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전사 68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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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느낌을 주는 깔끔한 은발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빗질을 끝낸 레이시아는 안경을 벗어서 실크로 된 천으로 세심하게 닦았다.
아주 소중한 듯이 다루었다.
‘그분이 너무 그립다.’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녔지만 드낙이 있을 때 말썽을 부리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자기 봇주머니 챙기기 바빴고, 드낙 때문에 혼비백산해서 여기저기 불 끄러 다니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때만큼 레이시아가 안전했던 적이 없었다.
‘후우.’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안경을 쓰고 몸을 일으켰다. 은발청안의 미녀는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따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누구나 포용할 수 있어보이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대전으로 갈 생각입니다.”
“예. 앞장서겠습니다.”
시종들과 성기사 2명을 호위로 두고 곧바로 호수성의 내성으로 향했다. 이제는 호수 마을이라고 불리는 일이 적어질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드낙은 중부에 수도를 짓고 싶어 했지만 그 뜻을 모두 이루지 못하고 떠났고, 나머지 이들은 이미 있는 호수 마을의 인프라를 버리고 중부로 향하지 못했다.
드낙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실레아가 중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이 중부로 오면 안 되었기에 반대한 탓도 컸다. 물론 그 반대는 매우 은밀하게 진행되었기에 트집을 잡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오우거가 자리를 비우니, 트롤이 산의 주인이 된 격이다.’
브릴리언트 가문은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성을 두텁게 만드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레이시아와 신전은 제외되었는데, 강(强)의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성기사 케이슨이 깍듯하게 그녀를 대했다. 신분으로서나 인성으로서나 신전이 기댈 곳은 레이시아 뿐이었다.
“오늘은 정말 힘든 날이 될 것 같아요.”
레이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도 막지 못할 겁니다. 아니, 애초에 막을 생각도 하지 않으니.”
이번 대전에서 일어나는 결정은 거의 모든 기득권층이 원하는 것이었다. 바로 세금 증세와 고리대금업에 대한 법안 철폐였다. 게제라스 법관과 부법관들이 만든 법안을 처음으로 없애는 날이었다.
모두의 요청이었기에 감히 거부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사실상 두들겨 맞는 날이다.’
안타까운 일은 일반 시민이 부법관이 되어서 동부의 법을 관리하는데에도 이를 찬성했다는 것이었다. 이실레아의 치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렇게 일찍 오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이실레아가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도렌은 이 자리에 없었는데, 〈일백 야수〉인 검은 송곳니를 토벌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긴 상태였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레이시아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원탁에 자리를 잡고, 수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듣고, 사업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실레아는 재상 중의 재상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한 곳이 무너지면 다른 곳도 손해를 입을 수 있도록 많은 곳에 손을 뻗고 발을 들이밀며 함께하고 있었다.
그 거미줄 같은 관계도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것을 제어하고 있는 것만 해도 실로 대단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는데 그것을 방지하는 게 이번 안건이었다.
이실레아가 자리에 앉으며 눈을 감았다.
‘20%의 사람들로 나머지 80%를 지배하고, 이끌어 간다.’
이를 위해서 그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이번 안건이었다. 세금을 증세하면 자연스럽게 세금이 높아지고, 그 세금은 기득권이 나누어서 갖는다. 모두가 좋은 일이니 자연히 모든 기득권이 친해질 수 있고, 앙금을 조금이라도 털어버리며 불만을 낮출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고리대금업과 관련된 법안 폐지 또한 이와 같았다.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함이었고, 기득권층이 배부르게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재수없는 게제라스 법관을 짓누르는 일’이었다.
‘기득권층의 주적이나 다름없는 게제라스 법관을 때리는 것은 무조건 효과가 있다.’
동시에 이것은 시작이기도 했다. 드낙이 돌아오기 전까지 브릴리언트 가문을 쳐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업에 진출하는 것이 이실레아의 진짜 노림수였다. 이 때문에 브릴리언트 가문원들은 수많은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다양한 곳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수틀리면 동부의 경제가 못해도 3할, 많으면 5할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했다. 그럴 힘을 가지려면 시민들이 가진 것을 뺏어야 했다.
다른 기득권층들 또한 배부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의 전쟁 혹은 세력 구도를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병사를 양성하고, 다른 이에게 약해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럼 원탁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게제라스 법관은 이 자리에 참석조차도 하지 못했다.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났기 때문이며 가봤자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정치력이 낮은 그는 맞고만 살아야 했다.
“세금 증세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의견을 나누고, 벽보를 붙여서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많은 시민이 반대했지만, 우리가 행하고 있는 공공사업의 유지를 위해서는 강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출혈을 하는 것도 오늘까지입니다. 공짜로 혜택을 받는데 세금까지 적게 낸다면, 우리 동부 영지는 반년도 못 가서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
너도나도 수많은 핑계를 이야기했다.
“아직까지 영지의 자금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후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레이시아 왕비 전하.”
“영지에 얼마나 많은 사업이 불파겐 영주님의 이름으로 진행되는지 아십니까? 하루에 금궤 1짝이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금을 거두어들여서 이 흥분된 경제 상황을 죽여야 합니다!”
레이시아가 분투했지만, 순식간에 몰매를 맞았다. 이곳에서 그녀의 편은 없었다. 이실레아가 몸을 일으켜서 그들을 진정시켰다.
“진정하시오. 찬반이 나뉘고 있으니, 다수결을 통해서 결정하는 것이 어떻소?”
“찬성합니다.”
“찬성이오.”
너도나도 벌써부터 손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레이시아와 케이슨 성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레이시아의 마음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그녀는 입에서 피맛을 느꼈다.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지만 그 비린내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만큼 레이시아가 받고 있는 압박은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눈이 길게이 남부 사령관에게로 향했다. 시종일관 조용하게 있었는데, 이실레아가 알아서 총대를 메고 있기도 했고, 어차피 불파겐 영지의 남부는 그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건 결국 혈육인가.’
그에게 당했던 때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결국 정치란 것은 그러한 것이었다. 어제의 적도 내일의 아군이 될 수 있었다.
현재 길게이는 거의 무주공산이 된 변경백의 영지에 자유 도시를 건설하는데 역향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미리 선점하는 것만큼 나중에 많은 득이 될 것이다.
‘그걸 통해서 길게이가 나에게 투자하게 한다.’
더 이상 그는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그저 불파겐 가문의 남부 사령관에 불과했다. 그가 스스로 불파겐의 밑으로 들어와 가신이 되면서 그가 지닌 왕자의 직위는 말끔하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
“왜 이렇게 시간을 끌어? 패 가진 사람 다 죽었나?”
드워프가 돌로 만든 카드를 양손에 꼭 쥔 채 말했다. 반대편에 있는 세리안은 고민하는 척하면서 그래도 카드를 뒤집은 채로 그대로 땅에 던졌다.
“죽을래.”
“아, 아니! 망치!”
드워프가 소리를 지르며 발광하며 돌로 된 카드를 던졌다. 땅에 떨어진 카드를 보자 세리안이 절로 웃었다. 패에 비해서 얻은 돈은 금화 1조각에 불과했다. 초반에 그냥 바로 게임을 접었다.
“패가 좋으면 입이라도 좀 다물고 있던가.”
비웃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잠자고 있는 다른 드워프들을 옮기는 순간 속에서도 드워프들이 힐끔힐끔 도박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세리안은 태평하게 몇몇 드워프들과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도박성이 뛰어난 카드 놀이였다.
서로 눈치 싸움을 하는 건 물론, 계속해서 돈을 올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서로 간 감정의 교류를 느낄 수 있었다. 운으로 승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매판이 새로웠고, 개인이 턴을 넘기는 시간이 매우 짧아서 속도감조차도 있었다.
특히나 세리안은 드워프들을 비웃는 걸 아주 잘했다.
“다음은 내 차례야!”
구경꾼도 생길 정도로 세리안의 승률은 대단했다. 상대 드워프가 좋은 패를 가지면 그걸 아주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세리안은 1:1 혹은 4인까지 참가시켜서 판의 인원수에 변수를 줘서 더욱 새롭게 만들었다.
몸은 둔감하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은 게 드워프였다. 약물로는 드워프들을 자극할 수 없지만, 문화는 그들을 자극할 수 있었다. 드낙의 경우에는 중급 연금술과 마법에 대한 기대치가 대단했기 때문에 문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도박에는 척추가 곤두서지 않지만, 마법 같은 초월의 힘에 척추가 바짝 서는 게 현대인이었다.
“저번에 나한테 졌잖아, 너는. 비켜, 내가 떠볼 테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더 많이 이겼는데.”
“마지막에는 내가 이겼잖아!”
“이 자식이, 다시 떠.”
“싫어, 이 패배자 놈아! 아무튼, 내가 세리안 공(公)과 할 거야.”
도박판의 공작이 바로 세리안이었고, 자연스럽게 공이라는 칭호가 생겼다. 님이나 씨 같은 것보다 훨씬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높게 쳐줘야지 드워프들의 면이 살았다.
“이번엔 4인으로 하지.”
“저, 정말인가! 그럼 나도!”
열심히 일을 하던 드워프도 귀를 쫑긋거리며 허겁지겁 다가왔다. 끌고 가던 잠자던 드워프가 머리부터 땅에 떨어졌다.
잠자는 드워프를 구하는 작업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이 또한 세리안의 노림수 중의 하나였는데, 그녀가 드워프를 겪어봤기 때문이다.
‘이놈들은 진짜 착하다.’
종족 성격 자체가 모나지 않았고, 배신을 귀찮아서 안 할 놈들이었다.
‘유능하기는 또 유능하다.’
마도 사회를 연 엘프들은 드워프들의 기술력을 탐내지 않지만, 세리안은 침이 질질 나올 정도였다. 그건 드낙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와 그가 다른건 드낙은 많은 걸 가진 자고, 세리안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그게 두 사람을 능동과 수동으로 나누었다.
‘동부로 데려간다.’
종족 이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워프 제국의 수도는 반드시 무너져야 했다. 드낙은 쌍보험 전략이라고 코를 드높였지만 그걸 수행할 세리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
나아가 불파겐을 위해서.
드워프라는 종족은 반드시 지금의 인간에게 필요한 종족이었다. 특히 믿음직스러운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고로, 세리안은 후방 작업이 길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카드 놀이는 드워프 종족 전체로 뻗어 나갈 것이 분명했다. 세리안이 소비하는 1시간은 후방 드워프들의 시간을 1명당 1시간씩 3천 시간을 가져갈 것이다.
은근슬쩍 휴식 시간이 길어진 것만 봐도 그 효과가 제대로 먹혀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 성공할 거다.’
도박수란 도박수는 죄다 성공한게 드낙 불파겐이었다. 적어도 이런 도박 같은 짓거리에서 그가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일도 안 들었다. 그만큼 세리안은 이런 상황에서의 드낙을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세리안은 드워프 종족과 함께 동부로 돌아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만큼 드워프들이 지닌 힘은 실로 대단했다.
‘절대 포기할 수 없지.’
특히 몇몇 드워프 가문은 철의 밀도는 그대로 유지하고, 무게는 줄일 수 있는 방어구 제작에 능하다는 걸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못 먹어도 일단은 지르고 볼 정도로 드워프들은 포용하고 싶은 종족이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드낙이 뭐라고해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애초에 카드 놀이는 드낙이 세리안에게 가르쳐준 것이기 때문이고, 자신도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고 내빼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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