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670화 (669/1,239)

강철의 전사 670편

<-- -->

〈무너진 남부 왕국 수도〉

금을 도금한 실이 양옆으로 나선을 그리며 양탄자를 수놓았고, 그것은 끝도 없이 대로를 덮었다. 악마 병졸에 의해서 부서진 도로의 금이 간 곳에는 묽은 진흙이 들어갔고, 뭉텅이로 팬 곳은 흙으로 메워졌다.

폭삭 주저앉은 집과 근처에 가면 아직도 탄내가 나는 전소한 잡화점. 기울어져 있는 첨탑이 그림자 져서 해맑게 웃으며 내달리는 어린아이들을 가렸다.

기름이 없어서 광택이 나지 않는 무구를 입은 병사들이 줄이어서 앞서 나갔다. 그리고 종소리가 울렸다.

댕.

댕.

댕.

말을 탄 〈아라온 플래티넘(Araon Platinum)〉이 지나갔다.

“와아아아!!!”

꽃잎이 뿌려졌다. 그중에 절반은 빛바랜 꽃이었다. 인력이 부족해서 단기간에 많은 꽃을 가져올 수 없었기에 불가피했다. 하지만 오히려 바짝 마른 꽃잎은 색감이 더 진해서 무더기로 뿌려지는 꽃잎 사이에서 그 색감을 더욱 꽃피웠다.

“남부왕 만세!”

그를 축하해주는 인파는 많았지만, 대로를 벗어나면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들썩이는 폐허 속에서 굶주린 이의 배고픈 소리가 구렁이처럼 귀로 들려오기도 했다.

전란에 그대로 노출된 수도에 돌아온 인구는 매우 적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인류에게 있어서 전쟁은 종족 자체에 피해를 주는 일이었다. 오직 전쟁을 일으키고 뒤에서 와인을 들어 올리는 자들의 배를 채울 뿐이었다.

파괴된 수도의 인프라는 남부를 500년 퇴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면 아라온의 표정은 제법 좋았다. 다 죽었으리라 생각한 남부인들이 그냥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신 드낙에게 받은 어음은 그대로였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덕에 즉위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 남부인은 다시 한 번 비상할 것이다! 이 무너진 재 속에서 불사조처럼 날아오를 것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기억하라!”

아라온 플래티넘은 다시 한 번 비상하기를 원했다. 민중을 위해서 간단하게 말했고, 벽보를 붙여서 길게 말하였다. 그리고 내성에서 아직도 제법 영향력이 있는 이들과 만나며 진득하게 성장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그들은 타인을 위해서 일할 생각이 없었다. 금고를 운영하는 자가 아라온에게 공손히 제안했다. 그에게는 빠른 돈의 소비가 필요했고, 더 많은 부채자가 필요했다.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습니다만, 남부왕이시여. 추락한 명예를 세우기 위해서 수도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방 곳곳의 성주들이 가을이 끝나고 거짓된 세금을 보낼 수 있습니다.”

남부왕 아라온 플래티넘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중앙의 힘이 무너졌다. 그에게 우호적인 것은 오직 북쪽에 있는 성 하나일 뿐이었다. 다른 지방에서 언제든지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가을의 세금〉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지방에게 자신이 아직도 건재함을 알려야 했다.

덩치가 크게 보이기 위해서는 수도의 재건을 위한 대대적인 토목사업을 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큰돈이 들 텐데.”

“제가 아는 이 중에 은을 많이 축적한 자가 있습니다. 불사조처럼 날아오르는 이 시기를 기념하여 은화를 새로 주조하는 게 어떻습니까. 위기 속에서도 수도를 다시 탈환한 위대한 남부왕과 불사조를 새겨넣는 겁니다.”

아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알아서 해준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랐다.

“새로운 화폐가 유통된다면 무너지고 위축된 상업도 다시 활발하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때, 상인 한 명이 다가왔다. 아라온이 아는 척을 했다.

“오늘도 와주었구나. 식량 건에 대해서는 고맙다.”

“남부왕을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토목 사업을 진행한다면 시민들이 큰 피해를 봅니다.”

“흠...”

그렇게 말문을 텄음에도 남부왕은 지방에 대한 위협 때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지방의 성주들에게 중앙이 건재함을 알려야 했다.

지배자가 자신을 공공이 하기 위해서,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시민들이 감당해야 했다.

“하, 힘들다.”

수도 곳곳에 있는 폐허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으러 온 남자가 테이블 한 곳에 앉았다. 동료들도 하나씩 앉았다.

“여기 닭 요리 하나 주쇼.”

다른 이들도 하나씩 주문을 했다.

“선금으로 동화 10닢입니다.”

사람이 적고, 노동하는 이들은 많았기에 절로 가격이 높았다.

“이번에는 내가 낼게.”

남자가 은화 한 닢을 꺼냈다. 종업원이 그걸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불사조 은화는 3닢은 받아야 합니다.”

“뭐? 요리 다섯 개 시켰는데 무슨 3닢!”

“미친놈들 아니야?”

“가장 가치가 없습니다. 싫으면 다른 집을 찾으십시오.”

“제기랄, 야, 딴 데 가자.”

남자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다시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아예 취급을 안 하는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화폐는 은과 금을 많이 축적한 금고쟁이들에게서 많이 제작되었고, 이는 토목 사업을 통해서 민간으로 퍼져나갔다. 문제는 단기간에 수도에 너무 많이 유통되어서 안 그래도 적은 수도 인구 때문에 아예 경제가 박살이 나버렸다.

기존 수도의 인구에 비해서 1/10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수도였다. 다른 물건보다 그냥 불사조 은화를 상자에 넣은 보부상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런 보부상들의 차익도 어마 못 가서 끝을 맺었다.

“퉤! 장사 더럽게 하네!”

지방에 있는 잡화점에서 빠져나온 보부상 보리슨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의 상자는 불사조 은화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털지 못했다.

“어이! 보리슨! 거긴 어때?”

절로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짊어지고 온 동료를 보며 보리슨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망했다. 제기랄, 은화 15닢에 육포 한 포대야. 금화나 동화로 환전도 안 돼.”

“구리보다 은이 더 싸지다니. 미친 세상이야.”

쑥덕거리던 두 명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 정도로 절박했다.

“야! 필립슨네 집으로 가자! 거기 이주 준비하고 있어서 싼값에 이것저것을 판다더라!”

서둘러 보부상이 향했지만 이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불사조 은화도 취급합니까!”

멀리서 보리슨이 외쳤지만 답해주는 이 하나 없었다. 여기는 경매장이나 다름없었고, 고급 가구로 보이는 목제 가구보다 식량 한 줌이 더 비싸게 거래되고 있었다.

필립슨은 이 지역의 유지에게 토지 문서를 건넸다.

“흐흐흐.”

토지 문서를 받아든 이는 절로 웃음소리를 냈고, 옆에 덩치가 식량을 제법 많이 건네주었다. 척 봐도 동부로 가는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보석이나 구리, 철 같은 게 있으면 더 거래하지. 어차피 동부는 이주민 정책이 대단하다던데.”

“혹시 모르니까 보험은 있어야죠. 그래도 실립님 덕분입니다.”

“아이, 토지를 준다는데, 뭘 못 주겠나?”

서로 훈훈한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상위 계층은 말 그대로 공격적 투자를 하는 날이나 다름없었다. 비축한 식량은 썩어서 버릴 지경이었다. 그걸로 토지를 넓힐 수 있으니 좋았다.

이주를 결심한 중산층은 필요한 식량을 토지 문서 하나로 싸게 사들일 수 있었다.

남부 왕국의 민심은 나날이 갈수록 팍팍해졌다. 마을 하나를 오가는데에도 도적과 싸워야 했고, 용병들의 수요는 나날이 갈수록 높아져서 10살 먹은 어린이도 용병이 될 수 있었고,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길가는 곳곳에 용병의 시체가 있었기에 8살 먹은 애들을 이끄는 어른 2명이 스케빈저 노릇을 하기도 했다. 죽은 이의 장화를 벗기는 고사리손에는 시체의 진액이 들러붙었다.

남부는 빠르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만 명이 죽어갔다. 그리고 그 업은 고스란히 중립신으로 옮겨갔다. 인신(人神)이긴 했지만 동시에 중립신(中立神)이기도 했던 엘 마르토 카사다민에게 나쁜 업, 착한 업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균형의 신답게 그 모든 업을 자신의 힘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 업은 모두 테라의 완성에 쓰일 것이다. 초월자가 지키지만, 초월자의 손에 농락당하지 않는 차원계의 탄생에 녹여질 것이다. 그 녹여지는 곳에는 중립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대신 중의 대신이 오롯이 죽어서 만드는 그릇, 그것이 행성 테라였다.

*

타다다닥!

레플리카 이시연(Lee Si-yeon)이 앞으로 내달렸다. 언데드인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개조된 육체였다.

그녀 외 다른 〈타락의 무장한 삼위일체(Armed Trinity of the fallen)〉는 보이지 않았다. 시연의 뒤로는 〈검은돔의 방령(方領 of Black Dome)〉이 가득 따라오고 있었다.

환도(環刀)는 몸의 뒤쪽으로 손잡이가 툭 튀어나오게 독특하게 허리춤에 끼워져 있었고, 맥궁(貊弓)은 금방이라도 쏠 수 있도록 손으로 앞으로 고정된 채 내달렸다.

차락, 차라락.

찰갑(札甲)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속에 살과 근육이 없었기에 매우 기민했다.

“곧 도착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해야 할 것이다!”

딱딱!

레플리카 이시연의 말에 방령들이 턱을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핏빛쥐들의 운송 도로는 매우 넓었고, 방령들이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통로의 곳곳에 뭉툭 튀어나온 다리뼈가 살짝 보였다.

네크로맨서인 레플리카 엘리자베스의 〈음흉한 다리뼈〉였다. 저렇게 보여도 하급 언데드였고, 핏빛쥐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 취득 언데드였다.

이를 통해서 이시연은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지하 싸움, 특히나 핏빛쥐와의 전투에서는 중대형 마수가 쓸모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핏빛쥐가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3번의 지하 전투에서 전공을 올린 것이 이시연이었다. 그녀를 막을 자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장쥐는 애초에 검은 보급로를 통해서 〈배불뚝 리전〉과 자신의 격을 높이기 바빴다.

다른 핏빛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싸움에서 그들은 전혀 연합하지 않았다. 리전의 덩치가 커지기 전에는 대장쥐를 따르며 하나 된 모습을 보였지만 머리가 커진 위원장들은 이내 독립을 하게 된 상태였다.

화악!

단번에 통로가 넓어지며 거대한 동공이 이시연의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보이는 것은 엄청난 숫자의 핏빛쥐들이었다.

“자유사격!”

말을 하자마자 방령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상대하는 핏빛쥐는 남부의 〈붉은혀 리전(Red tongue Region)〉이었다. 그들은 응사하기보다는 휘황찬란한 문양과 그림이 양각된 방패를 들어 올렸다.

곳곳에 엄폐물이 존재했다. 이들은 수백 개가 넘는 통로로 내달리기 바빴다. 군집하는 동물들처럼 뇌가 수백 개인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수백 개가 넘는 갈래로 교통체증 하나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몸에는 하나같이 두더지 가죽으로 만든 봇짐을 지고 있었고, 몇몇 핏빛쥐는 힘을 합쳐서 식량을 옮기고 있었다. 그 식량 위로 불타는 방령들의 화살이 내려꽂혔다.

화살이 만들어내는 자욱하고 매캐한 검은 연기는 빠르게 동공의 천장부터 메꾸기 시작했다.

“찍찍찍!”

네발로 불타고 있는 큰 식량 위로 올라간 핏빛쥐가 물 붙인 털가죽으로 냉큼 덮으면서 불을 끄거나 서부의 짧은 털 리전에게서 얻은 주술 아이템으로 물을 뿌렸다. 물 묻은 식량은 금방 썩겠지만 그 전에 먹으면 그만이었다.

전투 시간은 단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검은 돔의 마수 군단은 4,800마리가 넘는 핏빛쥐를 죽였지만, 식량을 많이 태우지는 못했다. 엄폐물에는 화살이 수천 발이 박혀있었다. 곳곳에 배치된 엄폐물은 신의 한 수였다.

“쯧.”

확인 사살을 진행하고 난 다음에 이시연이 혀를 찼다. 얕은 지하에는 몇 없는 지하 통로였지만 150m 이하로는 정말로 끝도 없이 많은 지하 통로가 존재했다. 그중에 몇 개는 보급로 통로로 넓었다.

‘여기도 곧 파묻히겠군. 성과는 여기까지인가.’

보급로 통로가 마수 군단에게 들킨 이상 거침없이 파괴할 것이다. 그만큼 노동력이 엄청나게 많은 게 핏빛쥐들이었다.

‘가히, 끝없는 싸움이다.’

이시연은 재정비를 했다. 하지만 이내 눈을 부라렸다. 방령 700기가 사라져 있어서였다.

“하.”

드낙에게서 잉태되어 나온 것이 핏빛쥐들이다. 그들의 암살능력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터.

그 속에서 이득을 보는 건 핏빛쥐와 드낙 그리고 마신이었다. 큰 동공에서 재정비를 하는 모습을 본 대장쥐가 입 주위에 난 긴 털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입을 조물조물 움직이며 방령의 뼈를 씹어먹었다.

‘이 세상에 온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이단자.’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대장쥐를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장쥐의 뒤로 5각수로 이루어진 큰 뿔 검은 쥐가 50마리가 넘게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방령들의 뼈를 하나씩 양손에 소중하게 꼬물쥔 채로 뜯어먹고 있었다.

검은 보급로에서는 끝없는 전쟁이 시작된 지 오래였다.

검은 돔에서 오는 지원군은 지하에서 소모되거나 지상에서 국지전을 통해 소모되었다. 핏빛쥐들이 워낙 퍼져 있었기에 검은 보급로를 지키려면 국지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승리와 패배가 어지럽게 이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푸부붓!

양수가 대량으로 나오면서 바닥을 크게 적시며 흘러내렸다. 철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짐승 새끼의 소리가 퍼져나갔다.

“끼익! 끼익!”

검은 보급로에서 마수와 몬스터를 먹으면서 핏빛쥐는 출산을 하기도 했다. 암컷 핏빛쥐 전사는 새끼들의 머리를 만져서 조금 오돌오돌해도 뿔이 튀어나온 핏빛쥐 새끼만 남기고 모조리 먹어치웠다.

검은 보급로 인근은 점점 가면 갈수록 난잡해졌고, 핏빛쥐들의 모습은 하프 드워프에게까지 노출이 되었다. 고블린이 가교 구실을 해서 불가침 협정을 맺었지만, 본능적으로 악(惡)으로 보이는 핏빛쥐는 하프 드워프들에게 주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수 군단과 싸우고 있기에 차선으로 밀려났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6484자

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