고 괴이한 ‘신성력’ 때문이다. 그게 드낙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고, 그의 보전 주의를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이 위기감에서 벗어나려면 초월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혹은 세빨이가 빨리 신이 되던가.’
초월자가 된 세파리아스는 위협적이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 또한 드낙을 굳이 죽이려 하고 있지 않았다.
‘힘의 차이가 생기더라도 내가 곱게 잡히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투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세파리아스의 앞에서 방심할 드낙이었지만, 사실 세파리아스의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고로, 방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워낙 존재감이 대단한 대영웅(大英雄)이기 때문이다. 그를 앞에 두고 조금이라도 긴장하지 않는 놈이 있다면 그건 좀 정신이 이상한 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후우!”
드낙은 고민하면서도 결국 엘프들의 땅에 도착했다. 그곳은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는데, 가장 먼저 중앙집권적 도시가 존재했다. 본래는 점조직처럼 적당한 도시를 통해서 엘프를 분산시켜서 틀딱 엘프들이 관리하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친환경적이네.’
서울보다 더 나무가 많은 도시가 엘프들의 <중앙 도시>였다. 끝도 없이 높은 탑에는 나무와 넝쿨이 초록잎을 무성하게 퍼뜨리고 있었고, 계획적으로 지은 깔끔한 도로의 양옆에도, 집조차도 나뭇잎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집 위에 정원도 많았다.
마력(魔力)이라는 소비 자원을 자연적으로 회복하는 엘프들은 개개인이 얼마든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게 가능했다.
여유가 있는 삶 속에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서 <다종족 연합>의 일익(一翼)이 되고 있는 게 디아볼로스와 타락 엘프였다. 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드낙의 존재감을 느꼈다.
세계마저도 속일 수 있어서 물질이 아닌 파동으로 존재할 수 있는 드낙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엘프들은 그게 가능했다. 사실 귀만 달려있으면 누구나 가능했다.
콰르르릉!
번쩍!
표절 벼락등장을 일으키며 드낙이 엘프들의 중앙도시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는 외곽에 계속해서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배양소를 통해서 수많은 <디아볼로스>들이 탄생하고 있어서였다.
타락 엘프를 배양하지만, 그들이 아기 때 업을 소매 넣기 해서 디아볼로스로 만들고 있었다. 그 덕에 엘프들의 표정은 느긋했다. 짬처리는 틀딱 엘프 사회의 고유한 전통이었다.
이제는 업을 짬처리하기 바빴지만 조금 더 나이를 먹게 된다면 이것저것 다른 것도 짬처리하게 될 터였다. 이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외부 세력이 필요했고, 그게 드낙이 될 수 있었다.
“무, 무뭄, 무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밝은 새벽의 룩산드라(Ruxandra)>, 18인의 벨룸 퓨에르(bellum puer) 중 1인이고 가장 열정이 있는 엘프 지도자 중 하나였다. 그녀 덕분에 엘프는 중앙 도시라는 거대한 도시 한 곳에만 거주하는 것을 결의할 수 있었다.
중앙 분수의 수질을 습관적으로 확인하며 하루를 점치는 독특한 꼰대기질을 가진 룩산드라가 화들짝 놀라는 걸 보고 드낙은 절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역시 엘프들이다. 내가 이놈들 피와 업을 내놓으라는 걸 예상하였구나.’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종족 연합 중에서 종족값이 가장 높고, 뿔쥐와 동등하게 권속 악마로 탈바꿈이 된 디아볼로스에 닿은 것이 엘프들이었다.
만약, 드낙이 힘의 부족이나 업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게 된다면 자신들을 찾아오는 게 당연할 정도로 지표는 엘프를 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룩산드라는 X됐음을 직감했다.
‘들켰구나!’
업 소매 넣기.
결국, 그게 들통 난 것이 분명했다. 드낙에게 줄 수 있는 업은 한계가 존재했는데, 이상함을 알아차릴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변동’은 ‘변수’를 만들어내고 드낙이 움직이게 할지도 몰랐다.
드낙에게 변수를 주는 건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드낙을 만나면 화산 폭발이다.
그렇게 여기는 이들이 열 명 중 열 명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드낙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태풍을 불고 오는 드낙의 등장은 도둑이 제 발 저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너희에게 중대히 할 말이 있다. 여기서 가장 큰 회의소가 어디냐.”
“중앙 도시의 북쪽에 임시 대회의소가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곳에 중앙 도시의 80%가 넘는 엘프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좋다. 최대한 그곳에 엘프를 많이 모아라. 대의를 논해야 할 때가 왔으니.”
드낙의 너무 진지한 모습에 룩산드라가 절로 침을 꼴깍 삼켰다. 보통 사단이 아니고, 그 사단은 자연스럽게 새로 태어나는 디아볼로스의 이상하게 많은 숫자에 대한 것이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검은 잔을 받은 타락 엘프로 시작해야 할 배양소의 엘프 아기들이 정신 차려보니 디아볼로스로 인생을 스타트 하는 셈이다. 그건 확실하게 보이는 데이터였다. 유의미한 정보였고, 이를 드낙이 내뱉는다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깔 수밖에 없는 게 엘프들이었다.
그렇기에 룩산드라의 표정도 안 좋았다. 이를 본 드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인이 된 것 같다.’
특히나 약자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게 드낙이었다. 권고사직을 받은 22년 차 과장의 표정이나 다름없는 룩산드라의 표정에 드낙 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드낙은 위기 속에서 가장 이기적인 자였다.
‘강행할 수밖에 없다.’
드낙이 벼락이 되어서 단번에 사라졌다. 물론 보이는 것만 그럴 뿐, 실제로는 세상을 속여서 단번에 이동하여 룩산드라가 말했던 임시 대회의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의회당처럼 보였다.
다만 특이한 것은 테이블이 하나씩 있다는 점이었다. 그곳에는 마법이 담겨 있는데 드낙이 이를 손으로 접촉해서 조사했다. 반마(半魔)의 격(格)이 단번에 마법의 정체를 파악해나갔다.
‘오프라인 투표제네. 여긴 직접 정치를 위한 장소인가.’
고통받으며 오로지 엘프의 위기에만 동면이 해제되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18인의 벨룸 퓨에르가 만든 최종적 엘프 정치 도달점이 바로 직접 정치였다. 모든 엘프들은 여유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고, 공부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고로 그들은 모두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이런 직접 투표제가 극한으로 운용될 수 있었다.
드낙이 엘프들을 기다리는 사이에 타락 엘프와 디아볼로스들은 뒤집혔다. 물론 그중에는 떳떳한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과 다르게 배양소의 아기들에게 업을 소매넣기 하면서 모두 공범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투표권 하나 없는 청소년을 위한 정치는 존재하지 않듯이 아무것도 모르는 배양소의 타락 엘프는 한순간에 디아볼로스가 되어버렸기에 너무나도 업 소매넣기를 하기 쉬웠다.
“이제 어쩔 생각이오!”
너도나도 남 탓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사령관 칼리스투스(Callistus)>이자 <아름다운 칼리스투스>라 불리는 자의 말로 그 소란은 일축되었다.
“무슨 걱정인가. 오지 않도록 염원했던 것이 왔고, 우리는 대가를 치르면 될 일이다. 우리의 종족값과 반마반신께 주는 업을 생각해봐라, 하루에 피 한 줌이라도 해를 넘길수록 많아진다. 이런 우리를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최소한 죽지는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들은 칼리스투스를 가장 앞에 세우고 침묵한 채 임시 대회의소에 들어섰다. 아직은 80%만 수용 가능하지만 테이블 위에도 서면 모두 수용 가능했다.
“잘 와주었다. 내가 이번에 이곳에 온 이유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칼리스투스는 생각했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구나.’
업 소매넣기를 매우 중대한 문제로 여기고 있음을 드낙이 먼저 말했다. 이는 이 사안에 대한 수준을 <가장 극도로 중요한 문제>라고 공표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해결책이 나와도 엘프들은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한 말씀 해도 괜찮겠습니까. 반마반신이시여.”
‘칼리스투스...’
드낙이 눈을 좁혔다. 역시 난 놈은 난 놈이었다.
‘내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서 어떤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엘프들로서도 벼랑 끝이다. 수많은 종족들이 내달리고 있는 경주 중에 주최측이 와서는 넌 500m 뒤로 가서 달리라고 하는데 그걸 수용할 선수는 없었다.
“......”
드낙이 말을 하지 못하자 엘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기가 무겁게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말하라.”
“후우...예.”
칼리스투스가 침을 삼키고, 입술에 침을 발랐다.
‘최대한 이 문제를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반면 드낙 또한 심호흡을 했다.
‘내가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알려야 한다.’
“그렇게 큰 문제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엉?’
*
아무리 세상이 평화가 도래했다고 해도 범죄자는 존재하고, 악은 언제나 꽃을 피운다. 5명이 함께하면 그중에 한 명은 머저리인 것처럼 악인 보존의 법칙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덕에 용병을 구하는 상인들은 대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오히려 늘어난 상태였다. 상업을 크게 중시하고, <지구의 자본주의>와 맞다이를 떠야 하기에 드낙이 특히나 상업과 경제 성장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숯숯마을의 용병업은 매우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돈벌이 수단이었다. 공업용 백탄부터 가정용 흑탄까지 생산하고 있으며 모래도 써야 했기에 1년이나 3년마다 오가는 인부들도 많았다.
1년 쌩고생하고 목돈 들고 하고 싶은 거 하러 가는 셈이다.
그 덕에 다른 파리들도 꼬이기 마련이었다. 쉐도우 위스퍼를 통해서 자정작용이 이루어지기에는 아쉬운 것이 드낙이 남부 왕국을 거의 버렸기 때문에 쉐도우 위스퍼는 최소한의 인력만 존재했다.
꼬리가 길어서 잡히는 놈들이 대다수였다. 정의구현은 되지만 피해자는 계속 생기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마저도 산업활동을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악인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사람들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은 단기 고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기적으로 사병을 보유하기에는 남부 왕국은 형편이 안 좋았다.
그 덕에 용병 사업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자치왕국처럼 상인들이 사병을 데리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상인이 적었다. 사실 부유해도 사병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아직은 돈을 쌓는 게 재밌기 때문이다.
쿵!
붉은 요새의 방패병 5명이 동일하게 방패로 땅을 찍었다. 그리고 방패 위에 둔기 하나를 척 걸쳤는데 그 각도가 5명과 완벽하게 같았다.
최정예 병사임을 척 봐도 알 수 있는 오와열. 그리고 자세까지. 가는 이들 모두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다섯 명의 최정예 병사가 서 있는 모습은 그냥 퍼포먼스나 다름없었다. 우리들 정말로 강하니까 까불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과도 다름없었고 기세도 대단했다.
마법사 1명에 사제 3명. 총 9명의 인조 생명체에 용병 지구인 4명까지 13명으로 이루어진 신생 용병단은 무경력임에도 불과하고 많은 상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아메리고 병장은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얼마까지 후려칠 생각인거야, 이 새끼들...’
벌써 가격 합의만 1시간 째였다.
“은화 8닢!”
“은화 9닢!”
“은화 8닢!”
“은화 7닢!”
문제는 아메리고는 아예 끼워주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로 북 치고 장구 치며 가격은 은근슬쩍 내리고 있었다.
‘꼴값떤다. 흐흐흐.’
다만, 아메리고 병장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되려 그걸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보다가 이내 상인들 중 이번에 자신이 맡겠다며 은화 5닢에 아메리고 앞에 선 상인에게 아메리고가 시동을 걸었다.
“은화 10닢.”
“은화 5닢으로 하기로 했잖나! 고개도 잘만 끄덕여 놓고서는 이러면, 안 돼!”
“은화 11닢.”
“지금 당장 출발을 해야 해!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건가?”
아메리고 병장은 아예 다른 상인들을 보며 외쳤다.
“은화 10닢에 최정예 중보병 다섯이 함께 갑니다! 손을 들어 올리시오!”
손드는 이들은 없었다. 이 바닥에 같이 종사하는 자들이다. 그 모습에 상인이 고소하게 웃었다. 반면 아메리고는 일그러졌다. 결국 돈을 내는 사람이 갑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 얼굴은 기억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 용병단은 숯숯마을에서 계속 활동할 거다. 두고 봐라.”
그 말에 상인이 헬쑥한 표정을 지었다. 척 봐도 이들의 구성은 정예였다. 커질 게 분명했고, 다른 용병단과도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 강하기 때문이다.
“은화 8닢에 합시다.”
결국 상인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아메리고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10닢은 받지 못했지만, 처음에 이 정도면 선방한 것이다. 특히 상인들끼리 너무 떠들어대서 체력을 소진한 게 유효했다.
아메리고 병장과 싸울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훌륭한 전술이었고, 이는 카실레안 교본의 힘이기도 했다. 칼과 창으로 싸우지 않는 상황에서도 전술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상대의 힘으로 상대의 힘을 소진하고, 그제야 나선다.’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라면 이런 바탕을 만들면서 스스로의 체력을 깎아 먹는 상황을 방관하지 않고 더 하라고 부추기는 게 중요했다. 시간은 버렸지만 결국 아메리고 병장은 <카실레안 교본>을 통해서 패배하지도, 승리하지도 않을 수 있었다.
“오케이,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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