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전사 77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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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낙이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만약, 중립신이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가 엘프 1만5천을 해결해준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둘은 동등한 위치.
드낙을 막으려면 드낙 대신 그가 나서야 했다.
그러나-.
중립신이 나설 리가 없었다.
“엘프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진화시키는 것과 그들을 막는데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 거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이 내려옴으로써 검은 뿔쥐가 피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날 막고 싶다면 네가 대신 엘프 침공군을 처리해줘야지. 혹시 알아? 중립신의 말이라면 잘 들을지.”
“어리석은 도발이다.”
드낙의 적의에 중립신은 단답했다. 반면 드낙은 입을 주저리주저리 털기 바빴다.
“분명 북부 인간과 엘프들을 죽여서 업을 먹고 싶어서겠지. 안 그래?”
“그렇게 먹어도 아직도 부족한가? 중립신! 테라는, 어느 정도로 거대해야 하는 거냐? 나중에 가서는 너도 행성에 녹아야한다면서...? 그게 아니라면 딴생각이라도 하고 있냐?”
드낙이 중립신의 대업에 먹칠했다.
“당연히 그렇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방위를 위해서 필요한 업이다. 그대가 떠난다고 했으니, 차원계 전체를 잠글 생각이다.”
“전에 했던 얘기랑은 다른데? 외계 행성에서 내가 자리 잡고, 테라를 지키게 한다며? 왜 이렇게 혓바닥을 자꾸 바꿔?”
“전략은 언제나 유동적으로 변경해야지, 불패(不敗)하는 법. 그냥 그대는 다른 차원계로 가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중립신은 드낙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저런 자를 방패로 삼는다면, 저자의 피를 받아먹은 자들에 의해서 테라가 침공당할 것이 뻔했다. 생각보다 심각할 정도로 호구였다.
초월자의 문턱에 들면서 그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순식간에 대업을 부드럽게 수정했다. 능히 가능했다.
이제 중립신을 막을 존재는 엘프뿐이었다. 그 엘프를 치는 건 영혼 제국이 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생각보다 드낙은 훨씬 우월한 ‘말’이었다.
쓰고 버리기 딱 좋았다. 그는 훌륭한 대업(大業)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물론 지금은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드낙을 막아야 했다.
‘더는 타락 엘프를 키우면 안 된다. 위험하다.’
오우거와는 달랐다.
마력과 마법, 초월의 힘에 재능이 기울어진 엘프는 결코 그 성장 가능성이 열리면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러기 위한 개입이었다.
힘을 얻기 전의 드낙은 매사를 사냥꾼처럼 더듬어갔지만, 힘을 얻은 드낙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화물트럭이 국도를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하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다.
“오우거와 같은 종족값을 지닌 엘프를 타락시키는 건 무조건 안 좋은 일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들을 모두 포섭한 뒤에 패를 갈라 서로 죽이게 하여라. 그게 상책(上策)이다.”
검은 뿔쥐도, 인간도 피해를 보는 일 없이 엘프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기껏 내 피를 줬는데 반반 갈라서 죽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냐?”
“그게 최선책이다.”
중립신의 담담한 말에 드낙은 자신도 모르게 분노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넌 그렇게 생명을 하찮게 보는 거냐. 너에게 있어서 필멸자는 뭐냐.’
필멸자를 위한 테라를 세우며 자신마저 죽여 녹이는데, 그 과정 속에는 차가운 냉기밖에 흐르지 않는 행보와 결정뿐이다.
그 모순을 드낙은 견딜 수가 없었다.
중립신은 차근차근 드낙을 설득했다. 엘프의 무서움을 계속 논했다.
“3천의 타락 엘프는 힘을 모으면 지금의 너를 고꾸라뜨릴 수 있다. 그걸 인지하지 못하느냐?”
“나에게는 검은 뿔쥐가 있다. 레우치터도 있지. 놈들이 배신하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
“마신장 발라쿠 같은 존재가 타락 엘프에게서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어쩔 생각이냐?”
“특출난 한 놈은 엘프에게서 나오기 힘들어. 내가 주는 피의 양에 따라 달렸지.”
“어리석다. 무모하다. 말로는 누구나 말할 수 있지. 당장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는?”
“통수 치기 전에 보내버리면 그만이다. 아니면 미리 그런 약조를 하면 간단하지.”
중립신의 밀랍 같은 얼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말전도구나. 그리하면 네가 엘프에게 투자한 피와 업은 공(空)으로 돌아간다. 허면, 내 말대로 서로 죽이는 방법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모순이다.”
“응. 근데 내 손으로는 안 죽일 거야. 그냥 그럴 거야. 어쩌라고.”
논리로 접근해도 드낙은 한결같았다.
“꼬우면 네가 엘프 침공을 막아줬어야지. 왜 내가 엘프를 타락시키게 만드냐고. 어차피 너도 인간과 엘프의 업을 먹으려고 날 막으려는 것 아니냐.”
당연히 중립신으로서는 드낙이 엘프를 타락시켜서 강화시키는게 좋았다. 그 강화된 격과 업은 죽어서 중립신에게도 향하기 때문이다. 비단 드낙만 핥아먹는 게 아니라 중립신도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드낙이 키우고, 중립신은 지켜보다가 숟가락 얹는 셈이다.
그걸 알고 있는 드낙은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다.
‘전보다 더 심해졌다.’
한 번 꼬장이 통하니, 이번에도 그냥 행패를 부렸다. 죽일 테면 죽이라는 식과 다를 게 없었다. 중립신은 세파리아스에게 분노를 느꼈다. 쓸데없이 범인(凡人) 따위에게 죽음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이끌어주는 자가 없으면 잡초처럼 밟혀야 하거늘.’
드낙은 큰 것을 깨우쳤다.
그게 꼬장으로 돌아오는 게 정말이지 짜증 났다. 하지만 이를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잠자코 있는 중립신에게 드낙이 배를 깠다.
더 강한 액션을 취했다.
“아따 사람 어디 갔나? 언제 째려고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하나.”
“엘프에게 힘을 소모하는 건 네 목을 스스로 조이는 일인 걸 모르느냐? 초월자는 업을 소중히 사용해야 한다. 엘프에게 주는 피만큼 너의 업은 그만큼 소모된다.”
드낙이 드러누워 있다가 상체만 딱 일으켰다. 그의 눈은 매우 진지해져 있었다.
“맞다. 중립신, 네 말대로 엘프에게 피를 쓰는 만큼 내가 지닌 업은 소모된다. 그리고 너는 계속 나에게 업을 소모하게 하고 있지. 안 그런가?”
“인정한다. 나 또한 그래 왔다.”
“네가 그렇게까지 내 업을 가져가는 이유는 내가 뒤통수를 칠까 봐서가 아니냐? 솔직하게 털어놓아 봐라.”
“전에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 이야기는 끝났다.”
드낙은 그가 말하면서 생긴 감정을 캐치해냈다. 그리고 홀린 듯이 말했다.
“중립신, 넌...내가 변했다고 생각하는건가? 세파리아스 때문에? 내가?”
“뭐라고?”
그 반문에 드낙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어대었다.
엄청난 촌극이 일어났다.
“아하하하하하! 이거 미치겠구나! 아! 그런가! 그래서, 나에게 검은 꿈을 통해서 만남을 먼저 제안한 건가! 내가 엘프를 통해서 뭔가를 꾸밀거라고 여기는건가!”
드낙이 눈물마저 찔끔 흘렸다. 그리고 서둘러 몸을 정돈하고 그를 보며 말했다.
“이걸로 확인했다. 넌 정말이지 진지한 신이다. 네가 인간들을 지배하고 보살피는 모습을 보고 싶을 지경이다. 그건 분명 황홀한 세상이겠지!”
분명, 눈이 부실 정도로 따스한 세상일 터였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중립신의 통치를 받는 필멸자들의 세상이라는 것은. 하지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왕(魔王) 발라쿠가 만든 피의 호수가 흉터처럼 이 대륙에 남아있었다.
중립신은 뛰어난 전략가이기에 중립신은 모든 요소요소, 작은 것 하나까지 눈에 담는 존재였다. 그것이 얼마나 피곤한지 드낙은 생각만 해도 귀찮음이 쏟아져나왔다.
드낙의 말에 중립신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 거지? 강자(强者)로 대우받고 싶어하는 게 너의 동기 중 하나가 아닌가?”
조금 핀트가 어긋난 말이었다. 중립신은, 아직도 드낙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맞다.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강해지고 싶은 건 누구나 똑같지. 하지만 그건 월급 300만원 같은 것이다.”
“...월급 300만원...이라고...?”
“그렇다. 인간의 강함은, 월급 300만원까지다. 그 이상은 필요가 없다.”
“무슨...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박호훈.”
중립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업, 대계, 대웅, 대해.
오로지 큰 것만을 보고, 큰 것만을 품는 중립신은 결코 그 작은 마음을 파악할 수 없었다. 특히 초월자가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건 중립신조차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매달 300만원씩 받기 시작하면 인간은 더는 노력하지 않고, 안주하게 돼버린다. 그건 절대법칙이나 다름없고, 특별한 외부요인이 아니면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내 피를 엘프들에게 쓰는 것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드낙은 이미 연봉 1억 아니, 5억 10억의 벽을 넘어섰다. 그는 더 대단해진다는 것에 대한 갈망감이 적었다. 단지, 세파리아스나 중립신. 엘프와 영혼 제국이라는 ‘상황’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다.
드낙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어떤 놈이 자꾸 옆구리를 패서 살려고 몸을 비틀고 있을 뿐이다.
“또한! 피를 쓰면 쓸수록 널 뒤통수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된다. 동시에 내가 신격을 얻는 시간은 한세월이 넘어가니 그대가 내 신격을 빼앗는 것도 불가능하다. 약해지는 것으로 얻는 것이 이렇게 있는데, 내가 왜 그렇게 업에 미쳐야 하지?”
“......신격까지 내다보고 있었나?”
“그래. 테라에 대한 준비에 정신 팔린걸 보고 두려웠지. 네가 죽을 때, 갓 신이 된 내 신격마저 녹여버릴지 누가 아느냐? 그러지 않을지 누가 보장해주느냐?”
“난 약속하지 않았나.”
“너 또한 약속했지만, 계속 뒤통수 때릴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았나. 지금도 마찬가지지. 넌 내가 엘프에게 접촉하니까 나한테 간섭해왔어. 약속을 언제든지 없었던 것처럼 할 수 있다고 여기는건 너가 이렇게 먼저 보여주고 있어.”
중립신의 무미건조한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드낙을 의심한다는 건 곧, 그와 했던 약속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너한테 중요한 건 나한테 소업(小業)에 불과하다. 반대로 나한테 중요한 건 너한테 소업에 불과하다. 그 차이를 이제 알겠느냐?”
“생각지도 못한 자가 초월의 반열에 드니,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는구나. 반마에 완전히 적응되었음에도, 그럼에도 변화하지 않았다니. 여전히 그런 천박한 가치를 추구하는 거냐?”
“그래. 변한 건 없다. 난 그때 말한 것처럼 빈둥빈둥 노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수십만이 넘는 핏빛쥐의 죽음에서 배운 건 없었나? 그들의 생명이 한 줌에 사라지는 걸 보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육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띵가띵가 놀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갈망이 더 심해졌지. 그들에게도 그런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드낙은 빈둥거리는 삶을 되찾는 게 최종 목표였다.
그건 반마(半魔)가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강해졌다. 드낙의 아래에 규합하고 있는 필멸자들에게도 그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화라는 지긋지긋한 일상의 맛을 먹여주고 싶었다.
“반마로서 이제 완벽히 적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너의 근본을, 자아를 이 세상에 선명하게 남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래. 물론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내가 검은 뿔쥐들과 날 따르는 필멸자들을 데리고 가면 언젠가 도달하게 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다.”
“그런가.”
“그렇다. 그러니까 네가 엘프 침공을 막아주면 오히려 난 땡큐라는거고, 내가 하려는 걸 접어줄 수는 있다.”
다시 한 번 드낙의 진위를 파악한 중립신은 결국 검은 연기에 휩싸여서 사라졌다. 그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 또한 안심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능성의 문을 개방한 엘프를 가볍게 보지 마라.”
“그래.”
연기가 사라졌다.
큰 고비를 넘겼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주 중립신과 부딪치고 서로 의견을 내야 한다.’
오해가 쌓이면 앙금이 되고, 앙금이 쌓이면 그 검은 것은 검이 되어 상대를 노리게 될 것이다. 그걸 자주자주 빈번하게 지워줘야 했다. 힘을 지니고 있으면 적은 의심하고 싶지 않아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이런 구도가 안 생기리라는 법은 없었다. 중립신은 매사에 진지한 신이었다.
‘이제 타락 엘프에게 채울 족쇄를 구상해야 한다.’
중립신이 우려했던 것처럼 드낙도 그 우려를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자신들의 탄생에 깊게 관여한 중립신도 걷어차버린 것이 엘프였다. 호로상놈의 자식들이란 셈이다.
‘발라쿠...’
드낙은 오우거가 초월하면 어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엘프 중에서 그런 놈이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고로, 드낙은 확실하게 타락 엘프들의 충성을 받아야 했고, 보험도 들여놔야 했다. 그럼에도 드낙이 엘프들을 자신의 밑으로 데려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중립신조차도 경계하는 놈들이다. 안전하게 테라를 떠날 수 있는 카드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카드가 타락 엘프다.’
국방력을 잃은 국가는 시민이 총칼에 맞아 뒈져도 할 말이 없었다. 드낙은 자신이 흘린 피만큼 중립신에 대항할 무기도 마련해야 했다.
피를 소모함으로써 신이 되지 않지만, 반대로 피롤 소모함으로써 중립신을 견제할 힘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건 타락 엘프라는 필멸자의 세력이었다.
‘그들을 견제할 수단.’
‘실패한 낙수 효과. 그것이 타락 엘프들을 지배할 것이다.’
드낙은 대기업을 두 개 만들기로 했다. 그게 타락 엘프에게 채워질 족쇄였다.
‘맛 좀 봐라. 너희들에게 내리는 피보다, 너희들이 주는 공양물이 더 커질 것이다.’
선순환이 아니다.
드낙만 이득을 보는 잔혹한 낙수효과가 타락 엘프들을 짓누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드낙이 내리는 피는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저 밑으로 잘 흘러내리지 않을 뿐이다.
‘대기업의 횡포. 그것을 통해서 엘프를 제어한다!’
모든 타락엘프에게 드낙의 피는 돌아가지 못할 뿐인 음모였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잘 통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드낙이 피부로 겪어봤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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