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전사 77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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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은 꿈을 꿨다.
그건 화려하던 자신의 은퇴였다. 중간에 끼였지만, 그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다.
동아줄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나은 것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기회를 잡는 방법은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겠다고 손을 들어야 했다. 남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기회를 잡지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는 그는 그렇게 남들과 다르게 성공했다.
“은퇴한다며? 불강.”
서민들이 찾는 술집에 보기 힘든 풍채를 지닌 자가 거침없이 다른 테이블의 의자를 가져다가 끌어서 앉았다. 거침없는 행보였지만 그 테이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척 봐도 귀족임을 알 수 있어서였다.
“아, 아니! 기, 기사님께서 여기까지 왜...”
“그대의 노고를 그냥 놔두고 갈 수가 있나. 그건 나! 볼바룬의 명예에 어긋나지!”
“실로 화통하십니다.”
병사 출신, 혈연 학연 지연. 아무것도 없는 불강은 그렇게 위대한 기사가 마지막 은퇴에 술까지 마셔주는 커리어를 획득했다.
“독은 말이야...기사의 최대천적이지.”
기사 볼바룬이 제법 취기가 오른 상태로 말했다.
“예. 정면은 당연히 답이 없지 않습니까? 황소에게 밟혀도 독사는 황소를 물고 죽는 법이죠.”
“흐흐. 그렇지.”
볼바룬은 작은 목함을 꺼내서 건네줬다. 시선이 모였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자네 이름을 적은 내 가문의 작은 징표네. 나무로 된 것이라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상당히 공을 들였지. 물론 남이 가져오면 아무 소용이 없지. 가치도 없어.”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술집의 이목이 사라졌다.
“기념품이라고 생각하게. 남들에게 자랑하기 좋을걸세.”
“이런 걸 다...”
목함을 열었다. 돌출된 강철 장식 속에 사각형의 녹색 사파이어가 있었다. 서둘러 닫았다.
“감사합니다.”
“수고했네. 불강. 자네가 없어지면 그간 편히 지냈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소리가 내 귀에 선하게 들려오는군.”
“하하하. 그 모습은 한번 보고 싶습니다.”
독에 대한 강력한 내성을 지닌 불바룬은 그렇게 제법 비싼 마법 아이템을 그에게 줬다. 그것이 노병을 살아남게 했다.
새하얀 연기가 마을을 강타했다. 조용히 시작된 급습. 적군이 없는 전투.
소리 없는 경기병의 질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괴이한 현상이었다. 코피를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위험을 느꼈다.
‘엘프다.’
직감했다.
영문모를 대규모 살육. 인간을 향한 적의를 노병은 단번에 느꼈다.
불강 또한 코피를 흘렀지만, 서둘러 기사의 하사품을 손에 움켜쥐고 달렸다. 손으로 가렸음에도 사파이어가 빛을 발했다. 이 빛은 새하얀 안개에 덮어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헉. 후. 헉! 후!”
계속 달렸다.
정신없이 수풀을 내려왔다. 한 바퀴 굴렀지만, 고통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흥분했던 건지, 엘프의 독에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다행이라면 그가 달리는 방향은 엘프들이 정한 구역의 밖이었다.
외곽부터 시작된 타격이었기에 불강은 계속해서 달렸다.
‘전해야 한다.’
병사는 아니었다. 은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병사로 30년을 굴렀다. 그것은 은퇴한 지 1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돈이 되는 기사의 하사품을 팔지 않은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병사 불강이라는 존재가 아직도 펄펄 날아오르고 싶어 했다.
식었을 거로 생각했던 사명감은 어느새 그의 전신을 달구었다. 휘감아 뒤덮었다.
북부는 끝없는 고통 속에서 자라나는 시민들이 많았다. 그만큼 병사로서의 사명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가 26살 때, 수풀에 뜯어먹혀 머리의 반쪽만 있는 아기의 시체를 봤을 때부터 그의 사명감은 죽음으로만 꺼트릴 수 있었다.
노쇠한 근육이 달아올랐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그 사명감 때문인지 엘프의 독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시야가 너무나도 밝아졌다.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고, 머리가 뭔가 가벼워지는 감각에 휩싸였다.
“콜록, 콜록!”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는 달리는걸 멈추지 않았다.
오감이 사라지고, 무뎌져 갔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를 거칠게 잡는 걸 느꼈다.
‘누구를 만났다.’
그가 크게 버둥거렸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거센 파도와도 같은 힘이 났다. 그리고 넘어졌다. 바닥에 손으로 덜덜 떨며 글씨를 썼다.
[엘프]
이를 쓴 그는 그제야 편안하게 온몸의 힘을 뺐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갔다.
노병의 죽음을 본 병사 2명이 그가 쓴 것을 확인했다. 까막눈이었기에 그저 가죽에 따라서 쓰는 것에 불과했지만, 결코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10년 전에 은퇴했지만 두 병사는 13년 이상 근속한 노련한 순찰병이었다.
“불강 님이다. 가벼운 일이 아니다.”
“난 마을로 가볼테니, 넌 돌아가서 전해라.”
“조심해라.”
글자로는 모든 걸 판단할 수 없었다. 순찰조가 쪼개졌다. 또한 무조건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목숨보다 중요한 건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최전방에서의 하루는 최후방의 3일과 같았다. 똑같은 시간이 아니었다.
“이랴! 하!”
그렇게 엘프 침공이 북부를 강타했다.
마을을 타고 타고, 말들이 뻗어 나가면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엘프 선봉대의 예상보다 너무 빨리 그들이 들켰다. 텅 빈 마을을 보며 이를 알아차린 엘프 선봉대는 그제야 성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흰색 독안개가 온다!”
“대피를 계속하라! 그리고 기병대애!!”
급하게 독 내성, 독 상쇄 마법이 깃든 천을 누더기처럼 두른 경기병대가 나갈 준비를 했다. 엘프들과의 교전을 통해서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엘프 침공에 대한 대응을 하려면 못해도 5일을 어떻게든 버텨야 했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산개를 통해서 그들의 관심을 얻어서 죽는 수밖에 없었다.
1초를 1명의 피로 벌어야 했다.
그 행위에 일점 두려움 하나 없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병사가 된 자들이었다.
성문이 열리고 경기병 기백이 달려나갔다.
새하얀 안개는 귀신처럼 그들을 잡아채기 위해서 넓게 퍼졌고,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려졌다.
“성으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후퇴를 해야 합니다!”
“요새 마력 보유량으로도 안 되는가?”
“그런 종류의 마법이 아닙니다!”
늙은 마법사가 소리를 치며 서둘러 도망쳤다. 그간의 인연 고리를 모두 부수는 행위였다. 하지만 성주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여기에 있어 봤자 죽을 수밖에 없었다. 개죽음이었다.
개죽음은 경기병들로 족했다.
물론 그는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이 성의 성주였다. 성을 가진다는 건, 외적을 막는다는 책임이 있었다.
메시지 마법을 가동한 채 눈을 부릅뜨며 안개가 방어 마법이 전개된 성벽에 닿는 걸 지켜보았다.
이를 전해야지 더 확실하고 정확한 대처가 가능했다.
파지지직!
“맙소...사.”
새하얀 안개는 노도처럼 들어왔다. 방어 마법은 제대로 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마치 랜스 투창에 꿰뚫린 갑옷처럼 새하얀 안개를 단 1초도 막아내지 못했다. 그저 스파크를 튀며 존재할 뿐이었다.
“새하얀 독안개는 방어막 마법이 먹히지 않습니다! 공격 마법이나 원소 마법으로 상쇄를 시도하십시오!”
[돌아오라! 그런 건 병사도 보고가 가능하다!]
메시지 마법은 도달하는 게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연결되면 즉시 대화가 가능했다.
“앞으로의 싸움은 북부에게 지옥 같은 싸움이 될 겁니다. 시작부터 성주가 도망친다면 용맹한 병사도 죽는 걸 꺼릴 겁니다.”
새하얀 연기가 성주를 덮쳤다.
권력자의 죽음은 더욱 더 아래의 사람들에게 더 화려한 죽음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녹아서 무너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과정은 너무나도 섬뜩했다.
상공에 떠 있는 엘프 선봉대 500명은 눈을 찌푸렸다.
“실로 바퀴벌레나 다름없습니다.”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800명이 넘는 병사는 후퇴했지만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대낮임에도 횃불을 들고 있었다. 혹여라도 엘프에게 자신이 안 보일 수 있어서였다.
“진절머리가 납니다.”
“일을 귀찮게 하다니...역시 인간의 더러운 심성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곱게 죽여줘도 듣질 않는다니, 어리석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걸 거부하는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같은 지성종족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멍청했다.
‘저렇게 본성에 잡아먹혀서야...’
천박한 종족이었다. 저런 종족을 왜 같은 지성종족이라고 멸하는 걸 막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인간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엘프일 게 뻔했다.
“박멸을 해야 하니, 하나하나 다 죽이긴 해야 하는데, 좋은 마법이 있습니까?”
“그냥 태워죽이면 되겠죠. 그들이 거부한 죽음입니다. 고통스럽게 죽어도 원망은 못할 겁니다. 자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지 않습니까.”
손에서 화염구가 거칠게 타오르지 않았다.
그저 달리는 병사 주위에 마력이 응축하며 물방울이 생겼다. 액체 마력은 마법진을 만들었고 그대로 광역 마법이 되었다. 땅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이 쏟아져나와 도망치는 병사들을 하나, 둘 집어삼켰다.
그런 행위를 할 때 청철(靑鐵) 갑주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빛가루가 쏟아져나왔다.
청철 전신 갑주가 지닌 힘이었고, 엘프들의 최신형 마법 체계였다. 〈행성 마법〉이라 불리는 마법이었고, 자연의 마력을 빌려 쓰는 강력한 마법 체계였다.
한계는 있었지만, 엘프들은 숫자로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뭉쳐서 사용한다면 감히, 순간적으로 신에 필적하는 힘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차피 행성에 존재하는 마력을 쓰는 것이기에 부담도 적었다.
광역 마법을 펑펑 쏠 수 있는 최강의 멸절병기가 바로 청철 갑주였다.
결코 인간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되는 갑주였지만, 인간을 멸하는 데에는 사용하기 좋았다.
*
“개새끼들이네.”
드낙이 엘프들을 욕했다. 무슨 인간을 농약으로 안락사키기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게 엘프들이었다. 동물도 그렇게는 안 죽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검은 뿔쥐들 또한 제법 피해를 봤다. 검은 뿔쥐 정보원 중 독가스에 당하거나, 포착당해서 죽기도 했다.
생각보다 엘프들의 장비가 대단했다. 엘프 원정대와는 다르게 주변 정보 획득량이 몇 배에 달했다.
‘엘프들이 더 위험한 거 아닌가?’
드낙은 두려움에 떨었다. 엘프들이 역량을 숨겼다는 게 실로 간악했고,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또 자신의 계획이 너무 허술해 보였다.
“이거 진행할 수 있겠어?”
자신이 생각했지만 절로 락테아 시오에게 물었다. 현재 동부 왕국은 남부로 진격한 상태. 대부분의 인원이 빠져있었다.
“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실패는 안 합니다.”
락테아 시오는 드낙의 모든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지는 몰랐지만, 성공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믿고 진행하십시오. 종족을 변절할 정도로 강한 유혹입니다. 그리고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평생을 꽁꽁 묶여있다가 자유를 얻었는데, 다시 스스로 묶일 사람은 없었다. 엘프도 똑같았다. 그들은 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해방감과 청량감을 드낙을 통해서 얻을 것이다.
“당신의 피를 믿으십시오! 아주 환장을 할 겁니다!”
락테아 시오의 말에 드낙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좋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한 번 해보자.”
이를 통해 락테아 시오는 드낙에게 도장을 확실하게 찍을 수 있었다. 든든한 조언자다.
락테아 시오와 드낙은 하늘에서 엘프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도망친 병사들을 잡기 위해서 크게 산개한 상태였다. 혼자 있는 엘프와 마주하게 되었다.
좋은 기회였다. 노린 것이기도 했다.
“저는 법정자 락테아 시오라고 합니다. 낙오된 엘프 원정대원이었습니다.”
“살아있었습니까? 그런데 왜 마법 정보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말씀드릴 게 많습니다.”
“뒤에 있는 엘프는...?”
“그는 400년 이상 잡혀서 고문당하던 엘프입니다. 매우 비밀리에 관리되고 있었고, 최근에 연금술과 마법에서 벗어나서 모든 게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이름조차도 기억 못 합니까?”
“예. 지금 이렇게 띄우고 있는 것도 제가 마법으로 보조해주고 있어서 가능합니다.”
“하등종족 따위가 감히 상위 종족을 포획했었다니...”
엘프가 분노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드낙을 위로하듯이 그 손을 잡으려고 했다.
‘에라, 모르겠다!’
드낙이 그 손을 냉큼 잡았다. 그리고 피를 집어넣어버렸다. 뭔가 첩보같은게 로망이어서 하고 싶었는데, 답답하고 불편할 뿐이었다.
“아!”
탄성이 엘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손을 타고 모든 감각을 초월한 쾌락이 엘프를 뒤덮었다.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듯한 존재, 격...혼의 해방감이 터져 나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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