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792화 (791/1,239)

강철의 전사 79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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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

조언자 나시르(Nasir)가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럴 여가도 없이 또 그의 집을 방문하는 엘프가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5만 8천 살에 가까운 최상위 포식자에 해당하는 엘프가 고개를 숙였다. 그것만으로도 나시르의 인품을 엿볼 수 있었다. 꾀죄한 복장에 백금 카드도 신분증 하나에 불과한 엘프가 들어올 생각을 못 했다.

“저는 그저 한 명의 조언자에 불과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 소개해준 이도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예. 그, 그렇다면 염치불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안심하고 걸음을 옮겼다.

“죄, 죄송합니다.”

깨끗한 저택에 들어서며 엘프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기 바빴다. 너무 깨끗한 곳에 자신의 옷에 묻은 술에 뒤엉킨 오물이 문의 끝에 걸리면서 진득하게 묻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조언자 나시르는 최대한 가볍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엘프였다.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조심하는 나시르는 보지 못했다. 그 엘프의 눈에는 왠지 모를 희망이 깃들어있었다.

“제가 상담하고자 하는 바는...”

“아직은 아닙니다.”

“예?”

니시르는 목욕부터 하도록 하고, 제대로 된 옷을 입혀주었다. 브로치도 신경 써서 내어주고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잘라줬다. 손톱과 발톱도 정돈해줬다.

이 일련의 행동을 하는 데에만 3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관리하지 않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 후련한 표정에 완전히 니시르에게 마음이 옮겨진 엘프와 그제야 통성명을 했다.

“조언자 니시르입니다.”

“뒤랑(Durant)이라 불러주십시오.”

케어를 받은 것만으로도 엘프는 자존감을 제법 회복할 수 있었다.

“뒤랑 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 그저 마력을 통해서 마력칩으로 연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것도 훌륭한 일입니다. 도시를 유지시켜 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하지만 요즘 마력칩의 가치가 점점 낮아져서 힘이 듭니다.”

“정원이라도 가꾸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노동하는 것도 취미로 삼으면 할 만합니다.”

“그건 좀...”

니시르는 능숙하게 빠졌다.

“상담하고 싶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 아, 그것이...혹시 자신의 피를...그 흘려서 자신이 받아마시면 악마가 되는지 궁금합니다.”

“어디서 그런 걸 들으셨습니까?”

“예? 그게 요즘...음모를 퍼뜨리는 엘프에게서...헤헤.”

니시르는 단호히 말했다.

“결코 악마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이 피폐해질 수 있습니다. 피를 다량으로 흘리면 큰 사고로도 이어지니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항상 생각하세요. 그럼 길이 보일 겁니다.”

“혹시...다음 주에도 와도 되겠습니까? 그 양봉일을 배울 수 있다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약이 다 차서 늦게 오셔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예. 근데 그걸 하면 마력칩을 어느 정도 살 수 있는지...”

“현재 시세로는 못해도 한 달에 100개는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전 그저 소개를 해줄 뿐입니다. 열심히 하셔야지 오롯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예!”

“마음의 안식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나시르는 최근 늘어나는 방문자 때문에 기분 좋게 웃으며 그를 배웅해주었다. 이처럼 땀이 나도록 말을 한 적은 드물었다. 동시에 엘프들의 정신적 타락과 마모를 늦추고 다시 회복시키는데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슥슥.

대문에 걸린 판을 손으로 비비자 그곳에 적힌 근무 시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조금 무리해도 괜찮겠지!’

정기 상담자도 많아졌다. 그만큼 나시르에게 기대는 엘프가 많아진다는 건 그녀의 자존감도 높아지는 일이었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 일감이 많아지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점점 엘프들이 활력을 가지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게 보였다.

멈칫.

차트를 재수정하던 나시르의 손이 멈췄다. 뭔가 싸했다.

‘이상해.’

차트를 놓고 다른 이들의 것을 정보화하여 마법진을 통해서 허공에 출력했다. 몇몇 의심스러운 것을 떼어내서 한쪽으로 쌓아두고, 나머지를 치웠다.

대부분이 가치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마력칩에 대한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보였고, 대공장장이나 대공장의 임원들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존재했다. 또한 ‘비밀’을 간직한 도둑처럼 심리가 불안정했다.

다른 경우도 있었지만 나시르는 그것마저도 예외로 두어 포함시켰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정보를 요청하여 이들의 관계도를 만들었다.

나시르의 표정이 무서워졌다.

‘이건...혹 그 소문이 진짜란 말인가?’

위원 아이누르는 정말이지 발정난 백정처럼 날뛰었고, 그 덕에 소문에 어두운 나시르도 그 소문은 알고 있었다. 아이누르의 부하들이 이 잡듯이 쑤시고 다녀서였다. 최소 아이누르보다 나이가 적은 엘프란 엘프는 다 쑤셔봤다.

나시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화학파, 검은 것. 초월자...자해와 피...그리고 마력칩...체포되는 부랑자들과 음모론자들...!’

마지막으로 인물 관계도의 교집합에 서 있는 단 한 명의 인물.

“대공장장 엠마누엘.”

도시가 들썩거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실마리를 잡은 나시르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나이가 대공장장 엠마누엘보다 많은 그녀였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금방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조언자 나시르르를 엠마누엘은 떨쳐낼 수 없었고 서로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았다.

“간단한 것이라도 내어올까요?”

“견과류와 도수가 낮은 술 정도면 됩니다.”

“예.”

엠마누엘과 뜻을 같이하고 보좌하고 있는 이가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나시르가 유심하게 쳐다봤다.

“뭐가 이상합니까?”

“아뇨. 이런 시대에 사용인이 있다는 게 의외였습니다.”

“순번 엘프입니다. 요즘 마력칩의 값이 형편없이 낮아져서 일을 안 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방탕한 순번 엘프들의 노동력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영혼과 정신을 보살피는 조언자에게는 필요가 없어서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문을 열어주는 이가 날마다 줄어들었는데, 최근 들어서 증가했습니다.”

“그거 정말 잘 된 일입니다. 더는 조언자가 되고 싶어하는 엘프가 없어서 큰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씁쓸하지요. 많은 조언자가 법 때문에 쪼개졌고, 그것으로 다른 동족들로부터 신뢰를 잃었으니.”

“중립을 지킨 조언자들도 결국에는 안 좋게 끝났지만, 다시 상담하는 이들이 많다니, 크게 축하드립니다. 헌데...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혹 필요하신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의심스러워서 왔습니다.”

“의심스러워서 왔다? 그 말씀은...”

나시르는 그 뒤로 말하지 않고, 견과류와 술이 오자 조금 입에 집어넣었다.

“진화학파라고 아실 겁니다.”

“예. 허황된 헛소문이라서 음모론자들이 날뛰고 있지 않습니까?”

“천태상상위원들이 가장 골치를 아파하죠.”

“아, 십의원 데키무스(Decimus) 님과 인연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께서 들으셨습니까?”

“예. 그리고 그 음모론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워진 이들이 저한테 상담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조언자 나시르가 엠마누엘을 직시했다. 엠마누엘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와 관련이 있다고 나왔습니까?”

“예.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적으로 방문했습니다.”

“진실과 거짓을 제쳐놓고 누가 그 질문에 예라고 답하겠습니까?”

엠마누엘의 말에 나시르가 웃음을 지었다. 그 말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단정히 허리를 세우고 말했다.

“긍지 높은 엘프가 눈앞의 위험을 보고 다른 길로 가겠습니까? 그렇기에 이렇게 물으려고 왔습니다.”

“......아쉽게도 짐작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괜히 헛걸음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대공장장께서도 마음과 정신을 잘 보살피기 바랍니다. 엘프의 세대 차이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 아닙니까.”

“변하지 않을 겁니다.”

나시르는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아무 미련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를 바라보던 엠마누엘도 창문에서 떨어졌다.

나시르는 곧바로 라인홀트에게로 향하기로 했다. 그 누구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 같았지만, 라인홀트는 자신이 믿는 엘프들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나시르는 그중에 한 명이었다.

상담자들이 하나씩만 말했지만 그 조각이 모여서 충분히 엠마누엘을 압박할 수 있음에도 나시르는 급하게 나아가지 않았다.

‘엘프는 품격있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던 엠마누엘의 모습.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직 엠마누엘은 타락하지 않았다. 되돌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품격과 기품을 지키고자 했던 짧은 침묵. 그게 나시르에게는 큰 가능성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 이건 이거였다.

‘도시에 위기가 닥쳐왔다. 진화학파라니...’

얼토당토않은 종교가 대공장장까지 집어삼켰다. 이는 허투루 볼 것이 아니었다.

서둘러 대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조언자 나시르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윤곽이 드러난 진화학파의 음흉한 그림자는 너무 커져서 그저 밟힌 것에 불과했다.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상황은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실수를 해서 보인 게 아니라 감출 수 없는 지경이 온 것이다.

*

“으아아아아아!”

아이누르 위원이 고함을 내질렀다. 엘프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고, 더더욱 10만 년 먹은 엘프에게서는 아예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이누르 같은 괴짜가 있었지만 그런 모습이 다른 엘프에게 보일 리가 없었다.

철저하게 숨길 뿐이다. 하지만 아이누르의 고함 소리는 다른 엘프들에게도 보였다.

‘중노(中怒)다.’

〈상공 서무관 프란츠(Franz)〉가 식은땀을 흘렸다.

“벌써 15명의 서무관이 일을 그만뒀다! 분명히 놈들은 진화학파와 접촉했을 게 분명해!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놈과 접촉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거냐!”

“실마리는 거의 다 잡았습니다. 대공장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쪽 엘프들을 심문하다보면...”

“그게 쉽게 될 것 같나! 도시마다 할당량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곳이다! 함부로 건들 수가 없다!”

벌꿀 도시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엘프들의 눈치를 안 보고, 어느 정도 초법적인 행동이 가능한 라인홀트나 가능한 일이었다.

똑같이 나이가 많아도 그 세력 내부에서 또 위아래가 갈리는 법이었다. 도시의 시초가 되는 라인홀트나 대공장을 건들 수 있었다. 엘프 제국은 전쟁 중이었기에 생필품을 담당하는 곳조차도 중히 여겨지고 있었다.

“인력을 배분해서...”

단계별 침공이 가능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이누르의 권세가 약하다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나약함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서까지 대공장을 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부르르...!

‘감히! 날 이렇게 우롱하다니!’

아이누르가 절로 주먹을 떨었다.

숨죽인 채 백여명의 서무관이 아이누르를 쳐다보았다. 분노는 결국 사그라지지 않았고, 아이누르는 어디론 가로 가버렸다가 몇 시간 뒤에 다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그 어떤 서무관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음? 왜 서무관의 숫자가 이것밖에 없지?”

“그것이...갑자기 사퇴해버렸습니다.”

“뭐라?”

분노가 사라진 아이누르는 150명의 서무관 중 30명이 사라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자리가 곳곳이 텅텅 비어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게...”

상공 서무관 프란츠(Franz)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싫다고 나간 놈들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중노에 이어서 대노할지도 몰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이누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가만히 있다가는 다 빼앗기겠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뭔가..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천태상상위원 마리에트(Mariette)〉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 놈에게 간다. 당장 준비해!”

죄다 몰려가면 그도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또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드낙은 배를 두들겼다. 엘프 특산물 중에 하나인 엘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탄산수라니. 엘프 놈들, 이 좋은 걸 자기들끼리만 마셨다 이거지?’

술과 탄산의 만남! 놀랍게도 엘프들이 마시는 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엘프주는 탄산이 든 가벼운 도수가 깃든 달달한 술이었다.

술독에 빠져있을 정도로 드낙은 엘프주를 미친 듯이 마시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이빨이 썩어서 3개나 빠지고 다시 돋아났음에도 다시 엘프주를 마실 지경이었다.

25년 넘게 콜라를 마시지 못한 남자가 오늘 그 회포를 풀었으니 당연했다.

“반마(半魔)님. 아이누르 위원이 본격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다른 최상위급 엘프들도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래? 곧 오겠네.”

꼭꼭 숨어있는 라인홀트를 보기 위해서는 결국 큰 사달이 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드낙은 쓸모없는 엘프들에게까지 검은 잔을 보급해줬다. 물론 손해는 나지 않았다. 그들의 피 또한 업이 되어서 드낙에게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사실, 업의 수급만 본다면 닥치는 대로 잔 속의 드낙을 닥치는 대로 보급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늙은 엘프를 영혼 제국과의 전쟁에 보내지 못한다.’

엘프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엘프들과 거래를 해야 했다.

“엠마누엘이 아주 잘해줬어.”

손 하나 풀지 않고 결과를 마주보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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