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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드낙은 세파리아스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정신세계로 드낙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해도 결국 중립신의 정신을 죽인 건 세파리아스였다.
중립신에게서 느꼈던 절망감.
흐느낌.
그 느낌과 기분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흉터로 남았다. 이 때문에 드낙은 세파리아스에게 강력하고 무자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세파리아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만 싸우고, 생산적인 일을 하자.”
드낙은 이를 중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흑과 백을 가릴 사안도 아니다.
그 말에 대장쥐가 고개를 홱 돌렸다. 세파리아스는 그게 아주 건방진지 자기도 똑같이 고개를 홱 돌렸다.
완벽하게 갈등 구조가 선하게 새겨졌다. 신제국이 지하 연합과 대립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우대권은 없다. 세파리아스, 신제국과 자치 왕국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렇다면 남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자 중 마법사와 연금술사 그리고 대장장이를 비롯한 기술자들을 신제국이 우선적으로 받고 싶다. 저쪽은 양을 가지고, 나는 질을 추구한다. 간단한 논리다.”
드낙의 눈이 세리안에게로 향했다. 자치 왕국의 공왕은 4명이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이는 세리안 공왕 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드낙은 ‘국가’로부터 떨어져나와야 했기에 공왕 체계는 불가피했다.
“상관없습니다.”
세리안은 간단히 이를 허락했다. 동부 왕국의 살아남은 자들만 해도 이미 중산층 이상인 이들이 많았다. 거기에 막는다고 해도 신제국에 반감을 지닌 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강력한 선별작업을 남부 왕국에서부터 할 수 없었기에 자치 왕국으로 흘러들어오는 반제국파 인사들은 막을 수가 없을 터다. 반대로 이는 세파리아스에게도 이득이었다.
제국 반란종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본 18인의 벨룸 퓨에르(bellum puer) 중 1인 <밝은 새벽의 룩산드라(Ruxandra)>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첫 안건에 힘을 너무 주고 있네.’
그만큼 인간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동서로 나누어진 상태다. 지금 당장은 제법 세가 크지만 다시 세월이 지난다면 엘프, 드워프, 오크가 주종족이 될 것이 분명했다. 드낙 덕분에 몰락하지는 않겠지만, 꼴등이라고 불리지만 않을 뿐 4등인 것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거세게 짓는 개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인적자원을 둘로 나누어 찢어 가진다는 것 자체가 성장의 감소를 의미했다.
오로지 집중 발전만이 엄청난 발전을 유도할 수 있었다.
“바로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고!”
국제 연합 회의에서 드워프 대표자 <타오르는 돌산맥>이 콧김을 뿜으며 외쳤다. 두 번째 안건은 드워프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물론 다른 종족에게도 중요했다.
게제라스가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안건이 오로지 인간에게 해당된 것이라면, 두 번째 안건은 전종족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었기에 배경 설명부터 시작했다.
“유례없는 대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불안과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식량과 연료와 같은 일차 산업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에 대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일은 굉장히 광범위하고, 큽니다. 평야가 놀고 있고, 이를 굴릴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 말을 타오르는 돌산맥이 거친 수염을 매만지며 외쳤다.
“그렇기에! 골램 산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척!
돌산맥이 손가락으로 룩산드라를 가리켰다. 군대의 자잘한 보급부터 전략을 재검토하는 전략 부관인 룩산드라는 아름다운 칼리스투스가 총애하는 머리 중 하나였다.
“폭풍의 요람을 이용한다면 행성 곳곳에서 마력을 무한으로 끌어다 올 수 있다! 골램을 통해서 일차 산업을 전담시킨다면 대풍요의 시대가 도래한다!”
손을 다시 자신의 가슴에 척 가리키며 돌산맥이 침을 튀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에 드워프의 기술력이 더해지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일단은 앉아주십시오.”
게제라스의 말에 그가 앉았다.
“드워프 대표자의 말씀처럼 골램 산업은 일차 산업에 드는 인력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데 있습니다.”
몇몇 식량의 무료 보급은 땀 흘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될 수 있었다.
“전종족에게 혜택을 마련하려면 대량생산을 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품목을 여러 개로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를 먼저 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룩산드라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가장 먼저 세파리아스가 하나를 말했다.
“고기.”
“고기를 무료로...실현 가능합니까?”
세리안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하려면 어마어마한,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사업이 된다. 그럴 여력이 현재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각기 알고 있는 게 달라서였다. 물론 이에 대답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 바로 대장쥐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지하에서 드낙을 위해서 정보를 취급해왔다.
그런 우려에도 세파리아스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고기를 무료로 지급하지 못한다면, 골램 사업을 할 이유가 없다. 밀을 공짜로 받아봤자,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로 귀족적인 대답이었다. 사람이 장기간 빵만 먹고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수준이었다. 이는 무인(武人)의 측면도 있었다. 모병제에 있어서 병사는 무조건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
지구력 때문이다. 빵만 처먹는 병사는 체력이 아주 형편없었다.
‘생각하는 게 그냥 전투적이네.’
드낙은 세파리아스의 말을 들으며 어처구니없어했다. 일단 <전쟁과 전투>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모습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빵만으로도 먹고 살 수는 있다.”
오크 대표자, 트시므 시브(Tseem ceeb, 춤추는 영혼)가 대꾸했지만 세파리아스는 즉답했다.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그렇다면 더 적은 돈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구휼을 통해서 최소한의 인구를 유지하는 방법은 이미 있다. 고로 골램 사업을 할 필요가 없다. 1차 산업의 인력 투입을 극단적으로 줄이려면 고기를 정량으로 배급하되, 무료로 줘야 한다. 그리고 그 수준은 1일 1인 300g은 넘어야 한다.”
“으음...”
모두가 입을 다물자 그제야 대장쥐가 나섰다.
“가능하다.”
그 말에 세파리아스의 눈이 빛났다.
“성급한 판단이 아니라, 확신하는 건가?”
“콧대만 높은 인간은 판단할 수 없겠지. 허나 지하 연합은 판단이 가능하다.”
“누가 콧대가 높은지 모르겠군.”
“내기라도 할까?”
대장쥐의 말에 세파리아스는 코웃음을 한 번 칠 뿐이었다. 그런 게 통할 리가 만무했다. 세파리아스는 패도를 걷는 자,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골램 작업장은 어디에 세우는 게 좋지?”
드낙이 일을 빠르게 진행했다. 이에 대해서는 모두 제각각 의견을 냈다. 자기 쪽에 가까운 게 무조건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대륙 북쪽에 건설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디아볼로스와 타락 엘프들의 대표자 룩산드라는 그나마 타협해서 대륙 북부, 불모지를 꼽았다. 엘프들의 실험 장소로 황무지가 된 곳이었다.
“골램 제작에는 엄청난 자원이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서 부지를 마련해야 하는데, 땅질이 좋은 평야를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못 쓰는 땅에 공장을 짓는 게 좋습니다.”
“안 된다.”
다른 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드낙이 이를 제지했다. 모두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곳에는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차원 침략군을 대비하여 나의 악마 권속을 늘릴 곳으로 이용할 생각이다.”
“그러시다면야...”
반마반신인 드낙은 그야말로 모순적 존재였다. 악마 권속과 신성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힘을 다루는 자는 인격신이기까지 했다.
독특하며 희귀한 존재였다. 동시에 이성보다는 감성이 커서 필멸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기도 했다.
“어차피 남부 이주민이 생기면 지성종족이 살지 않게 될 텐데, 전(前) 동부 왕국에 공장을 건설하는 게 어떻습니까. 항구도 있지 않습니까.”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해안가에 공장을 짓는 것도, 그곳에 공장이 자리 잡기도 좋았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였다.
드낙은 살짝 눈치를 보고는 엄격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진행시켜.”
*
대악마(大惡魔)의 세계는 차원이동에 매우 적합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세계라고 해도 흐물거리는 이차원이었기에 상대가 차원 이동해서 침략하기에 좋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차원 방어력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이차원에 살아가는 이유는 다른 차원에 들어가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의 차원 방어력을 높이지 않는 대신 상대 차원에 들어가기 좋았다.
그런 이차원이었지만 그곳에서도 대악마의 권속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침략을 대비하는 아카타베루의 권속 중에서도 가장 약한 존재가 바로 소아귀(小兒鬼)였다. 이들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치들끼리 모여서 다른 소아귀를 괴롭히기도 하고, 잔혹하게 죽이기도 했다.
모습만 아기의 모습을 가질 뿐, 실로 잔혹한 하급 악마들이었다.
껑충!
작은 체구답게 이동하기 위해서 껑충 뛰고 다니는 놈들이었다. 그 바닥에는 죽어 나자빠진 소아귀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이 세계의 토지가 되는 것이 소아귀였다.
그중에는 제법 덩치가 자란 놈들도 있었다. 같은 소아귀를 잡아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진화했다. 핏빛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소아귀들은 결코 핏빛쥐처럼 피숨결 검은뿔쥐가 되지 못했다.
휘릭.
단단하고, 톱날 같은 가시가 수백 개 튀어나와있는 흉악한 혓바닥이 낚시를 하듯이 제법 자라서 소아귀들의 대장 노릇을 하며 10여 마리를 이끌고 다니는 큰놈을 낚아챘다.
“응애! 응애애애애!”
누구나 들으면 섬뜩함과 알 수 없는 공포 그리고 그와 함께 차오르는 거대한 사명감과 정의감이 튀어나올만한 어린 아기의 울음 소리가 끝도 모르고 울려 퍼졌다.
아기 시체로 만들어진 땅에서 소아귀와 똑같이 하급 악마지만 덩치가 성인 남자보다 큰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소아귀가 혼비백산하며 꽁지가 빠지도록 껑충 뛰며 도망쳤다.
공포심 때문에 똥이나 오줌을 푸다닥 싸면서 도망치는 소아귀도 있었다.
콰득! 콰드득! 우적, 우적!
제법 커진 소아귀를 뜯어먹은 조출귀(釣出鬼)는 20m에 달하는 혓바닥을 깔끔하게 섬세한 돌기가 들러붙어 있는 손바닥과 손가락을 이용해서 잘 정돈했다.
아무리 긴 장창병이라도 조출귀의 혓바닥보다는 짧을 수밖에 없었다. 하급 악마라고해도 매우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조출귀의 진짜 무서움은 이놈들이 전투용 하급 악마가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전투도 겸하고 있다는 게 베스트다. 거기에 땅속에 파고들어서 혓바닥으로 선제공격이 가능한 것도 음흉하고 위험하다.
이들은 동족을 잡아먹은 소아귀 중 두툼한 놈들을 잡아먹고, 배출하여 또 소아귀를 태어나게 하는 놈들이었다. 그렇기에 몸의 뒷부분이 여왕개미처럼 길쭉하고 번데기처럼 주름이 있었다.
출산기능을 크게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동하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소아귀 생태계는 자연스럽게 대악마(大惡魔) 아카타베루의 군세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철퍽!
구천안흉(九千眼凶)이 움직였다. 머리를 쓰는데 9,000마리나 있는 구천안흉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50년 동안 <무너진 테라>를 잡아먹기 위한 전쟁 계획을 잡아야 한다.”
소아귀의 가죽을 떠서 만든 양피지가 아주 넓게 펼쳐졌다. 뼈로 쌓아올린 원탁은 수많은 계획을 메모하고, 정리하기 좋았다. 소아귀의 아기 같은 앙증맞은 심장을 쥐어짜서 텅 비어있는 두개골에 피를 붓고, 이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메모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엘프들이다. 그들을 철저하게 죽일 수 있는 악마를 개발해야 한다.”
“수준은? 하급, 중급, 상급?”
“엘프는 오우거와 종족값이 비슷하다는 의견이 많으니, 상급 악마지.”
“그래도 오우거보다는 못하지 않나? 격이 비슷하다고 해도 그들은 기껏해야 인간과 비슷한 체격이다.”
“대(對) 마법사 능력은 필수로 들어가야 해. 동시에 덩치가 너무 커서도 안 돼.”
“그렇다면 중급이 형편에 좋은데.”
“엘프를 중급 악마로? 효율성은 좋지만 효과는? 장담할 수 있나?”
전신에 들러붙어 있는 9천 개의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괴한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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