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0 -->
판타지 월드
“얘가 대장쥐라고, 내가 가장 아끼는 부하 중 하나야! 인사해.”
“신제국의 황제 세파리아스 불파겐이다.”
“자치왕국의 공왕 세리안 불파겐이다.”
“지하연합의 위원 중 일인인 대장쥐다.”
세 사람이 드낙의 사이에 끼여서 인사를 했다. 모두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대장쥐는 세파리아스를 싫어했고, 세리안은 이미 아크온이 왔는데 자신까지 와서 가치가 떨어지는 행동을 하게 되어서 좋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마치, 자치 왕국이 지하연합에게 매우 저자세인 것 같은 형세였다. 공왕이 두 명이나 대장쥐에게 와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연합은 그만큼 중한 것이지만, 그건 실질적 가치에 불과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국제 연합 도시의 연회에서까지 지하 연합이 선방을 치리라는 건 너무 세상을 단순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실체가 거대해 보이면 정치적으로라도 입지가 좁아야 했다.
몸집이 점점 커지는 국가를 가만히 보고 있을 인접 국가는 없다. 프로이센의 비상을 막았던 다른 유럽국가처럼 지하 연합은 사실 견제하는 게 옳았다. 다만 거기서도 교류는 있어야 했다.
모순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그게 드낙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모두 암묵적으로 지하 연합에게 짜잘이짓만 하기로 했는데 공왕 두 명에 들러붙고 신제국의 황제까지 함께 있는다?
누구도 쓰지 않은 계약이 파기된 셈이다.
다분히 정치적인 판도를 드낙이 일부러 망가뜨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대장쥐는 서둘러 이 기회를 잡았다. 불평불만만 하던 입을 싹 닫고, 세피라이스와 세리안을 대접했다.
이곳은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 드낙이 마련해준 자리였다. 어떻게든 성과를 내서 보답해줘야 했다.
“이거 한 번 드셔 봐.”
아크온은 하오체를 썼기에 하오체를 썼지만, 이들은 반말을 썼기에 대장쥐도 반말을 찍찍 내뱉었다. 세파리아스와 세리안은 상관하지 않았다. <쉐도우 위스퍼>를 통해서 지하연합의 세력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는 게 그들이었다.
아크온 공왕이 저자세인 것은 그를 뒷받침해주는 북부 세력이 약해서일 뿐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이 시대는 야만의 시대다. 예를 차려줄 상대를 가려서 해야 했다. 이 시대는 무인의 시대이며 칼이 중요한 시대였다. 강한 놈은 강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강한 놈이 약한 척을 하면 공격받을 뿐이었다.
칼을 쥔 상대는 상대가 약한지를 가늠하는데 그에게 예를 차리면 약해 보일 뿐이었다. 아가리를 쩍 열며 군침을 흘리는 짐승에게 고개를 숙여서 등과 뒷목을 보여주는 격이다.
고소한 가루를 살짝 맛본 세파리아스는 다시 한 번 가루를 손으로 집어서 털어 넣었다. 제법 맛있었다. 세리안도 그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드낙도 냉큼 먹었다.
“백성들과 시민들에게 주기에 이보다 안성맞춤이 없겠지.”
대장쥐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이 정도 고소함은 사기적이다. 향신료의 종류가 많아도 고소함은 또 다른 문제였다.
“드낙 님. 빵에 뿌려 먹어도 괜찮겠어요.”
세리안의 말에 드낙이 군침을 삼켰다. 벌레가 주재료였지만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또한 매우 가치가 높은 가루로 봤고, 그 가격이 아주 낮다는 것에도 크게 주목했다.
“세리안 공왕, 이미 매년 10톤을 받기로 했습니다.”
“아~, 대단히 수완이 좋으십니다. 아크온 공왕.”
아크온은 이미 자치왕국과 이야기가 된 것이라고 말해서 자신의 공을 가로채지 말라는 취지를 보였고 세리안은 이를 수용했다.
“신제국의 황제는 어떤가?”
“내년에는 100톤 이상을 들이고 싶다. 점진적으로 크게 수입할 수 있다면 더 좋고.”
단숨에 이 먹거리가 지닌 가치를 봤다. 다른 이들이 10톤 20톤 거릴 때 그 10배를 불렀다. 하지만 대장쥐는 고개를 저었다.
“많이 해봤자 50톤이다.”
“그럼 그렇게 하지.”
거침없었다. 민생 유지를 위해서 먹거리는 굉장한 효과를 발휘했다. 굶어 죽지만 않아도 어느 정도 불만이 쏙 들어가는 게 민초들이었다.
그 사이에 드낙은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대장쥐가 양지에서 나와서 국가사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음지에서 숨어서 활동할 때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대장쥐는 지하 광물에 대해서도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 흥미를 보였다. 아무래도 지하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하 연합이기에 광산업에서도 지상인들보다 월등히 효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말 그대로 인간보다 헌신적인 것이 지하 종족이었다. 하지만 드낙은 의외의 곳에서 불같이 싸움이 붙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아니지, 아니지. 그건 공정하지 않아. 신제국의 인구 숫자가 더 많으니까.”
“아버지.”
“힘들 때만 아버지냐? 지금은 황제와 공왕이다.”
“황제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보유하고 계시는 마법사와 연금술사의 숫자도 많지 않습니까? 그거야말로 불공정한 겁니다.”
바로 난방 연료로 쓰이는 석탄 공급에 대해서 엄청난 경쟁이 붙었다. 대장쥐도 의외인 표정을 지었는데, 겨울에는 지하 깊쑤욱한 곳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실 난방을 위한 연료 소비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석탄이 무슨 황금이야? 그렇게 싸울 정도게.”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미련한 놈...넌 마법 때문에 항상 겨울에 따습게 지내지만, 민간은 아니다.”
“무슨 소리야? 난 시골에서 태어나서 추위를 잘 알아.”
“그럼 겨울 준비도 잘 알겠지.”
계절 하나를 통째로 쏟아부어야 하고, 종종 마을 단위로 힘을 쓰기도 한다.
“인구가 적은 곳은 상대적으로 장작 구하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인구가 많은 곳에는 산이 민둥산으로 되어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억지로 막아야 할 정도다.”
그런 말을 들으며 드낙은 자신이 목축업자의 아들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덮을 것도 많았기에 겨울 고민은 잘 한 적이 없었다. 제법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현대인의 시야에서는 구질구질했지만.
“장작을 의외로 많이 쓰는구나.”
벽난로에 온종일 장작을 태워도 방의 온도는 냉랭한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드낙은 세파리아스를 새롭게 봤다.
“넌 귀족인데도 시민에 대해서 잘 아는 친구구나?”
“닥쳐라, 현장을 모르고 어찌 정치하고 국가를 이끌고 나가겠느냐? 책상에 앉아서 만들어내는 제도들은 현장에서 가장 왜곡되기 쉽다. 신제국의 관리들은 집무실에 있는 시간보다 현장에 있는 시간을 강제적으로 할당하고 있다.”
그건 세파리아스가 드낙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그 제도가 적용되는 사람을 봐야 했다. 그 시민과 백성들은 멍청했기 때문에 제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어서였다.
“야, 그건 너무 악마적이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굴리냐. 다 배운 지식인들인데. 엘리트 아냐?”
드낙의 말에 세리안이 풋하고 웃었다. 웃음을 참지 못했는데, 드낙이 할 소리가 아니어서였다. 당장 예시만 해도 셀 수가 없었다.
“난방 문제도 중요하지.”
겨울나기.
백성들에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드낙이 팔을 걷어붙이려고 하자 세파리아스, 대장쥐, 세리안, 아크온까지 모두 그걸 말렸다.
“이런 일에 무슨 반마반신께서 나서십니까. 시민들의 난방은 저희들이 책임질 수 있습니다.”
“아크온 공왕의 말이 맞아요. 쓸데없는 일에 고민하시는 것보다는 더 원대한 것. 더 거대한 목표를 노리시는 것이 좋아요. 요즘...레이시아 왕비께서 신성력 분배 때문에 많이 고민하시는 것 같은데 그 선별 기준을 같이 고민해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넌 누구의 황제도 누구의 공왕도 아닌데 무슨 오지랖이냐?”
“지하 연합은 난방이 필요가 없습니다. 반마반신께서 굳이 방문을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항상 지하 연합에 대한 보고를 매일 같이 올리고 계신데 이를 읽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 지하 연합은...”
너도나도 드낙의 개입을 은근슬쩍 밀어내기 바빴다. 그중에는 대장쥐도 있었다. 지금 하는 것도 많은데 지하 연합에게 난방 시설이니 뭐니를 만드는데 거대 프로젝트 하나를 드낙이 끼워 넣는다?
아무리 충절이 있어도 그걸 용납한다면 간신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걸 거부한다면 신성모독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에 미리 차단하는 게 유일한 상책이었다.
‘어어? 이 녀석들 봐라?’
중립신의 세뇌 때문에 성격이 바뀌긴 해도 드낙은 드낙이었다. 단번에 이들이 하는 짓이 확 들어왔다.
“커흐흐흠...내가 정말, 엄청난 난방 설비를 아는데...하, 이걸 지금 당장 보여줄 수도 없고...”
그러면서 드낙이 은근슬쩍 세파리아스에게 다가갔다. 그가 뒷걸음질 쳤다.
“다가오지 마라, 신제국에는 네 난방시설이 필요가 없어!”
거대 프로젝트가 분명했다. 드낙이 할 생각은 뻔했다. 세상을 그냥 뜨겁게 달궈버리자. 거대한 스팀으로 겨울을 쫓아버리자.
‘골램 산업과 연관 지어서 달구어진 골램을 돌아다니게 할지도 모르지!’
차라리 장작 때려 넣는 게 더 좋을 지경이다.
“어어, 왜 도망쳐? 지금 날 못 믿는 거야? 진짜 대박이라니까. 대박인 난방 설계도가 있다고.”
“신제국은 괜찮다! 제발!”
“아니, 넌 필요해. 날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이번에 그 편견을 내가 깨부숴주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드낙이 다른 이들에게도 손가락질을 해대었다.
“신제국 다음은 자치왕국이야! 지하 왕국도 확실하게 내 명성을 드높여 보이겠어! 그리고...너!”
“헉!”
조용히 구석에 숨어있던 엘프 무리가 헉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였다.
“너!”
오크들도 매한가지였다. 드워프들도 말할 것 없었다.
“얼마나 겨울이 따뜻해질 수 있는지 여기서 내가 선포한다! 따뜻한 겨울을 보여주겠다!”
드낙의 <따뜻한 겨울 선포>는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오히려 드낙은 판을 키우고 있었는데 믿고 있는 게 있어서였다.
‘요녀석들, 온돌 맛 좀 봐라!’
그 위업은 드낙이 가져갈 생각이었다.
‘식빵 굽는 고양이처럼 만들어주마!’
물론 쉽게는 안 줄 생각이었다. 괘씸해서였다. 조금은 괴롭혀도 될 터다.
*
9천 개에 달하는 눈동자를 몸에 박힌 중급 권속 악마, 구천안흉(九千眼凶)이 숙덕거렸다. 50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준비할 건 많았고, 고려할 것도 많았다.
최고의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는 전쟁이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전쟁을 길게 하지 않는 게 가장 효율적인 파괴행위였다. 이를 위해서는 한 방이 중요했고, 적이 대처하기 전에 목을 끊어놓아야 했다.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피해를 입으면 절망하고 전의를 잃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끝없이 중립신이 죽고 사라진 차원을 잡아먹을 권속 악마를 만드는 게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세상이 일정 궤도에 오르면 해야 하는 것.
바로 재활용에 대한 것을 토의하기 바빴다.
“설마 악마 대공까지 만드시려고 하시다니, 너무 큰 투자 아닌가?”
“100쌍의 붉은 마룡과 데몬 나이트라니, 아카타베루께서는 너무 걱정이 많으시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소국을 홀로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을 생산하면서 배출해내는 찌꺼기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리기에는 아까웠고, 안 그래도 데몬 나이트 생산에 다른 비효율을 낮춰야 하는데 버리는 건 어리석었다.
“육파괴봉(肉破块縫)이 가장 적합하지 않겠소?”
“누더기를 말하는 것인가?”
육신을 잘게 부수고, 이를 덩어리로 다시 꿰매는 중급 권속 악마로 덩치가 컸다. 보통은 트롤이나 마신장이 아닌, 오우거를 상대하는 데 사용되는 권속 악마였다. 오우거에게는 패배하지만 잘 버틸 수 있고, 트롤과는 백중세(伯仲勢)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립신의 세상에 트롤과 오우거가 번성한 건 아니지 않나. 목적에 맞지 않는다.”
육파괴봉은 중대형급의 싸움에 소모되는 소모품과 같았다. 짜깁기된 누더기 권속 악마가 강력할 수가 없었다. 재활용된 권속 악마였기에 자아도 대단치 않았다.
중형 재활용 생명체인 셈이다.
“체구가 작은 종족에게는 일단 효과적이지 않나.”
“엘프에게는 오히려 쉽게 토벌될 텐데.”
“인골흉(刃骨凶)이 있는데 엘프는 무슨 걱정인가. 어찌 되었건 크기가 큰 권속 악마는 평타는 친다는 것이 중요하지.”
“거기에 크기도 크기 때문에 마법 표적으로 삼기도 좋고, 공성 병기도 대신 맞아주기 쉽다.”
“나쁘지 않아.”
“지성종족 상대로는 육파괴봉은 좋은 소모품이지.”
위협적인 공격을 대신 맞아주면서 생기는 이득은 상당할 터다. 그렇게 그들은 재활용 악마 권속 육파괴봉에 대한 생산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
[작품후기]
5840자
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에는 조용히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밖은 위험하고 굉장히 춥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