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전사 70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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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핀 롤레온은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고, 새들도 닭도 소리를 내기 전이었다.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났네.’
왜인지는 몰랐다.
새벽이 오기 전의 세상은 가장 어두웠다. 옆에 누워있는 아내를 확인하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검은색으로 염색된 종이를 본 이스핀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다.
고독한 늑대처럼 뒷골목에서 패에 속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 그였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이유는 뭔가를 느껴서였다.
‘감이 무뎌지지는 않았다. 내가 방심하고 살아가고 있는 거야.’
사람의 직감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무뎌지지 않는다. 그 기분을 느끼고서도 행동하지 않는 건 방심해서일 뿐이었다.
종이를 이스핀이 주워들었다.
[석지 성채에서 주류업에 종사하는 32세 데르반은 자신의 딸을 탐하고,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 집에 있는 우물을 조사하고, 인간 사회의 정의를 구현해라. 이는 곧 드낙 불파겐의 업적이 될 것이다.
-쉐도우 위스퍼-]
종이를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기분 나쁜 것들.’
놈들의 음습한 행동들은 모두 드낙이 정했겠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머리가 좀 찬 것이 이스핀이었다. 그가 배당받은 마을은 부흥하여 석지 성채가 되었다.
그는 시간을 가늠하더니 연병장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빨랐다. 땀을 빼고 있는 이스핀에게 일단의 병사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고, 기세도 대단했다.
전형적인 북부 출신의 병사들이었다. 또한, 두 눈에 독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이실레아의 손길을 받은 이들이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죽어서라도 구천을 떠돌며 싸울 자들이다.
“순찰대장, 여전히 부지런하군.”
이스핀의 말에 순찰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병사들은 무기의 끝을 어깨 쪽에 대면서 하늘 높이 들어 올린 다음에 구령을 외치고, 다시 내렸다. 독특한 인사법이었다.
멸문한 롤레온 가문의 제식이기도 했다. 이스핀은 롤레온 가문의 이름을 받았고, 그 모든 것을 이어받도록 요구되었다. 당연히 드낙의 주도가 아니라, 몰락했지만 살아남은 다른 가문들의 요구였다.
그 덕에 이스핀의 가문은 더 빨리 귀족적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빠르십니다.”
그 말에 이스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지금 순찰을 나갈 텐데, 오늘은 나랑 같이 다른 용무를 보러 가야 한다.”
순찰을 나가기 전에 이스핀에게 보고를 하러 오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 예는 실로 꾸준해서 대단했다. 석지 마을이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병사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스핀은 성주가 되었지만 병사 훈련에는 젬병이었다.
그 때문에 순찰대장의 선출이 매우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도렌에게 부탁했고, 도렌은 이실레아에게 의논했다.
〈쏘르 브릴리언트〉라 불리는 비전을 익히는데 재능이 없는 가문원이 차출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큰 위협이 없었고, 사람들의 치안 관리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필요한 지식은 차고 넘쳤다. 쏘르 브릴리언트는 귀족이었기에 문무겸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비전을 사용하는 감각이 낮았을 뿐이다.
브릴리언트 가문의 병사 10명 또한 석지 성채에 지원을 항상 나오고 있었다. 이스핀의 개인 병사들 30명까지 합쳐서 총 40명의 엄청난 군대가 이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40명이서 하루 세끼 총 120인분의 식량이 사라지는 꼴이었다. 물론 그중에 30인분은 브릴리언트 가문이 감당하고 있었다.
평범한 성채에 주둔할 군대의 숫자가 아니었는데, 그만큼 도렌이 이스핀을 생각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이실레아가 큰 힘을 보태주었다.
얼마나 석지 마을이 부유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비전을 알고 있는 기사급까지 객장으로 쓰고 있으니 이스핀 성주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볼 수 있는 면모였다.
“어떤 볼일입니까?”
“짐승 새끼를 하나 족치러 간다. 해가 뜨면 가자.”
“예.”
병사들은 그대로 대기했다. 쏘르 브릴리언트 또한 꼿꼿이 선 채로 이스핀이 새벽 수련을 마무리할 때까지 연병장에서 대기했다.
쾅! 쾅! 쾅!
거칠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데르반은 눈을 떴다. 이내 큰 대문이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큰 움직임에 옆에서 자고 있던 아내가 웅을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그대로 침대 밑에 있던 배낭을 챙겼다.
죄를 저질렀을 때부터 꾸려놓았던 도망 배낭이었다. 그대로 그가 뒷문으로 향했다. 나가자마자 그대로 창 세 개가 그를 위협했다.
“헉.”
헛바람 소리를 냈다. 버둥거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석지 성채 병사들의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그 기세만으로도 일반인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곧 인파가 모이고, 우물에서 배가 크게 부풀어 오른 소녀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사제까지 방문했다.
끔찍한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걸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아내를 가진 이스핀이었다. 그렇게 모질지는 못했고, 대신 처분하여 혼자가 되어버린 그의 아내에게 내줬다.
그녀는 그대로 용병을 고용해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 살인자의 아내라는 오명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점심에 이스핀은 주류 작업장을 돌아다녔다. 그곳은 모두 토벽으로 이루어진 곳이었고, 작업장 곳곳에 돌탑이 쌓아있었다.
“석지의 거인, 네 이놈! 오늘 분량의 일을 안 했다며?”
지하에 있는 큰 돌탑을 발로 차며 이스핀이 화를 냈다. 돌탑 일부가 얼굴로 변해서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흙의 정령, 석지의 거인이 하품했다.
대산 근처에서 돌무더기를 통해서 재미를 보며 주력을 야무지게 먹으며 새살림을 차린 석지의 거인이었지만 카이야와 도노에게 내쫓겨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이스핀이 꾸준히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의 가문. 엘라한도 하는 걸 내가 왜 못해?’
물의 정령 하나로 물을 생산하는 엘라한 가문은 모든 산업과 생산에 관여할 정도로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동부는 물도 부족한 국가였다. 모든 기득권층이 원하는 게 엘라한의 가문원이었다.
오직 그 핏줄만이 옹골찬 물의 정령에게서 물을 얻을 수 있어서였다.
‘그걸 보고도 석지의 거인에게 올인을 안 하면 내가 아니지.’
꾸준히 석지의 거인과 교류한 것이 이스핀이었고, 대산에 사는 카이야와 도노에게 얻어맞고 석지의 거인은 이스핀의 권유로 지하에 살게 되었다.
이곳은 꾸준히 개발되고, 계속해서 돌탑이 쌓이기 때문에 무조건 석지의 거인에게는 이득이었다.
그 대가는 바로 흙의 정령력이었다. 맥주를 만드는데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석지 성채의 특산물 중에 하나가 바로 〈바위 맥주〉였다. 묵직한 석지의 거인이 지닌 힘이 일부 들어간 바위 맥주는 가벼운 맥주임에도 묵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이 취하지는 않는데, 큰거 한 잔 마신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고, 매우 농후한 감각을 선사해주기 때문에 인기가 대단했다.
“귀찮다.”
“귀찮다고 말하는 네 정생이 전설이다. 힘 조금 쓰는 일인데 뭐가 귀찮아? 토벽에서 나오는 힘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이스핀의 닦달에 석지의 거인이 작은 몸을 만들어서 이스핀의 앞에서 두 팔을 쩍 벌렸다. 이스핀이 지랄, 개지랄을 해대면서 주워들어서 작업이 끝나고 나무통에 담겨 있는 맥주에 석지의 거인을 배달하듯이 돌아다녔다.
후두둑!
일을 끝내자마자 허물어지는 석지 거인의 몸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평생 갈 수밖에 없었는데, 최근 들어서 흙의 힘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엘라한 가문이 물의 힘을 다루듯이 내 가문 또한 흙의 힘을 다루게 될 것이다.’
뭣도 없는 게 이스핀이었다. 그건 석지 마을을 관리하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고, 석지 마을이 성채가 되면서 성주라고 불리게 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자신의 한계 때문에 사람을 더 많이 써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새도우 위스퍼들이 치안을 돕는 데 큰 힘을 주지 않았다면 많은 고난이 있었을 정도였다. 경중범죄부터 비밀스러운 음모까지 파헤쳤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이스핀의 주류 산업에 손을 뻗치는 것도 있었다.
‘드낙님을 처음부터 따랐기에 이걸 유지할 수 있었다.’
공신이라는 것은 대단하다. 하지만 이스핀은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못난 놈은 아니었다. 그는 그 덕에 공신대접을 잘 받을 수 있었다. 당장 이실레아만해도 그에게 투자하고 있는 돈이 대단했다.
단순히 공신이 된 것만으로도 성주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고, 위기 속에서도 도와줄 이들이 많았다.
모두 드낙 덕분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있자 이스핀은 절로 도렌 생각이 났다. 칠칠치 못한 놈이 자신보다 더 출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걱정이었다.
‘미안하다. 도렌아.’
종종 술을 마실 때면 죄책감마저도 느꼈는데, 이실레아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능력을 펼칠지 몰라서였다.
‘그때 이실레아에게 돈을 좀 받았는데, 만약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동갑이지만 용병 시절 때는 도렌의 형 노릇을 하며 상식을 가르쳤던 게 이스핀이었다. 두 사람의 다리 역할은 물론이고 도렌의 등을 밀어주었던 것도 이스핀이었다. 돈 하면 사족을 못 썼다.
없이 살아서 돈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었다. 성주가 되었음에도 아직도 식탐이 있는 게 이스핀이었다.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결혼이 그렇게 위험할 줄 누가 알았겠냐...’
“성주님 덕분에 오늘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술 만들어서 파는 성인데, 안 할 수야 있나?”
“이번에 남쪽에서 온 술을 제가 선물로 받았는데, 시음이라도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좋지. 우리 바위 맥주와 견줄 수 있는지 볼까?”
도렌에 대한 걱정은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새로운 술맛에 벌써 군침이 흘렀다.
*
남부왕, 아라온 플래티넘은 친정을 나섰다.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서서 공을 탐할 정도로 남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대신, 서부를 다시 손에 넣는다는 기대감이 남부인들에게 자리잡히게 되었다.
그 기대감을 이용해서 남부의 기득권층은 다시 한 번 시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이곳에서의 이주는 돈 있는 사람들이나 기술이 있는 자들만 가능하므로 남은 자들은 먼 곳으로 이주할 수 없는 자들뿐이었다.
모든 것이 몰락해가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기술자들이 있었다. 기술자들의 대거 도망은 남부 기술의 몰락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리대금이나 무력으로 묶어놓은 기술자들도 존재했다.
악수에 악수를 둘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만큼 드낙이 보여주는 미치광이 같은 정책들은 현 사회에 폭풍이나 다름없었다.
“쿠오오오오!”
모비딕과 블러디 만티코어가 포효했다. 남부와 서부의 경계선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와이번과 만티코어가 내려앉자 병사들의 동요가 매우 심했다.
“어어.”
“뭐가 저렇게 커...!”
“으으...”
분위기가 절로 난잡해졌다. 그게 아낌없이 느껴졌지만 이내 빠르게 가라앉혔다.
‘동요하는 걸 보니, 병사들의 수준은 낮지만, 회복 속도가 빠르다.’
남부 특성상 중형 몬스터를 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나약한 인간들을 위해서 엘프들이 직접 선정해준 땅이기 때문이다. 남부 인간의 탄생에는 엘프가 깊게 관여되어있었다.
‘지휘관의 역량이 대단해 보이는데.’
동요하는 건 병사들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롯이 지휘관의 몫이었다. 그 속도가 매우 빨랐기에 이 군대를 총지휘하는 자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세리안이 자연스럽게 두리번거렸다.
전투용 군마가 아니라 최대한 덩치만 크게 키운 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라온이 친정을 나왔기에 백마는 남부왕의 몫이었다. 그는 평범한 갈색마를 타고 있었다. 따로 마갑도 입지 않았으나,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말이었다.
누가 봐도 순도 100%의 지휘관을 위한 말이었다.
그 말을 탄 주인은 아라온의 부름에 그 옆에 섰고, 이내 모비딕에서 내린 드낙의 앞에서 하마해서 마주 섰다.
“오랜만이다. 남부왕.”
주변인들이 드낙의 거침없는 발언에 움찔했다. 하지만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아라온은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가시는 일이 잘되었다고 들었소. 이는 우리 인류의 복이요.”
세리안이 드낙에게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드낙의 시선이 아라온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아! 이번에 부사령관이 된 킨 후작이라고 하오. 변경백 칸의 후예인데 이번에 가문의 땅도 잃지 않았소? 그래서 플래티넘 왕가가 크게 그들을 받아들였소.”
“호오.”
드낙이 눈을 반짝였다.
변경백 칸! 도망치는 아라온과 남부 병력 속에서도 유일하게 인간을 위해 깃발을 내걸었던 영웅이었다. 그가 가진 소속감을 내던지고 더 근본적인 깃발을 새로이 주워든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변경백 이전에, 남부 왕국의 가신 이전에, 인간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였다.
‘발라쿠 때문에 잊고 있던 가문이었는데...’
남의 손에 들어가니 더욱 맛있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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