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전사 784편
<-- -->
남부 왕국은 초기에만 반짝 저항했고, 그 뒤로는 저항하지 못했다.
지역유지들은 백기를 들었고, 시민들은 전란의 피해가 자신들에게 오지 않음에 감사했다.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겨울이 지금보다 더 무서웠다. 중산층도 많이 몰락했으며, 정치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되지 않았다.
거듭된 전쟁은 모든 것을 사그라들게 했다.
남부인은 이기적으로 변했고, 붉은 천을 휘날리는 민병대는 대부분이 아주 젊은이들 뿐이었다.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보급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서 도적떼처럼 다른 마을을 약탈하며 보급을 유지했고, 결국 이는 마을들의 고립주의를 더욱 곧추세웠다.
그 덕에 동부 왕국의 군대는 마을에 병사를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환영받았다.
동부 왕국의 침공에 거부감을 지닌 이들의 큰 실수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백금 기사단을 포섭하여 아라온 플래티넘을 참살, 왕위를 계승한 앨러스데어 이아손(alasdair Eason) 또한 수도의 문을 열고, 항복했다.
진군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이토록 동부군이 늦은 이유는 남부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곳곳을 돌아다녀 항복을 받아냈으며, 그들을 회유하여 수도에 집결하게 하였다.
남부 왕국의 지역 유지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은 대단히 압도적이었다.
그들과 그들 수행원이 모인 대전에서 남부 왕국은 새롭게 개편되었다.
국가가 멸망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야 거부감만 더 들 뿐이다.’
나라의 명칭은 세대가 변하기 전까지는 유지하는 게 나았고, 천천히 진행해야 했다. 모두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동부 왕국의 경우에는 이미 멸망한 땅에서 건국한 것이기에 단기간에 건국할 수 있었다. 반면 남부 왕국의 경우에는 매우 위험했다.
반란군의 궐기가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플래티넘 왕가의 끝을 알리고, 이아손 왕가를 연 앨러스데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용가치가 있지.’
이번 전쟁 이후, 최소 3년, 최대 5년을 보고 대리 정치를 하기 위함이었고, 지배의 고통을 희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대공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도로의 요지마다 창고를 크게 지어서 제법 돈이 많고, 퍼뜨린 사병도 상당수를 몰래 보유하고 있는 ‘창고 상인 크사퍼(Xaver)’가 세리안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보석함을 건넸다.
그녀의 부관이 이를 받아들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축하 고맙소. 내 익히 그대에 들어서 알고 있소. 도로 감독관이 돼보는 건 어떤가?”
“말씀만으로도 감격하여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남부 왕국은 4개의 지방으로 나누어지고, 4명의 대공이 다스리게 되었다. 중앙 집권이 무너진 것이다. 퇴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각 지방의 지역 유지들은 각 지방을 다스리는 대공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으며 새로이 생긴 수많은 직책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단순히 보석함이 아닌, 계속된 조공을 그가 뒤이어서 약속했다. 세리안이 도로 감독관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청탁금을 가늠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합당한 거래였다.
크로체타 대공(Crocetta grand duke)이 된 세리안은 특히나 신지방인 크로체타의 모든 지역 유지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경쟁이 아닌 선별로 경쟁 구도를 칼처럼 잘라 단번에 지역 유지의 승패를 결정짓는 모습을 보여줬다.
영향력을 가진 지역 유지임에도 흥망이 더 강한 권력자에 의해서 재단되는 것은 흉악한 사자의 아가리에 물린 토끼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 남부 왕국의 무인이며 관리이기도 한 기사들도 세리안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녀는 왕을 죽이는 데 큰 역할을 한 백금 기사단의 감사장(Platinum Knightage Auditor)이기도 했다.
당연히 동부 왕국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직책이었다.
남부 왕국의 중앙을 대표하는 백금 기사단을 유지하기 위한 비책이기도 했으며, 세리안의 무력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아크온은 아델하이트 지방의 대공(Adelheid grand duke)이 되었고, 그는 세리안에게 백금 기사단을 주는 대가로 서부 개척 백경백(West pioneer Margrave)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북부의 식솔들을 마물로 황폐해진 서부 개척 및 개발을 하며 큰 부흥을 꾀할 수 있었다. 검은 뿔쥐들과 영토가 겹칠 수 있었지만, 지하 종족인 검은 뿔쥐는 검은 돔 인근의 지방만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왈데마르 공왕은 하르트빈 지방의 대공(Hartwin grand duke)이 되었다. 그는 남부 항구 총대장(Southern harbor The chief captain)이 되었으며 항구에 대한 절대적인 권익을 손에 넣었다.
이는 하루라도 빨리 동부 왕국에 있는 항구에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최대한 밀어주는 게 당연했다.
동시에 이아손 또한 살아남아서 한 축을 맡았다. 허수아비 대공이었다. 그는 제더카이어 지방의 대공(Zedekiah grand duke)
이렇게 동부 왕국은 남부 왕국의 전쟁을 종결시켰다.
외세로 인하여 종결된 내란이었기에 많은 대책이 남아있었다.
지역 유지들은 직함을 받고, 하나둘 반쯤 수복된 수도를 떠나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세리안은 검은 양피지를 훑었다.
‘새도우 위스퍼.’
양피지의 상태는 형편없었다. 쿰쿰한 냄새도 났고, 흙에 긁힌 흔적도 있었다. 취급에서 험하게 다뤄졌고, 그만큼 급하게 세리안에게 전달되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졌겠지.’
드낙의 출정이다.
엘프 제국을 이용해서 영혼 제국을 타격한다고 적혀져 있었다. 고로 동부 왕국과 남부 왕국을 잘 부탁한다고 적혀져 있었으며, 내전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무분별한 암살과 쓸데없이 피를 흘린다면 돌아와서 대가를 받겠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걱정이다.’
세리안이 드낙을 걱정했다.
그는 결코 큰 그림을 보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엘프 제국에 그가 가서 뭐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더 빠르게 남부 왕국을 정상화해야겠어.’
그녀가 서둘러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이제 남부 왕국은 오롯이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중에서도 강력한 수단이 세리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마, 이 검은 양피지를 받은 다른 이들도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톤드라 가문이 하는 해양 교역. 그걸 남부 왕국 전체의 역량을 투입해서 빠르게 정상화한다.’
남부 왕국은 해양 교역에 투입되고, 몽펠리에를 통해서 북부는 서부로 향할 것이다. 그곳은 황폐해진 곳이며 남부 왕국의 영향력이 소멸된 땅이었다.
인간은 미친 듯이 뻗어 나갈 것이다. 더더욱 드낙이 엘프 제국으로 향했기에 걱정이 큰 만큼 권력자들의 입술이 타들어 갔다.
무슨 사고를 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
진화학파의 드코라르바(Dcolarva)가 된 드낙은 하품을 했다.
“크하아아암!”
엘프의 영토로 향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나도 지루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디아볼로스 장군 리산드로스와 5명의 디아볼로스는 착실하게 드낙을 가르쳤다.
“엘프를 상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본심을 대놓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회의나 목적을 띈 자리에서는 상관없지만, 사적인 곳에서는 감정을 결코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약자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드낙이 생각보다 향상심과 학문을 공부할 마음이 없다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흐아아암! 조금만 외우려고 해도 하품이 나오네.”
그들로서는 황당할 노릇이다.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인데 생각보다 드낙이 체득하는 게 느려서였다. 종족이 완전히 달라지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짚고 넘어가야 했고 드낙은 이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특히 엘프들은 정신이 나간 놈들이었다.
‘간지에 뇌가 먹혀버렸나.’
복장을 입는 순서. 예장(禮裝)이라 불리는 예스럽고 확실한 순서가 정해진 옷의 부속품이 특히나 많았다.
무슨 사제가 걸치는 굵은 스카프부터 작은 브로치의 모양까지 그 컨셉이 하나하나 정해져 있었다.
드낙이 평가한 것처럼 엘프의 민간 사회는 멋스러우므로 가득했다.
‘잉여 자원이 넘쳐난다는 뜻이겠지.’
마법 때문에 굶을 수가 없고, 일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며 그것도 싫은 엘프는 마력을 도시에 바치면 그만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수천 년을 살아가는 엘프도 존재했다. 종종 도시 밖에서 자유인처럼 살아가는 엘프도 종종 도시를 들러 마력을 토해내고, 필요한 걸 얻을 수 있었다. 가치가 비싼 아티팩트라면 마력을 며칠 동안 상주하며 도시에 부여하고 얻으면 그만이다.
“천국이 따로 없는데.”
“그렇게 보실 줄은 모르지만, 매 세대 자살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어둠 또한 엘프들에게 존재했다.
결국 나이와 지식의 양으로 모든 게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늦게 태어나면 더는 사회의 위층으로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세월을 통해서 쌓아온 영향력을 극복할 수 없었다.
“삶에 의지를 잃은 엘프라면 디아볼로스가 되고 싶어 할 겁니다.”
“그렇겠지.”
드낙이 손을 주억거렸다.
엘프들의 삶은 들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가치한 영생.’
목이 베이지 않는 한 죽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불멸과 닿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리는 백색으로 변하고, 피부는 주름지게 되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는다. 또한 그 노쇠도 숙성된 와인처럼 적정선에서 끝난다.
“가장 가까운 엘프 도시는 언제 가는 거야?”
“문화를 좀 더...브로치의 50종류에 대해서는 이제 다 외우셨습니까?”
드낙이 뒤로 벌러덩 뒤집혔다. 눈을 감았다.
숨이 막히는 엘프들의 사회가 브로치 50종과 함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기분 나빴다. 마치, 상류층의 사회에 들어가는 거지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처음은 좋아도 그 예법에 머리가 돌아버릴 것이다.
“원정대는 전혀 그렇게 화려해 보이지 않았는데.”
백금 카드를 소지할 혁대와 백색의 경복장이 엘프 원정대의 기본이다. 제대로 전투에 향하는 경우에는 엘프들의 최고 마도학이 집중된 전신갑주를 입는다. 현재에는 청철 갑주였다.
드낙의 말에 디아볼로스 장군 리산드로스가 대답했다.
“감히 인간 따위에게 엘프들의 멋스러움을 따라 하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랄맞은 이유구만.’
뭐라도 엘프들의 것을 훔쳐서 모방하는 게 인간의 발전 방식이었다. 제국이 그러했다.
그 덕에 인간 세상에 노출되는 엘프 원정대는 단출한 복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고가치품으로 여기는 백금을 카드로 써서 장비의 모습을 카드 형식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냥 그때그때 지적해줘.”
“예?”
“텔레파시처럼 서로의 의식을 전달할 수 있으면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대화할 수 있잖아. 그걸 이용하는 거지.”
전화기처럼 드낙과 리산드로스를 비롯한 다섯 명이 서로 연락이 가능하게 만든다면 드낙이 이렇게 엘프의 문화를 배울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디아볼로스 6인 또한 드낙의 배움이 느리다는 걸 알았기에 냉큼 고개를 숙였다. 이러다가는 반년 동안 엘프 도시에 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에헴.”
드낙이 눈을 감고 어디서 본 거는 있어서 거부좌를 틀었지만 잘되지 않아서 그냥 다리를 풀었다. 코를 슥슥 비볐다.
‘귀와 입을 피의 거미줄을 통해서 전하면 그만이지.’
말하는 것, 듣는 것.
이 두 가지만 가능하게 하면 그만이었다. 서로의 입과 귀가 능력을 통해서 그릇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한 명한테만 보낼 수는 없네.”
7명 모두 귀와 입의 능력을 통해서 말하고 들어야 했는데 그게 통일되어있었다. 한 명에게 전화가 불가능하고 한번 말하면 7명에게 모두 전해지는 식이었다.
“다행이라면 힘을 써야 해서 필요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 불편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더 다듬기에는 드낙의 실력과 격이 일천했다. 그렇다고 중립신에게 부탁할 정도의 능력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좋아, 잘 들리나? 모두 대답해봐라.]
드낙의 말에 6명이 똑같이 네라고 대답했다. 서로서로 자기 할 말만 하면 엄청나게 혼잡할 수 있었지만, 그 정도까지 혼잡한 상황이 올까 싶었다.
“가장 가까운 엘프 도시는?”
“꿀벌의 도시, 데브라(Deborah)입니다.”
드낙이라는 맹독이 엘프의 도시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5767자
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