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796화 (795/1,239)

강철의 전사 79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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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노벰(novem)이 끼어있는 것 같은데, 그들이 어째서 회의소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까?”

라인홀트 의장의 말에 회의장에 있는 몇몇 엘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모두 마리에트의 진영에 속한 엘프들이었다. 또한 노벰이라는 말은 1만년 미만의 엘프들을 지칭하는 계급어였다.

10만년 계급에 속한 엘프는 센툼 밀리아(centum milia), 5만년 계급에 속하는 엘프는 퀸쿼진타(Quinquaginta), 1만년 계급에 속한 엘프는 데셈 아노스(Decem annos), 그 미만의 엘프는 노벰(novem)이라 불렸다.

신라국의 골품제보다는 제한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엘프의 활력과 향상심의 유지를 위해서였다. 집의 크기부터 입는 복색의 제한까지 있는 골품제보다는 널널한 것이 엘프 사회의 계급제도였고, 실제로 계급어를 입에 담는 엘프는 드물었다.

오직 센툼 밀리아 계급을 위한 지칭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아무도 말이 없습니까? 마리에트 천태상상위원께서 말씀해보십시오.”

라인홀트 의장이 손을 휘적거렸다. 고귀함이 느껴지는 새하얀 손은 회의장의 빛에 반사되며 백색으로 물들었다. 새하얀 피부는 엘프들을 천사로 여겨지게 할 정도로 고귀함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격이 있기에 이곳에 출입을 허락했습니다.”

“노벰에게 무슨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돌려보내십시오. 혹, 그들에게 주제넘은 지식을 건네주신 것은 아니겠지요?”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라인홀트 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리에트가 손짓하자 그들이 일어서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래도 제법 품위있는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으니, 실로 다행입니다. 몸짓에 기품이 없었다면 큰 벌을 내렸을 겁니다. 노벰에게는 실로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말에 마리에트가 움찔하며 물었다. 반발심이 생겨서였다.

“살아생전 보기 힘든 회의장을 봤으니, 평생 갇혀 살아도 센툼 밀리아를 찬양했을 겁니다.”

개소리였지만 누구도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았다.

“아이누르 위원 께서는 데셈 아노스를 제법 데리고 있군요. 장난감입니까?”

그 말에 아이누르가 입을 가리며 소리 내서 웃었다. 잔혹함이 들끓는 모습이었다. 이곳에 있는 데셈 아노스들은 긴장했지만 라인홀트 의장은 그들을 내치지는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이다.

‘본래는 퀸쿼진타까지도 내쳐서 짓누를까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도시의 영향력만 감소하겠지.’

센툼 밀리아가 직접 일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라인홀트의 지위 또한 흔들릴 수 있었다. 어디서든 아랫것들은 존재해야 했다. 그래야 윗사람이 편할 수 있었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정보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허면, 저희들의 판단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선점하여 다른 엘프보다 먼저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적법한 수단보다는 조용하고 잔혹한 수단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틀린 그 입술이 움직였다.

“엘프를 위해서입니다.”

“엘프를 위해서...”

“센툼 밀리아부터 시작된 사회는 이제 단단히 자리 잡았고, 잘 ‘고정’되어있습니다. 이것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깨부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피가 흐를 것입니다. ‘현상유지’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끝없는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에 불과합니다. 고로 이 회의장에 있는 분들은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모두 죽이자는 건가?”

“살인멸구(殺人滅口)야 말로 가장 완벽한 비밀유지가 아니겠습니까?”

“쉽게 들킬 일인 것 같소만.”

“역시, 마리에트 천태상상위원이십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그저 그들이 소유한 검은 잔을 파괴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단, 여기에는 그들이 결코 도시를 나가면 안 된다는 제약을 걸어야 합니다.”

“그정도라면...”

나쁘지 않았다. 번거롭지만, 수긍을 할 수 있었다. 부담감도 책임감도 적다. 감금한다면 다른 도시의 엘프들에게 들키기도 어렵다. 방문자 엘프라고 해봤자 아무리 높은 계급이라도 1만년 이상의 삶을 산, 데셈 아노스 정도뿐이다.

다른 도시에 사는 퀸쿼진타나 센툼 밀라아는 결코 자신의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 떠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계급 이동, 사회 이동이 고정된 만큼 도시별 인구 변동은 5만년 미만의 사회 계급에나 있었고, 그 비율도 1만년 미만의 나이를 지닌 노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렇기에 그들은 수긍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노멤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데셈 아노스도 소수에 불과했다. 다수를 상대로 소수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소수인 ‘척’하는 다수가 있을 뿐.

진짜 소수는 그저 잊혀갈 뿐이다.

“검은 신전은 센툼 밀리아가 순번을 정하여 관리, 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다는 걸 모두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주변이 금방 웅성거렸다.

“지금 우리보고 노동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검은 신전은 누가 지킵니까?”

“단단히 봉해두면 될 일 아닙니까! 또 여기 있는 분들에게 모두 검은 잔을 보급하면...파괴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실로 영악해 보였지만, 후일을 생각하지 않는 얕은 생각에 불과했다. 리스크는 언제나 있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0%는 없다. 0%처럼 보여도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드코라르바의 행방이 묘연하지 않습니까?”

“이미 도시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모든 ‘힘’을 다해서 조사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믿음직합니다. 드코라르바가 저희 손에서 떨어져 나간 이상, 저희는 지금 가진 걸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검은 신전은 파괴되지 않았고, 검은 잔 또한 계속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개인용이지만, 이를 드코라르바가 변형,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우리의 노력은 헛된 것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에 대한 존재를 최소한으로 중앙에 알려서 추적하도록 만들어야지요. 두 가지 모두 취할 수 있습니다. 또 저는 그가 부작용을 알고, 개인용으로 개발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다르게 사용하지는 못할 겁니다.”

“의장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잘 알지만, 그래도 센툼 밀리아가 순번 엘프처럼 검은 신전을 지키는 것은 좀...퀸쿼진타(5만년)에게 이를 맡기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면 데셈 아노스(1만년) 중에서 엘프를 선별하여 뽑는 것도 있습니다.”

웅성웅성.

단번에 소리가 커졌다. 자신에 대한 일에 크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라인홀트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했다. 일반적인 회의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드낙은 어둠 속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그는 주인공처럼 등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순간 밝은 빛처럼 보이는 라인홀트가 단상에 섰을 때, 어둠처럼 뚝 떨어져서 크게 자신을 드러내며 연출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허세충, 길빵충. 모두 겉멋에 뇌가 돌아버린 자들이었다.

어둠이 뚝 내려앉아 라인홀트의 목을 움켜쥐고, 디아볼로스로 만들어버리거나 당당하게 문을 통과해서 이 회의소에 등장해도 드낙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

얻는 것은 빠르게 도시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점.

잃는 것은 드낙의 피와 업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디아볼로스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렇게 되면 전철(前轍)을 밟는 것이나 다름없다.’

라인홀트가 나타났으니, 회의가 끝나고 돌아간 놈을 휘어잡으면 그만이었다.

탕탕탕.

의사봉(議事棒)을 3번 내려치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빨리 정하시오. 하루가 늦으면 다른 도시에 간 드코라르바가 또 똑같은 짓을 벌일 것이 분명하오.”

그 말에 결국 노괴들이 항복했다. 체면보다는 실리를 추구해야 할 때였다. 누구나 엘프신이 될 길이 열렸는데, 아웅다웅 머리채를 뜯고 시간을 허비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리산드로스의 말대로 검은 잔의 보급은 엘프들의 사회를 붕괴시키고 개인 사회로 만들어버릴 힘이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강력한 유혹이었다. 그게 그들을 항복하게 하였다.

초월자에 대한 열린 길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냐면 단번에 회의가 척척 진행되어 끝날 정도였다.

라인홀트는 수많은 이들의 보호를 받으며 10개의 지하 관문을 지나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다음에 수 개의 방범 장치를 통해 주변과 자신을 검사하고 나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의 집은 도시의 중심부에 있었고, 3층짜리 주택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내부를 볼 수 없었고, 마법으로 인해서 집 안에 들어온 사람은 화창한 여름 날씨에 노출된다.

라인홀트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가 여름이었다. 더위 속에서 시원한 얼음과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며 서늘하게 지내는 것만큼 재밌고, 행복한 게 없었다. 남들은 낭비라고 생각하겠지만, 라인홀트의 신분에 비하면 저급한 취미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대단한데.”

자신과 다른 이의 목소리에 라인홀트의 품에서 백금카드가 튀어나왔다. 이를 손으로 잡으려고 해지만 그림자가 낚아챘다.

“어이! 이렇게 위험한 걸 가지고 다니는 건 좋지 않다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봤음에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까닭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드낙이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크윽?!”

늪처럼 발이 가라앉고, 팔이 묶였다. 그림자가 들러붙으며 전신을 속박했고 라인홀트의 양다리가 좁혀졌다. 강제로 굴복시켰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드낙이 그 앞에 의자를 끌고 앉았다.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허세를 잔뜩 부렸다. 분명 큰 회의장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지 못해서 여기서 그걸 풀려는 듯했다.

“드코라르바...! 당장 이걸 풀어라, 넌 지금 나와 적이 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엘프는 적과 결코 대화로 풀어가지 않는다.”

그 기백을 본 드낙은 아쉬움을 느꼈다. 역시 디아볼로스가 안 되면 엘프 노괴를 회유할 수는 없는 듯했다.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볼 만하지. 센툼 뭐시기 놈들의 대표니까. 그들 심리를 대변해줄 수 있어.’

“언제든지 풀어줄 수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진실된 답변을 원한다.”

드낙의 거침없는 언행을 보며 라인홀트는 덜컥 겁이 났다.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반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즉...

‘여차하면 날 죽이겠다는 소리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인홀트가 이내 대답했다.

“...질문에 따라서 대답해주겠다.”

“좋아. 협조적이군.”

드낙이 희희낙락해 했다. 엘프답지 않은 감정의 표출을 보며 라인홀트가 먼저 물었다.

“초월의 문이 열린 대신에 엘프는 더는 엘프가 아니게 되는 건가?”

“그건 개체마다 다르지. 천박한 놈은 천박하고, 고귀한 자는 고귀하다. 변한 건 자신이 지닌 힘뿐이다.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음...”

“그리고 내가 묻는다고 했을 텐데? 만약 진화학파의 힘을 인정하고, 보급하기 시작한다면 영혼 제국을 모든 엘프가 동원되어서 끝낼 수 있을 것 같나?”

“어렵겠지. 차라리 센툼 밀리아(centum milia)에게 특권을 주고 그들을 회유해라. 그렇게 한다면 퀸쿼진타(Quinquaginta) 이하의 계급을 전쟁에 동원시킬 수 있다.”

“그 정도로도 영혼 제국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생후 1년 된 엘프를 보내면 그만이다.”

“...!”

“상품으로 ‘제작’된다고 해도 상관없는 게 엘프의 탄생이다. 언제든지 그 숫자를 늘릴 수 있지. 1년 만에 수백만의 전력을 갖출 수 있다. 그게 우리 엘프 제국의 힘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지 않지?”

“남은 놈들이 문제가 될 게 뻔하지 않느냐. 철저한 세대 간의 인구 균형은 사회 안정을 위해서라도 필수적이다.”

그 외에 드낙은 온갖 질문을 해대었다. 라인홀트가 그의 노림수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중에는 사회 계급을 무너뜨릴 경우에 대한 질문도 있었고, 은둔하여 오로지 선별 받은 이만 엘프신으로 만들 경우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현대인인 드낙의 무궁무진한 헛소리와 위협적인 질문들 그 속에 존재하는 가벼우면서도 곱씹으면 무서운 공산주의에 대한 흉험함과 인간이라는 종족이 생각할 법한 악독하고 더러운 질문도 많았다.

“엘프가 지닌 마력 인자를 제거해서 그들을 하등 엘프로 만들어 방위를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그렇다면 다른 엘프 계급도 좋아하지 않겠어? 천년 미만의 삶을 산 엘프들 또한 그들을 지배하며 재미난 삶을 살 수 있겠지.”

엘프의 위대함에 칼을 들이밀어 피를 내는 질문도 서슴없이 했다.

“그마안! 더는 네 질문을 못 들어주겠다. 품위도, 위대한 종족이 말할 종류의 것도 되지 못한다!”

라인홀트가 진절머리를 내자 드낙은 만족한 듯 물러섰다. 그리고 그를 속박하던 것을 제거했다.

‘영혼 제국도 지워버리고 동시에 피라미드 계급 사회를 개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내 알 바도 아니다.’

엘프 놈들의 생태를 보고 나서는 그들을 부하로 삼고 싶은 마음이 적어졌다. 뭔가, 자신과 태생부터 달라서 짜증 난다고 하는 게 더 옳았다. 누구는 백수질도 길어봤자 10년인데, 이놈들은 10만년 백수질 한 놈도 분명 있을 터다.

‘심심하면 몸에 있는 마력 뽑아서 칩으로 만들어서 팔면 그만이다.’

질투!

드낙은 엘프의 삶에 큰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라인홀트의 앞에 드낙이 섰고, 그대로 그 손을 움켜잡았다.

“우효옷?!”

너무나도 오랜 삶을 평온하게 지냈던 라인홀트가 생각지도 못한 쾌락의 늪에 빠졌다. 검은 잔에서 나온 혈석보다 수천 배에 달하는 쾌감이었고, 단번에 그의 머리카락이 검게 변했다.

약간 실금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몇 만년 동안 조용했던 호수에 큰 파동이 덮쳤다.

‘이것 봐라? 반응이 더 심각한데?’

“그읏...”

침까지 흘렀다.

늙으면 늙을수록 디아볼로스가 될 때 느끼는 쾌감의 수준이 현격히 다른 듯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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