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전사 8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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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낙은 가장 먼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만전(萬全)의 육체였다.
“날 어떻게 볼 수 있는 거지?”
디아볼로스 1만5천과의 전투에서 얻은 한순간에 불과한 암살자의 깨달음이 녹아든 반마(半魔)의 육체는 대신이 된 중립신조차도 간담이 서늘한 초월의 육체였다. ‘한 방’이 있는 것이 드낙이었다.
그 때문에 중립신도 쉽사리 드낙을 업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싸우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고, 특히 발등이 불이 떨어지거나 자신의 머리털이 타오르면 허둥지둥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게 드낙이었다.
그런데 그걸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간단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한 건가?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세파리아스는 검집에 들어간 롱소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방 내부였고, 가구가 많았음에도 부딪침이 없이 앞으로 다섯 걸음 나갔다가, 뒤로 다섯 걸음 물러섰다.
그곳에 깃들어있는 비전은 드낙의 눈을 빼앗기 충분했다.
“드낙, 부지런히 수련을 했느냐?”
“편법을 써서 너와 했던 대련을 모두 기억으로 삼아 외웠다.”
“하하하하!”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똑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리며 호위병의 말이 들려왔다. 그 뒤로 조금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부산스러운 것을 보니 인기척에 건넛방에서 잠자던 기사들이 일어난 듯했다.
“깨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손님이 왔다. 괘념치 말고, 대기하라.”
그 말에도 문이 열렸고, 기사가 단번에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무릎을 하나 꿇었다. 능숙하게 무릎을 꿇으면서도 검을 요령 좋게 뽑아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야심한 밤에 찾아온 손님이 정상적인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주군, 눈과 귀를 닫을 테니 경비를 서게 해주십시오.”
수틀리면 몸으로 막겠다는 소리였고, 진짜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귀도 귀마개를 끼우면 그만이라 여기는 듯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충성이었다.
“말 같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네 충정은 알겠으나, 더는 무례를 범하지 마라.”
“예.”
그런데도 일어나지 않자 세파리아스가 한숨을 내쉬며 드낙을 턱짓하며 말했다.
“동부왕이다. 인사하고 물러가라.”
“스테렌(Steren)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명성을 지닌 동부왕을 뵙습니다!”
담백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는 그대로 물러갔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드낙에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동부왕의 친정(親政)은 유명했다. 사실 친정이랄 것도 없고, 대부분 가신이 했지만, 제국인들이 거기까지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저 태평성대를 연 통일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가자 드낙은 눈을 깜빡였다.
“제법 대드는 맛이 있는데? 몇 놈 목을 쳐야 하는 게 네 특기잖아.”
“언제적 이야기냐? 그리고 생전의 철권통치는 남부 통일의 유일한 초석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지.”
세파리아스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드낙은 그때를 잘 몰라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목숨값은 무겁다고 생각하지?”
“내가 그런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겠지. 네놈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철권통치는 이득이 많다.”
“미친 소리.”
드낙이 일축했다. 소시민에게 감정 이입을 잘 하는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만, 세파리아스는 이걸 한 번은 짚고 넘어가고 싶어 했기에 언급한 것이지 논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안 죽이는 이유는 죽인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지. 중범죄자나 경범죄자나 똑같은 인간이고 그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사회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게 좋지.”
추가적인 피해가 나올 수 있었지만, 국가 전체, 인류 전체를 봤을 때는 범죄자라도 살려놓는 게 이득이었다. 그 덕에 신제국은 생각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찢어 죽일 놈이라도 종신형 노동에 처할 뿐이다.
“얼씨구.”
드낙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세파리아스가 변했음을 그제야 인지했다. 워낙 자신의 색깔이 진했기에 그 편견을 깨부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세파리아스는 일련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줬다.
“사람을 잘 안 죽이게 되었다라, 놀라운데...혹시, 나한테서 배워서?”
“너 같은 팔푼이에게 배울 게 뭐가 있다는 거냐? 단순한 노동력 증진을 위해서다.”
“하하하.”
드낙이 웃었다. 세파리아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또 이렇게 한 명의 스승이 되어버렸네.”
“시끄럽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에게서 배운 것을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분명 경박하게 엉덩이를 흔들게 분명했다. 드낙도 웃음기를 지우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왜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야?”
“무(武). 생전의 나와 부활한 지금의 나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세파리아스가 롱소드를 검집에서 뽑았다.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적혈대검(赤血大劍)보다 우월했다. 드워프들의 기술은 꾸준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저주검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그 검은?”
회백색으로 빛나는 검날을 본 드낙이 한 걸음 물러섰다. 〈본능〉이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실로 놀라울 정도의 직감이었다.
“〈사냥감〉이 된 것 같자 물러서는 건 여전하구나.”
“뭣?”
드낙의 마음에서 뭔가가 욱하고 올라왔다.
“이 방이 아니라 이 성채가 전부 화염으로 뒤덮이고, 지축이 갈라서 깊은 지하에 처박혀서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할 수 있으면 해봐라.”
세파리아스의 말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건 만용이라기에는 마른침을 삼킬 정도로 진짜 같았고, 서늘한 감촉을 선사해줬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무슨 자신감이냐? 내가 널 못 죽일 것 같으냐? 장인 어른 뭐 이런 거 없다. 네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으니까.”
“여전히 혓바닥이 길다.”
드낙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렀다. 격이 높았기에 세파리아스의 롱소드가 갖춘 능력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냥 무식하게 단단한데?”
강철이 흐르는 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롱소드였다. 말 그대로 절대 부러지지 않는 롱소드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세파리아스가 검을 뽑고, 드낙은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그것뿐인가?”
그 말에 드낙이 눈을 좁혔다. 조금 더 자세하게 검을 들여다봤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했고, 세파리아스가 대놓고 검을 뽑은 채 가만히 있었다.
“네 피를 담았군.”
그제야 드낙이 검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
“적발의 힘인가?”
“단순히 적발의 힘에 물러섰다? 고작 그 정도의 힘이 깃든 검인가?”
아니다.
드낙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세파리아스가 난폭하게 웃었다. 드워프들의 설계가 완벽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신을 상처입히는 검이다. 초월의 힘을 자르고, 상쇄시키는데 특화된 검이기도 하지. 물리적으로는 부러뜨릴 수 없기에 무엇보다 나한테 잘 어울린다.”
검자랑을 하는 세파리아스를 보며 드낙은 그게 본 목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날 보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그건 조금 다르지. 무(武)를 추구하면 언제고 닿게 될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울 뿐이다.”
‘미친놈인가?’
드낙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 마디로 검도를 좀 하다 보니까 신이란 놈들을 볼 수 있게 되더라. 자연의 진리를 깨닫게 되더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번화가에서 호구 새끼 하나 잡아서 돈 좀 뺏어 먹으려는 놈들이 하는 말과 똑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항상 무술을 단련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세상을 어떻게 무(武)로 보냐? 칼춤 춘다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냐?”
“나라는 존재가 제대로 세워지면, 세상은 변한다.”
단호한 말에 드낙은 입을 다물었다. 팔뚝으로 소름이 좍 돋았고, 전율이 전신으로 퍼졌다. 광오한 말이며, 오만한 말이었다.
세상이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자신이 변해야 하는 게 세상 살아가는 법이다. 왕따가 되기 싫으면 헬스를 끊고, 자신이 강해져서 짐승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 어느 곳도 세상이 자신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다.
허나, 이를 세파리아스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인간이었다.
“넌 정말이지 축복받은 놈이다.”
드낙이 탄식하듯이 말했다. 그 말 속에는 뼈가 들어가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냥 비전을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드낙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흥미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네.’
“나도 노력하면 닿을 수 있을까?”
“너에게는 내 모든 걸 전수해줬다. 남은 건 시간과 노력뿐이다.”
세파리아스가 의외의 말을 했다. 그건 드낙이 범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낙이 딱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을 때 그가 덧붙였다.
“검은 꿈을 통해서 나와 연결되었고, 내 찌꺼기를 받아먹었으니, 닿을 수밖에 없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하, 세팔이 요 새끼. 너무 건방진데?’
드낙의 흉험한 생각에 세파리아스가 빙긋 웃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금방 드낙이 덤벼들 것 같았지만, 그는 느긋했다.
“왜? 힘으로 날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대체 무슨 자신감이냐? 내가 널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굴복시키고 나서 말하는 게 어떠냐?”
세파리아스는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싸우고 싶은 마음은 생겼지만 바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주저했다. 분명 인간이다. 하지만...드낙은 주저했다. 그건 정말이지 모순적인 광경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마(半魔)의 존재가 한낱 인간따위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그 검으로 뭘 하려고 했던 거냐?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나?”
“지금쯤이면 중립신은 엘프들과 싸우는데 정신이 없겠지. 맞다. 난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고, 그저 새로운 삶을 얻은 것만으로도 무의 경지가 높아지고 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세파리아스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아직도 전성기가 아니었고, 지금조차도 전성기가 아니었다.
그의 전투력은 초월의 힘이니, 육체의 수준 같은 것으로는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그는 계속 전성기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고 그가 죽는 날이 전성기나 다름없었다.
곱게 늙어서 죽을 놈은 아니었기에 노쇠해서 죽는다는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그 이유는?”
“중립신을 죽이기 위해서다.”
드낙의 눈이 커졌다.
“미친놈! 필멸자의 한계는 명확하다. 당장 나도 널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중립신을 죽여? 이 미친놈아!”
단박에 세파리아스를 욕했다.
“그가 그저 부활하는 것만으로도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들떠서 춤을 추고 활력으로 가득 찼는데,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는 격이다.”
“내가 계란으로 보이는가?”
“...미친놈...”
드낙이 복잡한 눈을 했다. 세파리아스의 폭로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리라 의심하는 것과 진짜로 그러겠다는 건 차원이 달랐다. 거기에 드낙은 중립신의 강대함을 맛본 상태였다.
“대신이 장난이야?”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본래는 나 혼자 죽어서 놈에게 상처를 입히고 끝내려고 했지만, 네놈이 찾아왔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뭐라고?”
드낙이 그렇게 물었지만 이내 손을 들어 올렸다.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서였다.
‘세파리아스는 부활 이후에 중립신 같은 초월자를 죽이기 위해서 노력했고, 지금 그 결실을 취하려는 거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 그 동기가 희미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그리고 죽는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래. 중립신은 내가 언데드로 남고, 혼을 잡아뒀다. 내 기억에는 없었지만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게 중요하지.”
“그 복수를 지금 한다는 거야? 왜?”
다 끝난 일이었다. 거기에 본인도 그 세월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아마, 죽고 나서 검은 꿈에 접속했을 때 세파리아스의 자아 또한 눈을 떴다. 그전에는 그저 본능만 존재하는 망령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렇게 잡아뒀다고 복수라니?’
10년 전에 영창 5일 갔다고 그때 중대장, 대대장 하던 놈을 목 졸라 죽이는 경우와 같았다. 어디서 월세 떼어먹히고 그놈을 5년간 추적해서 잡아 죽이는 일이다.
“내 프라이드를 앗아갔기 때문이다. 드낙. 그것만으로도 나는 놈에게 큰 피해를 입혀야 한다. 난 내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썩어빠진 뼈에 속박되어 400년 이상을 망령으로 살았다.”
“근데 그 기억은 없잖아? 본능에 사로잡혀있었으니까.”
드낙은 오래전 있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본능에 사로잡힌 망령이면서도 비전을 쓰다니, 진짜 세파리아스는 말도 안 되는 인간이었다.
“넌 누가 널 치고 지나가면 그냥 지나가겠지? 오늘 재수 없다는 생각도 안 할 거다.”
“엉?”
길 가다가 어깨를 부딪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제야 드낙은 그와 자신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극심할 정도로 자존심의 높이가 달랐다.
짓밟혔으니까, 내 자유를 빼앗겼으니까, 놈에게 큰 피해를 준다.
“하지만 죽어서 뭘 어떻게 하려는 거냐?”
“인신인 중립신은 인간의 혼과 업을 흡수한다. 나 또한 죽으면 중립신에게로 흘러 들어간다.”
그 탁류(濁流) 속에서 자아를 유지한 채로 중립신을 내부에 큰 피해를 주는 게 세파리아스의 한 방이었다.
“엘프와의 격렬한 소모전을 겪고 있는 중립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균형이 무너질 것이고, 결국 큰 부상 혹은 공멸(共滅)에 가까운 피해를 입겠지.”
“네 미래를 엘프에게 맡긴다고?”
“멍청한 놈. 놈들에게 내 미래를 맡기는 게 아니다. 놈들이 나에게 미래를 맡기게 되는 것이다. 놈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건 바로 나, 세파리아스 불파겐이다.”
세파리아스가 단언했다.
“넌 인간일 뿐이야. 인간이 중립신을 상대로 승리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인간이 승리한 게 아니다. 나의 승리다.”
허무맹랑한 소리였지만 드낙은 순간 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입으로는 부정했다.
단 한 개체에 불과한 하찮은 인간의 대영웅이 대신을 고꾸라뜨리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드낙은 중립신이 왜 자신을 이곳에 보냈는지도 깨달았다.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중립신은 그를 이곳에 보낸 것일 터다.
‘설득하라고 지랄하더니, 이거냐?’
절로 욕이 나왔다.
“네가 도와준다면 더 확실하게 중립신을 몰아 죽일 수 있다.”
고민하는 드낙에게 세파리아스가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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