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전사 78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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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완료(Evolution complete). 이제는 우습지.’
드낙이 침묵하고 있는 엠마누엘을 보며 웃어 보였다. 뿅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엠마누엘은 천국에 올라선 기분일 것이다.
실제로 엠마누엘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천지개벽(天地開闢)을 맛보고 있었다.
‘아아, 위대하고, 위대하도다.’
자신을 혹독하게 다룬 2999살의 엘프인 엠마누엘은 그 어떤 엘프보다도 강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단련하고 단련했다.
열심히 공을 탐하고, 헌신하고 봉사해서 얻은 지식 한 조각조차도 감사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엠마누엘은 그 어떤 도시의 〈대공장장〉보다도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고로, 엠마누엘은 말 그대로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일어난 일을 빅뱅처럼 크게 느꼈다. 손톱자국으로 할퀴어진 벽이 단번에 부서지며 어둠 속에 빛이 강림했다.
다른 이보다 제법 오래 그 감흥에 젖었다.
‘늙으면 늙을수록 엄청난 체감을 할 수밖에 없지.’
드낙이 절로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또 한 가지를 깨달았고, 그 덕에 더더욱 엘프 제국을 암중 지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새끼가 언제까지 감흥에 젖어있을 생각이야?’
물론 그것도 5분이 넘어가자 짜증이 솟구쳐올랐다. 2절 3절 뇌절이나 다름없었다.
“듣고 있나?”
“예. 엘프의 신이시여. 개벽의 존재이시여.”
드낙이 침묵을 깨자 엠마누엘이 몸을 숙이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낮춰 드낙을 찬양했다.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진화학파의 위대함을 입에 담았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엘프의 한계는 20만 년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았고, 아직도 엘프는 제자리에 서 있습니다. 변한 것은 지식과 물질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20만 년 전의 엘프입니다. 저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태초의 엘프를 끌어오며 오늘의 일을 드높였다.
실로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워낙 귀품이 넘치는 엠마누엘이었고, 목소리 자체에서 나오는 아우라 때문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드낙이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은 건 그런 이유가 있어서였다.
“아직 그대는 완벽한 진화를 이룩하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진화 말씀이십니까?”
“예.”
드낙은 거대한 목표를 엘프들에게 심어야만 했다. 그래야지 그들이 딴마음을 품어도 다른 일에 시간을 소모하지 않을 수 있었다.
“초월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필멸자의 마지막 염원 아니겠습니까?”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진화학파의 힘으로 능히 가능합니다. 〈그 어떤 엘프보다도 더 빨리 초월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구도에서 무조건 승리한다는 말. 그 말에 엠마누엘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솔직히 그저 디아볼로스만 되는 것만으로도 엠마누엘은 세월을 통해서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빠른 방법이 있다면...’
먼저 신이 되는 엘프가 나올 것이고 그의 마음이 흉험하면 다른 엘프가 모으는 업을 가로챌 가능성이 컸다. 죽이거나 그 신체를 탐할 것이다.
감성이 적고, 냉혈한 엘프라면 능히 가능했다. 그들에게 타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프라는 개체조차도 이제는 교미교미로 태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법으로 각 도시마다 1,800가지의 타입으로 나누어진 개체가 생산될 뿐이다.
“드코라르바 님. 저 또한 진화학파의 일원이 되어 그 첨병에 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드낙이 쉽게 이를 허락했다. 엠마누엘을 일으켰고, 그는 곧 자신의 검게 변한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색이...”
“한계를 넘은 엘프만이 가질 수 있는 머리색입니다. 벽을 부쉈다. 넘었다고 보면 됩니다.”
“황금을 넘은 곳은 칠흑과도 같은 흑요석이라...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엠마누엘의 귀족적인 비유에 드낙이 헛기침을 했다. 간지가 뇌를 잡아먹은 듯했다.
“진화학파는 그 힘을 획득하는데 강력한 선별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괴(老怪)들에게 들키지 않는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성공한다면 대단히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며 위대한 혁명입니다.”
그가 그동안 괴롭혀왔던 미치광이들을 앞지를 생각에 절로 흥분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드낙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려운 길을 갈 리가 없었다.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 노괴들은 영입해야 할 존재이지, 배척할 존재는 아닙니다.”
그 말에 엠마누엘이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리산드로스가 그를 보며 조언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십시오. 능력 위주의 사회가 만들어지면 결국 도태되는 것은 그들입니다.”
드낙이 냉큼 그 말을 받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영향력뿐, 그들 또한 나중에 자신들이 버려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들은 엠마누엘이 실로 감탄했다.
먹고 버리기.
고귀하고 고결하며 품격있는 엘프인 엠마누엘로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사악하고 비열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노괴들을 상대로 그렇게 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훌륭한 벌이었다.
“아주 좋은 생각 같습니다. 물론 오로지 노괴들 같이 죄를 많이 지은 엘프에게나 할 수 있는 벌이고, 심판이지만요.”
“예.”
드낙은 바로 수긍해줬다. 물론 드낙은 모든 엘프에게 허튼 수작질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대부분의 엘프가 일한 만큼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 못할 것이다. 드낙의 피는 얻기 매우 힘들 터였다.
‘입사를 축하한다, 엠마누엘.’
“꿀벌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는 위원들은 누구누구가 있습니까?”
드낙이 손을 비비며 먹잇감을 찾듯이 물었다. 리산드로스는 엠마누엘에게 눈치를 줬다. 그에게 꿀벌 도시에 대한 것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엠마누엘은 살짝 리산드로스와 다른 디아볼로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이렇게 자리를 양보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살짝 표했다.
6번의 목례.
기품이 넘쳤지만 드낙은 다리를 떨었다. 허례허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겹다고 느꼈다.
짝.
드낙이 서둘러 이목을 모았다. 뭘 해도 빨리빨리 끝내는 게 드낙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임마누엘은 절로 놀랐다. 박수를 치는 건 실로 경박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백금 카드를 이용해서 법원에서나 쓸법한 것을 꺼내어 드낙의 옆에 공손히 놔두었다.
“앞으로는 이목을 모을 때 이것을 쓰십시오. 의사봉(議事棒)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땅땅땅 치는 것이었다. 드낙은 이름을 몰랐지만, 고개를 제법 끄덕였다.
‘간지가 나겠는데?’
작은 나무망치를 드낙이 살폈다. 문양부터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잡아서 나무판을 두드렸다.
땅. 땅. 땅.
“......”
드낙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왠지 모르지만, 굉장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주 좋습니다. 품위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 하지만 장소가 조금 부적합하다고 해야할까...”
“결코 아닙니다. 드코라르바 님께서는 보다 더 본인의 지위를 상기하셔야 합니다. 걸어 다니는 희망이라고 말해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아, 예...”
드낙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걸 느꼈다.
“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예. 실례했습니다. 꿀벌의 도시 데브라의 의회는 수많이 존재하지만 단 3곳만 장악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위원 아이누르(Aynur)의 위원회입니다. 무명 의회라고 여겨지는 곳이며, 이 도시에서 가장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곳이기도 합니다.”
‘역시 또라이가 성공하는 법이다.’
“그는 달빛처럼 생긴 자이고, 금발을 일부러 은색으로 염색하고 다니는 괴짜입니다. 나이는 족히 10만 년은 넘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는 겁니까?”
드낙의 물음에 그가 엠마누엘이 황송하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예. 지식은 그 자체로 엘프 사회의 격이며 계급입니다. 높은 위원일수록 그에 대한 정보는 숨겨져 있습니다.”
황당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까 도시에 들어올 때 리산드로스와 다른 이들은 모든 정보가 까발라졌기 때문이다. 드낙의 표정을 읽은 리산드로스가 속으로 말했다.
[도시마다 다르지만 1만년 미만, 5천년 미만의 엘프는 정보가 거의 다 공개되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강제로 거짓 없는 삶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미친 세상이네.]
만약 엘프들이 조금이라도 감성이 강했다면? 더더욱 자극적인 일들이 일어났을 터였다.
‘끔찍하다. 끔찍해!’
드낙이 몸을 떨었다. 이 사회의 추악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왜 몸을 떠시는 겁니까?”
“지금 이 썩어빠진 엘프 사회 때문입니다. 젊은 엘프는 전쟁터로 나가 있는데, 자신의 순번이 아니라고 도박이나 하는 엘프들을 보십시오.”
“그렇게 여기실 수도 있지만, 엘프 부랑자들은 배움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병사로 쓸 수가 없습니다.”
엠마누엘이 의외로 변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허. 그럼 100만 엘프는 싸우고 싶어서 싸우러 간 것입니까?”
“예. 그들은 긍지가 있기에 엘프 제국을 타도하려는 영혼 제국을 멸하러 갔습니다. 다만, 나이가 많으면서 힘도 지식도 가진 엘프들이 전쟁터에 가지 않은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를 개혁하는 건 찬성합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부랑자들을 저렇게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지도요.”
드낙이 물러서지 않자 엠마누엘이 물러섰다. 고귀한 엘프들에게 있어서 배움을 포기한 엘프는 그저 마력을 도시에 공급하는 도시 노동자에 불과했다. 그들은 있기는 있어야 했다.
필요악인 셈이다. 엘프가, 종족 전체가 결단을 내려 〈눈 뜨지 않는 엘프〉를 통해서 마력을 공급하지 않는 이상, 그런 부랑자들은 마력칩 때문에라도 자신들의 마력을 토해내고, 도박에 놀아나고 마약에 찌들어야 했다.
‘생각보다 이상론자인가?’
엠마누엘은 드낙의 주장을 두고 고민해야 했다. 이상론자는 행동대장은 될 수 있어도, 왕은 될 수 없었다. 사회는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천태상상의회(天泰上上議會)의 마리에트(Mariette)입니다. 그는 냉혈한이며, 대적하는 정적들을 흉악하게 처리하는 차가운 뱀입니다. 가장 만나기 힘든 자입니다.”
나이 또한 알 수 없었다.
“마지막은 〈벌꿀술(Honey Wine) 의회 의장 라인홀트(Reinhold)〉입니다.”
“뭔가 약해 보이는 이름입니다만...”
가장 마지막에 나온 것치고는 너무 약해 보였다.
“그가 이 도시의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근데 왜 벌꿀술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이 도시에 가장 먼저 생긴 위원회입니다. 도시 이름과 함께 만들어진 의회이기도 합니다.”
도시와 함께 출범했다. 작은 마을이 수많은 세월을 거쳐서 이렇게 도시가 되었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진화시킬 수 있다면, 도시의 절반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디서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드낙이 절로 입맛을 다시며 군침을 삼켰다. 시작이 절반이다라는 말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 자였다.
“그는 조언자에 족하고 있어서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당장으로서는 어떤 방식을 취하든 만나기란 요원합니다.”
“허어.”
드낙이 탄식했다.
지름길이 보이는데 그곳으로 못 간다니?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물론 탄식 이후에는 바로 라인홀트부터 노릴 생각을 가졌다. 자신은 반마였다. 엘프 따위가 어디서 감히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건가?
‘어림도 없는 소리!’
드낙은 누구보다도 빨리 이 도시의 시작을 알린 고대 엘프를 제1 표적으로 삼았다.
“드코라르바 님. 도시를 확보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3인의 중요 인물에 대해서 말한 뒤에 엠마누엘이 질문을 하나 했다.
“고대로부터 만들어졌고, 그대로 굳혀진 계급 사회를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오로지 실력위주의 경쟁 사회. 그게 제가 원하는 사회상입니다.”
“괴짜이기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아이누르 위원과의 만남을 주선해보겠습니다. 그는 기행을 하기 때문에 이를 잘 이용하면, 쉬이 만남을 꾀할 수 있습니다.”
엠마누엘은 그가 원하는 답을 들었다. 그리고 내일을 기약하며 순순히 물러갔다.
그가 떠나자마자 드낙은 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를 가실 생각이십니까?”
“라인홀트를 만나러. 그놈만 타락시키면 모든 게 쉽게 끝날 수 있다.”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지...”
“그에 대한 판단을 하려면 정보를 더 획득해야 합니다.”
“허허. 그것참 재밌는 농담이다.”
드낙이 웃었다. 자신의 피를 거부할 엘프가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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