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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월드
드낙의 눈에 불똥이 확 튀었다. 세파리아스가 자신을 속였기 때문이다.
“너 이 자식, 신제국 수습하러 간다며?”
“쯧쯧쯧. 아비 된다는 놈이 자식도 안 챙기고 밖을 돌기 바쁘다니, 나 세파리아스는 크게 실망했다!”
“시마해따!”
어느새 다이앤타도 세파리아스에게 홀딱 반했는지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 드낙의 시선이 세리안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약간 눈 밑이 퀭해 있었다.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동부 왕국의 생존자는 고작 수천. 끔찍한 수준이다. 드낙과 인연이 닿은 자들은 살아남았겠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다.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고, 국가 붕괴의 대사건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세파리아스는 그런 위기에 동요 하나 없었다.
당연하게 자식을 보고, 삶을 즐기는 여유를 보여줬다. 그 효과는 서서히 번져나가서 득실거리는 불안감을 종식했다.
어떻게든 될 거다...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 자리 잡았다.
“이 손녀는 신의 축복이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이렇게 강한 육체는 처음 본다.”
“악마의 피가 뒤섞였으니까. 쿼터 데몬이라고 봐야 해.”
세파리아스의 손녀 칭찬에 드낙이 짧게 대꾸하며 손을 다이앤타에게 가져갔지만, 허공만 스칠 뿐이었다.
“아하하.”
다이앤타가 웃었다.
찰나에 보인 싸움 아닌 싸움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얼추 이해한 모습이었다.
“어쭈.”
드낙이 몇 번을 다이앤타를 만지려고 했지만 세파리아스는 슉슉 피해갔다. 소파가 엎어지고, 커튼이 찢기고, 우당탕 소리가 나자 세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세요.”
“건방진 놈, 하찮은 놈, 어리석은 놈.”
‘이런 제기랄!’
피를 뿌릴 수는 없기에 드낙은 처참하게 발렸다. 대련 같은 제한적인 힘의 사용이 강제된 상황에서 세파리아스를 이기는 방법은 없었다. 이전의 세파리아스와 지금의 세파리아스는 또 달랐다.
‘어디까지 성장하는 거냐, 미친놈이네.’
결국 드낙이 멈췄다. 그가 소파를 일으켜 세우고 뒷정리를 하는 사이에 세파리아스는 다이앤타를 사랑해주기 바빴다.
‘호랑이도 자기 새끼는 챙긴다더니. 딱 그 짝이구나.’
뒷정리하는 걸 세리안도 도왔다.
“세파리아스에게 사정은 들었어?”
“장인 어른이라고 해야죠.”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싫어하던데?”
“그럼 어쩔 수 없고요.”
세리안도 어찌 못하는 게 세파리아스의 행동이었다. 한번 결정한 걸 번복하는 경우가 잘 없다. 최근에 번복한 일이 있다면 바로 중립신을 죽이기 위해서 드낙의 정신 세계로 들어간 선택이었다.
본래 그는 중립신 영혼으로 들어가서 자폭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드낙의 도박에 손을 올렸다. 결과는 좋았지만, 자신의 판단을 고친 것이라 앙금이 남았다.
그 덕에 더욱 세파리아스의 드낙에 대한 반감은 커져 있었다. 이를 듣는다면 드낙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남들과 다른 게 세파리아스였다.
상종하면 안 되는 게 상책이다. 그게 안 된다면 최대한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손녀와 손자에 정신이 돌아버린 상태라는 점이다.
뒷정리해줄 고용인조차 없는 상황에서 세리안으로부터 동부 왕국의 현황을 들었다.
“최대한 곳곳에 있는 식량을 호수 성채로 다시 모으고 있어요. 살아남은 생존자는 6,800명 뿐이에요.”
“에휴...”
드낙이 절로 한숨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중립신 새끼. 한 번을 안 믿어줘서...’
드낙은 절로 중립신 생각이 났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었다.
“기사 4,500명에 마법사, 연금술사를 비롯해서 산업 쪽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인물 2,300명이 살아남았어요.”
알째배기들만 살아남았다. 그래도 그건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지배해야 할 자가 있어야 그들도 그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부 왕국은 버려라. 신제국으로 다 이끌고 가야 한다. 생각보다 더 상황이 안 좋다.”
세파리아스가 위아래로 흔들흔들 움직이며 말했다.
‘대이주인가.’
동부 왕국에 투자한 것이 있어서 아쉬웠지만, 인구는 뭉쳐야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다. 1만 명이 사는 마을과 100만 명이 사는 도시가 만들어내는 힘의 차이는 대단하다.
드낙이 이렇게까지 인간을 생각하는 이유는 지구와의 교류 때문이었다. 아무리 우월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지구만큼 소비적이고 자극적인 문화를 창출해내지는 못한다.
그건 세월이 필요했고,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드낙이었기에 인간들을 신경 써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종족과는 또 달랐다. 그건 ‘박호훈’에게 해주지 못했던, 자신이 얻지 못했던 도움을 이들에게는 주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밑바닥에서 뒤엉켜서 버둥거릴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허나 박호훈은 그런 경우를 겪은 적이 없었다.
그 마음의 반동은 여기서도 일어나 봉우리 져서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낙이 지닌 이타심의 뿌리는 과거 박호훈일 때 받지 못한 은혜를 갈구하는 갈증이었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드낙은 다른 인간들을 도와줌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하고 있었다.
그건 매우 깊은 무의식의 발로여서 드낙조차도 알지 못했다.
타고난 사냥꾼이며 천재적인 암살자인 드낙은 결코 이타심을 개발하지 못한다. 숲의 진리를 배우려고 해도 암살자의 재능이 이를 틀어막아 칼로 그 심장을 베어내기 때문이다.
정글에 똬리를 튼 차가운 뱀이 되는 걸 막은 건 현대에서 약자로서 짓밟히며 살았던 박호훈의 삶이었다.
어찌 되었던 드낙은 인간을 위한 행동을 어느 정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다 몰아넣는 수밖에.”
“잘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영혼 제국으로 텅텅 빈 제국땅에 인간이 자리 잡고, 백설 산맥 이남으로는 오크가 산다. 검은 돔이 있는 남부 왕국의 서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지하 연합은 지하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때문에 영토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적다.
드워프는 제국의 서쪽.
‘나쁘지 않아.’
착실하게 정리된 느낌이었다. 살아남은 디아볼로스와 타락 엘프들은 제국의 동쪽에서 재건을 시작하면 된다.
“세파리...”
“하바부지! 나 화장실!”
“그래, 가자~ 가자~.”
세파리아스가 허둥지둥 화장실로 다이앤타를 껴안은 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던 드낙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적응이 안 되네.”
“저도요. 제가 어릴 때는 정말 무서운 분이셨거든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다른 법인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태도가 변하는 게 너무 무서워.”
드낙이 말하는 공포에 세리안도 깊게 공감했다.
“자.”
화장실에 갔다 온 세파리아스가 다이앤타를 세리안에게 안겨줬다.
“얼씨구? 소중한 손녀 놔두고 다른 게 가려고?”
“이제 손자보러 간다. 크레시미르의 향상심(向上心)이 대단하더군.”
드낙 또한 적발의 혈통이다. 고로 크레시미르 또한 불파겐의 적자다. 오로지 불파겐만이 오우거의 적발을 지닐 수 있다. 예외는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아아...그건 다이앤타 때문에...”
드낙이 말을 흐렸다. 자기보다 3살이나 어린 다이앤타와 경쟁을 하고 있으니, 미치도록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크레시미르는 악마의 피를 아주 조금만 이어받았다. <악마 트롤>을 토벌하면서 생긴 그 작은 인자가 전부였다.
“태어나서부터 강한 손녀도 좋지만, 노력하는 천재도 사랑스럽지.”
세파리아스가 빙긋 웃으며 나갔다. 발걸음에 흥이 났다. 그 모습을 드낙이 가만히 지켜봤다.
촉이 왔다.
‘세파리아스 녀석, 다이앤타는 세리안 때문에 와줬구만.’
3시간을 크레시미르를 위해서 쓴다면 나머지 1시간은 다이앤타를 위해서 쓰는 수준일 게 분명했다. 태어나서 이미 강한 다이앤타는 애 같지 않다. 반면 그런 애를 이기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크레시미르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인간은 노력하는 자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었다.
아마, 세파리아스도 거기에 끌린 것이리라.
‘편애를 최소한 안 하려고 노력하는 거니까, 그냥 넘어가 준다.’
어차피 드낙의 자식들은 서로를 향해서 칼을 겨누지 못한다. 드낙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눈치를 안 보고 죽이고 다닌다? 그 전에 지하 연합의 눈에 발각될 것이다.
“세리안. 중립신은 미쳐서 날뛰었고, 모두를 죽인 다음에 그 힘으로 행성을 변화시켜서 또 다른, 초월자를 모르는 필멸자들을 태어나게 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어.”
“제 아버지한테서도 들었어요. 중립신의 대계는 정말이지 치밀하고 끔찍해요.”
차원문을 닫아도 대계에서 살아남은 필멸자가 있다면 초월자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싹 다 죽이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중립신에게 좋았다. 어차피 그 또한 테라에 녹아들기 때문에 그 이후를 조정할 수 없어서였다.
이 변명은 아주 그럴듯했고, 진짜로 중립신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신뢰감을 줬다. 또한 그 계획의 규모가 워낙 커서 엄청난 음모로 보이기도 했다. 음모란 크고 클수록 재미난 법이었다.
‘세파리아스가 미리 약을 쳐줘서 쉽게 수긍하네. 동부 왕국은 별일 없이 수습되겠어.’
드낙은 자신을 구한 대영웅이 될 것이다. 세파리아스 또한 자신의 목적인 중립신이 죽었기에 드낙을 어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날 도운 걸 보면 세파리아스도 나랑 척을 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겠지.’
드낙은 세리안과 하룻밤을 보냈다. 반마반신(半魔半神)이 되어도 성욕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오히려 드낙은 그리스 로마의 신들과 같은 인격신(人格神)이었기에 더 열정적이었다.
보름을 호수 성채에서 지내면서 살아남은 이들을 이주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고, 편안한 삶을 보냈다.
매번 아침에 일어나서 멍하게 침대에 누워서 뒹군 건 평생해도 질리지 않는 일이었다.
“일어났어요?”
레이시아가 차를 내어왔다. 공주의 신분에 이제는 왕비의 신분이었지만 세리안과는 다르게 가정적인 면모가 강한게 레이시아였다.
따뜻한 차는 조금 달았다.
잠이 달아난 드낙이 차를 상에 놓고, 레이시아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웃었다. 세파리아스에게 크레시미르가 가르침을 받고 있었고, 드낙도 자주 그녀를 찾아왔다. 상황은 힘들었지만 남들보다는 상황이 아주 좋은게 그녀였다.
그녀는 세리안과는 다르게 드낙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땀을 한 번 빼고, 서로 껴안은채 있을 때, 레이시아가 한 가지 청을 했다.
“성기사와 사제들을 돌봐주셨으면 해요.”
“성기사와 사제들? 그들을 왜요?”
“중립신이 죽고, 그들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어요.”
드낙은 망치를 맞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그들을 깜빡하다니...”
드낙이 서둘러 일어났다. 반신(半神)이 되어서 신성력까지 보유하고 있는게 드낙이었다. 특히 인신(人神)의 경우에는 백이면 백. 신성력을 획득한다. 무엇보다 드낙은 평범한 반신이 아니었다.
그가 잡아먹은 것이 무엇인가?
인신(人神) 유일의 대신(大神), 엘 마르토 카사다민이다. 반신임에도 보유 신성력이 엄청났다.
“어서 가보세요. 늦게 말해서 죄송해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다행이다.’
레이시아는 서두르는 드낙을 말리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다. 다만, 조금 더 빨리 말하지 못한게 아쉬웠다. 드낙에게 청을 드릴 때는 쉽게 오지 않아서였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눈치를 보다가 가장 기분 좋을 때 말했는데, 일이 잘 풀릴 듯했다.
드낙은 드워프를 찾아가기보다 신성력을 잃은 성기사와 사제들을 소집했다. 그들 또한 살아남아있었는데 대부분이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케이슨을 봤을 때 드낙은 조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서둘러 케이슨을 불러와라.”
그 말에 기사가 허둥지둥 달려가서 책임자에게 말했다. 그는 건축가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자였다. 인력이 없어서 현장에 나올 정도로 팍팍해서 짜증이 난 상태에서 구덩이로 향해서 외쳤다.
손으로는 흙먼지를 휙휙 걷어내기 바빴다.
“어이, 케이슨! 흙 퍼는거 그만하고! 빨리 달려나와! 동부신께서 찾아오셨다고!”
이주를 위해서는 마차를 이끌 말과 골램이 필요했다. 골램의 제작을 위해서 질 좋은 땅 밑의 흙을 퍼올리는 작업을 하던 케이슨이 부당하게 대우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드낙이 보는 앞에서 그는 건축가에게 어깨를 얻어맞기도 했다.
‘저저, 개새끼가.’
절로 화가 났지만 참았다. 케이슨이 원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오랜만입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드낙은 케이슨 성기사의 몸에 접촉했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반신(半神)이 된 드낙이라 케이슨에게 접촉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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