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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자정이 넘은 시간.
신제국의 황제.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그 시간에도 집무실에 있었다. 그의 집무실은 천장이 대단히 높았고, 창문으로는 찬 공기가 불어왔다. 하지만 내부의 공간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마법의 힘이었다.
초인적인 신체능력과 ‘무(武)를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경지’에 들어선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기괴하고 괴이쩍게도 인간답지 않게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이미 그 몸과 마음 그리고 격(格)이 반신격에 들어섰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드낙과는 현격히 격이 오르는 속도가 판이하게 차이가 났는데, 그만큼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신제국의 인간들에게 보이는 명성과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드낙이 어디 방문하려 치면 일단 청소부터 하는 것과는 달랐다. 너도나도 세파리아스와 악수를 하고 싶어서 난리였다.
강인하지만 동시에 약자들을 대우해주는 세파리아스는 실로 어리석은 자들의 왕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 큰 집무실에 드낙이 불쑥 튀어나왔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 그림자처럼 들어왔다.
세파리아스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종이를 끄적이자 드낙의 존재감이 ‘영향무력(影響武力)’의 간극(間隙)에 들어오고도 그 간극의 1.5m 내에 더 비집고 들어오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놈. 수련은 안 하는 주제에 음습함은 끝도 없이 발전하는구나.”
“크헤헤.”
드낙은 세파리아스의 영향무력 내에 신체를 투입시키고도 그가 뒤늦게 깨닫자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사냥꾼의 신이 있다면 드낙이라 말하는 이들이 열이면 열이다.
암살자의 신이 있다면 드낙이라 말하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물론 드낙의 진면목, 그 진짜 재능의 끝을 본 자는 세파리아스 밖에 없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지 드낙의 암살 재능을 바닥까지 가늠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놈.’
그것이 세파리아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신(武神)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세파리아스였지만 그 또한 손에서 피가 떨어지고도 붕대로 감고 검술을 연마하고 무를 단련했다.
그 뒤로는 끝없는 전쟁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플래티넘 왕가는 중앙 집권을 원하였고, 북부는 분열하여 혼란의 정세를 바로잡겠다는 군웅들이 넘쳐났다.
그 피의 시대를 평정하며 얻은 경험은 오로지 피 묻은 것뿐이었다.
그에 반하여 드낙은 고작 10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모든 걸 끝냈다. 중립신이라는 호랑이에 타서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암살의 능력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고, 일 년이 다르다.
종국에는 세파리아스조차도 뛰어넘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세파리아스는 지금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집무실 한쪽 편이 흙으로 되어있고, 몸을 단련하도록 세팅되어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영향무력을 깨우친 세파리아스조차도 드낙의 암살 성장세는 경계해야했다. 지금은 암살 관련 초월의 힘도 개발하지 못했지만 그건 드낙놈이 노력하지 않고 있어서였다.
“아따, 이게 뭐시여! 술 아녀, 술! 이거 황제가 술 마셔도 되는 겨? 청렴해야지!”
되지도 않은 사투리를 쓰며 드낙이 장난을 걸었다. 아주 살판이 난 놈의 모습이었다. 중립신까지 죽고 차근차근 차원 방위도 세우고 있었기에 태평한 한량이나 다름없었다.
‘패고 싶다.’
그 모습은 실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모습이었다.
“여기는 왜 온 것이냐? 할 일이 그렇게 없느냐?”
“이제 다 끝났는데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나 따르는 사람들 배 든든하게 챙겨주고 하고 싶다는 거 하라고 다독여주면 끝인데.”
“차원 침공은?”
“중립신이 어지간히 잘 안배를 해뒀겠지.”
실제로 중립신이 죽은 차원은 대단히 멀리 있었다. 오죽하면 아카타베루도 50년이나 걸려서 달려와야지만 도착할 수 있었다.
뽕!
드낙이 제법 비싸 보이는 술병을 따자 세파리아스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건 왜 따느냐?”
“엉? 마시면 안 되는거였...나?”
세파리아스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서 잔을 두 개 가져와서 드낙에게 던졌다.
턱, 턱.
드낙은 손쉽게 받았다. 하지만 이내 빙긋 웃었다.
“잔 하나로는 우측 눈을 가리고, 다른 하나는 포물선을 그려서 잡기 힘들 게 만든다. 맞지?”
“그래도 삼류는 벗어났구나. 놈.”
인간은 주눈이 오른쪽인 경우가 많다. 자연히 그것을 가리거나 방해하면 거리감각을 크게 잃는다. 다른 눈 하나가 멀쩡하더라도 주된 눈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경우가 많고, 초점을 한쪽에 치우친 채 고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쪽으로 눈을 뜰 때와 한쪽 눈을 번갈아가면서 감았을 때. 사물이 이동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고로, 간단하면서도 하나의 묘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를 드낙이 간파해내자 세파리아스가 그에 답한 것이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세리안이 너 걱정 많이 하더라.”
“날? 이거 참, 나도 많이 우습게 보이나 보군.”
“혈육이니, 당연한 거지. 거기에 무슨 우위가 있어?”
드낙이 잔을 따라주고 자신의 술병에 자신이 직접 술을 따르려고 했는데 웬걸, 세파리아스가 술병을 낚아챘다.
졸졸졸.
술을 따르던 세파리아스는 잔이 넘쳤음에도 따르는 걸 멈추지 않고 한 병을 다 비워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짝 날이 섰다.
턱.
빈 술병을 둔 세파리아스가 말했다.
“한 잔만 하고 바로 가라.”
드낙이 침을 조금 삼켰다. 진짜 멋있는 연출이라서였다. 어떻게 이런 걸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테이블 아래로 술이 흘러내렸다. 드낙은 단숨에 술을 털었다.
“누군 오래 있고 싶겠어?”
“본론만 말해라.”
“상위인간으로 향하는 길. 그걸 왜 넌 추구하지 않는 거냐? 자치왕국은 벌써 세리안을 필두로 언급이 나왔고, 나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드낙이 날카로운 눈을 했다.
“근데 넌 어떠한 언급도 없었지. 왜냐? 이유를 듣고 싶어서 왔다.”
“불안한가?”
세파리아스가 그렇게 말하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진심을 보여서 빠르게 판단을 결정짓고 싶었다. 어떤 오해도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다. 이에 세파리아스가 조용히 숨을 골랐다.
드낙에게 진심을 말해주는 건 세파리아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놈의 격을 생각하면 말해야 한다.’
드낙은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고 조급하게 굴었다.
“왜? 이제 싸울 상대가 없어서 지겹냐?”
“하, 하하하!”
도발적인 말에 세파리아스가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입이 찢어지도록 웃어젖혔다.
“내가 무슨 광인이더냐? 싸울 상대가 없어서 허무하다고?”
“그래, 임마.”
드낙은 확신했다. 그 모습에 세파리아스는 술병을 하나 더 가져왔다. 드낙이 반쯤은 정답을 맞혔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드낙이 피식 웃었다. 세파리아스는 그냥 술병을 줄 뿐 따라주지는 않았다.
결국 드낙이 직접 따라야 했다.
‘새끼.’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미운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지.’
무식하게 들어온 드낙이나 술 안 따라주는 세파리아스가 거기서 거기였다.
“네 말이 맞다. 지금 내 대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생전에는 귀족을 죽이고, 버러지 같은 제국의 체제를 따라가려는 백금 왕가와 엘프가 나의 대적자였다.”
그 끝에 모습을 숨긴 채 덤빈 엘프들에게 죽었다. 수많은 독에 중독당했으며, 심장이 멈췄음에도 엘프 기사 다섯을 죽인 건 세파리아스만 가지고 있는 위업(偉業)이다. 인간치고는 그 대적자는 실로 감당키 어려웠다.
“죽고 검은 꿈에 담겼을 때는 중립신이 나의 대적자였지.”
드낙 덕에 정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고, 중립신의 정신을 죽일 수 있었다.
“이제는 그게 없어서 심심하다는 거냐?”
“아니, 그저 아쉬울 뿐이지. 다시 말하지만 난 광전사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서 피를 뿌리고 다녔을 뿐이다.
“그럼 왜 상위인간을 만드는데 크게 행동하지 않는 거야?”
이에 세파리아스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건 인간인가?”
“뭐?”
세파리아스가 그 반문에 재차 질문하였다.
“신격을 획득한 초월자, 인신이 가지는 힘인 신성력을 부여받아서 억지로 그릇을 생성시켜 초월의 힘을 담게 된 인간이, 인간이냐고 묻고 있다.”
“그거야...”
당연하다.
그렇게 말하려던 드낙이 입을 다물었다. 세파리아스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아차려서였다.
“눈치가 좋군. 그래서, 네 대답은 뭐냐? 상위인간이, 인간이냐? 아니냐?”
“넌 아니라는 소리네.”
자신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드낙은 자신의 대답을 고민하지 않고 세파리아스에게 집중했다.
“그렇다. 그들은 인간이라 부를 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그 누구도, 그 어떤 인신(人神)도 인간을 상위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 말에 드낙이 덜컥 몸을 흔들었다.
‘맞다.’
신성력을 비롯해서 인간에게 다시 닿은 중립신은 인간들을 상위인간으로 만들지 않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큰 증거였다. 여력이 있다면, 몇 명이라도 상위 인간으로 삼았을 터다.
자신의 사도(使徒)로 삼아 챔피언인 드낙을 조금 더 보호하고, 돕도록 했을 터다.
하지만 그런 ‘낌새’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어째서지?”
“인신(人神)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버러지 같은 놈들인지 잘 보여주는 것 아니겠느냐?”
세파리아스는 그답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은 드낙이 할 법했다. 그렇기에 드낙은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는 네 행동을 설명할 수 없어.”
그 말에 세파리아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영향무력이 세상을 비트는 것이 드낙의 눈에 보였다.
“이 힘이 인간다운 힘이다.”
“바보 같은 소리를...그 어떤 인간이 너처럼 거기에 닿을 것 같으냐?”
“덧없이 피어난 꽃이기에 아름답다.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다면 그땐 누구도 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지.”
그 말에 드낙은 조화(造花)를 떠올렸다. 종이, 천 따위로 만드는 가짜 꽃. 향기를 풍기지는 않지만 어디서든지 쉽게 실내장식으로 쓰이는 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눈길 한 번은 받을 수 있어도, 찬사를 받지는 못한다.
“인간은 덧없는 종족이 되어야 한다고? 그저 살고 죽고 그걸 되풀이 해야 한다고? 지랄하지 마라.”
드낙이 으르렁거렸다. 잘 나가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게 살아가는지 세파리아스는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드낙의 모습에도 세파리아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최대한 많은 행복을 살아간다면 더 많은 수명을 살아야 한다.”
“그럴지도.”
“풍요 속에서 행복을 노래하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고, 이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한다.”
“그렇겠지.”
“또한 나는 인간을...”
드낙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었다. 그 마음 속에 있는,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논했다. 하지만 그것을 잘 들어주던 세파리아스가 손사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 위대함은 없다.”
그가 두 팔을 쩍 벌렸다.
“보잘것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는 없다. 하지만 이미 너에게는 그 한계가 정해져 있다.”
“너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너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을 거라고 보는가?”
“그렇기에 내가 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인 채로 남아서 마력 한 줌 쓰지도 못한 채 살아가야 한다고?”
“그래.”
드낙은 그 단출한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그제야 자신의 진의를 말하기 시작했다.
“드낙, 우둔(愚鈍)하지만 그래도 너만 한 놈도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하고, 차원 지배자로서 가장 어울리는 자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은 일상을 영유하고, 해가 저무는 노을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미소 짓는 삶을 원하겠지.”
“허나, 드낙.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수많은 차원 전체를 봤을 때, 인간이 가지는 위상을.”
“인간이 가지는 위상.”
“그 서열을.”
“......너...”
드낙은 알 수 없는 사명감이 자신을 거칠게 흔드는 걸 느꼈다. 그건 자연스럽게 눈으로 삐쭉 튀어나왔고, 동공이 흔들렸다.
“중립신이라는 놈 때문에 나는 썩어 문드러진 내 몸뚱어리에 족쇄처럼 묶여서 수백 년을 살아야 했다. 그 거지 같은 백골(白骨)은 내 자아를 담아내지도 못해서 광증에 시달리는 전사로 만들었지.”
“......”
드낙은 그 무엇도 말하지 못했다. 자신 또한 중립신의 세뇌로 인한 후유증을 지금도 겪고 있어서였다.
“인간을 소모품으로 알고 있는 초월자가 많아도 너무 많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더더욱 상위인간이 되어...”
“흐.”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비웃음을 날렸다. 그 말을 끊었다.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세파리아스의 눈동자가 열정으로 가득 물들었다.
“난 인간을 이끌고, 인간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모든 초월자를 죽일 것이다. 상위인간? 개소리하지 마라. 그건 복수라고 할 수 없다. 신앙의 소모품, 업(業)과 격(格)을 높이기 위한 생산품...! 그딴 식으로 생각하는 초월자들을 인간의 손으로 멸망하게 만들겠다.”
“그게 아직도 내가 뒈지지 않고 이 자리에서 황제로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다.”
“넌 인간을 얕잡아보고, 하찮고 버러지 같다고 생각하겠지. 나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난 너와 다르다.”
“난 그 어리석은 이들과 함께 인간을 쥐어짜며 재미를 보고 있는 신과 악마들의 피를, 인간들의 손에 가득 묻히게 만들 거다.”
“그게 지금의 내 목표다.”
드낙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피냄새를 맡았다. 역할 정도로 피비린내가 가득 담긴 사상이었다.
찬란하기에, 그리고 실제로도 드낙조차도 그 목표의 위대함과 짜릿한 복수의 맛을 느꼈다. 듣는 것만으로도 동참하고 싶어졌다.
그렇기에 대단히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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