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3 <-- 검은 돔의 마수 군단 -->
검은 돔의 마수 군단이 후퇴를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드낙은 감히 그들을 쫓지 못했다. 큰 언덕을 끼고 사격각을 넓게 가지고 있는 하프 드워프들을 내려오게 할 수는 없었고, 고블린들이 〈하늘 송곳니 분지〉를 포기하고 나오게 할 수 없어서였다.
‘새끼.’
절로 욕이 나왔다. 그만큼 마수 군단의 행보는 드낙을 화나게 했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화가 났지만, 그것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상대가 강함에도 물러났기 때문이다.
저 정도의 중대형 마수. 척 봐도 정예 중의 정예로 보이는 중보병 궁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일전을 안 벌이고 후퇴한다? 겁쟁이라고 욕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우와아아아아!!!!”
그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용병들이 희희낙락하며 고함을 지르고, 서로 부둥켜안았다. 싸우지 않고 이겼다고 여기고 있었다.
군략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짧은 판단이었다. 이는 하프 드워프들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훈훈했다.
자신들의 준비에 두려워하여 몸을 뺐기 때문에 큰 고비를 넘겼다고 여기고 있었다.
저렇게 저지만 해도 드워프 제국이 마신장과의 싸움에서 일어설 시간을 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서 드낙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조금 불리한 것만으로도 도망쳤기 때문이다. 저들과 전면전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승패가 조금이라도 불안해도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쫓아갈 수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벌겠지만, 패배하는 꼴이다. 저 마수 군단 지휘관의 생각을 드낙은 이번 행보를 통해서 더듬어나갔다.
사냥꾼이 흔적을 더듬어가듯이 그 생각을 예상했다.
‘검은 돔이 생각보다 강한 생산 구조물이다. 중립신이 이를 대단히 여기지 않은 이유는 마신장을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큰 피해를 입으며 검은 돔을 처리해도 마신장이 남는다면, 그 마신장이 새로운 형태의 마수 생산 구조물을 만들면 그만이었기에 검은 돔은 처리해서는 안 되었다. 시간을 허비하면 다른 곳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검은 돔이 강력하기에 그곳에서 오는 증원군을 받아들여 연합군을 밀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서둘러 나와서 싸워야 했다. 패배가 미래에 약속되어있는데, 안 싸운다면 병신이었다. 물론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지을 수 없는 게 전쟁이었다. 모든 복합적인 요소를 판별하고, 체중계를 달아서 경중을 따져야 한다.
‘상대는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것을 토대로 드낙이 상상력을 쭈욱 뽑아 올렸다.
‘언데드이기에 시체로 이루어진 검은 보급로의 수복이 가능하다. 네크로맨서가 없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시간을 들이면 유리한 것이다.’
적은 지원군을 받아들일 때까지 종족 연합군이 파괴 공작을 펼쳐도 능히 수복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을 공산이 컸다.
드낙은 서둘러 야수 기사, 그라돈 토치라이트의 군사학서를 등자 안쪽에서 꺼내서 뒤졌다. 이제는 어디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잘 알았고, 손때도 많이 묻어있었다. 그렇게 많이 봤음에도 아직 일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갖추지 못했고, 이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 또한 들쑥날쑥이었다.
책과 현실은 달라서 이를 현실에 접목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대단한 군사학서다. 나중에 토치라이트 가문에 떡을 좀 줘야겠어.’
야수 기사의 주석이 매우 많은 군사학서는 초보자들에게도 좋았고, 고급자에게도 아주 좋았다.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도 야수 기사의 군사학서를 가지고 있으면 자신과 역량이 비슷한 자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책 한권이 일류 지휘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중에서도 예시가 많은 게 가장 으뜸이었다.
‘기만, 모든 것이 날 속이는 것처럼 드는 건 기분 탓이 아니다.’
상대의 움직임은 모두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사냥꾼의 재능이 그 덫을 색적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드낙은 혀끝에서 왠지 모를 아득함을 느꼈다. 그 기이한 감각은 드낙을 소름돋게 만들었다.
아무리 달려도 범인(凡人)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드낙이었다. 그 우둔함은 오히려 그를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였다.
아득히 느껴지는 재능의 차이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와서였다.
그건 절망이라기보다는 아득함이었다. 절망은 고통이지만, 아득함은 그것마저도 초월해서 아무런 감각조차도 못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드낙은 하나씩 짚고 넘어가며 바둑돌을 차근차근 쌓아올렸다.
천재는 단 1초 만에 도달하는 곳으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사냥꾼의 촉과 암살자의 음흉함을 통해서 닿으려고 노력했다.
쿵.
블러디 만티코어가 큰 언덕에 내려앉았다. 드워프 거점장이 다가왔고, 그 옆에 모비딕에 내려앉았다. 투구를 벗은 세리안 또한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강자(强者)가 방심하지 않고, 물러가는 모습은 그녀 같은 천재에게 끔찍했다.
“쫓아가서 싸워야 해.”
본능적인 해결법에도 드낙은 손사래를 쳤다. 자신에 대한 안위가 매우 중요한 드낙의 촉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어서였다.
‘나가서 싸우면 패배할 것이다.’
본능이 그렇게 경종을 울려대었다. 약간 오한마저 들었는데, 절로 옛날의 경험이 생각났다.
마을의 촌장에게 두려움에 떨며 지냈던 밤.
그게 생각났고, 그 경험이 지금의 드낙이 나아가서 싸우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게 경험이라는 놈이었고, 매우 중요한 놈이었다. 하찮은 범부 따위가 쥘 수 있는 몇 없는 동아줄 중의 하나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5만5천의 군세가 후퇴하고 있어. 모든 게 어지럽잖아, 치면 바로 뚫릴 거야.”
세리안이 드낙에게 명령을 독촉했다. 실제로 레플리카 이시연은 후퇴에 있어서 전열을 흩트리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레플리카 엘리자베스의 네크로맨서가 가진 역량을 통해서 단번에 전열을 단단하게 변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기만은 실로 그럴듯해 보였다. 유일하게 백제의 정예인 방령(方領)만이 군율과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조각나있었다. 중대형 마수들의 거대한 덩치 탓이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더욱 가면 안 되겠다.”
동시에 드낙은 천재가 저렇게 확실하게 이득을 탐하는 모습에 저 모든 혼란이 독이 발라진 꿀통임을 알 수 있었다.
“내일 다시 말하자. 지금은 저들의 후퇴를 지켜봐. 나아가서 싸우면 저쪽만 좋을 뿐이야. 우리가 대군이라도, 승패를 알 수가 없어.”
높고 넓은 언덕 한 곳과 작은 언덕 10곳을 통해서 지형적 이점을 가지고 있는 데도 불안한 전투였다.
드낙의 겁쟁이 같은 모습에 세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큰 기회를 놓치는 거야.”
“내 촉이 말해주고 있어. 사냥꾼의 촉이!”
그 경박한 소리에 세리안이 피식 웃었다. 드낙의 가벼운 모습은 세리안에게 제법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입만 열면 흉악, 입을 닫으면 냉철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예의를 차리게 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작은 농담조차도 받은 적이 없는 그녀에게 있어서 드낙은 일단 함께하면 재미가 있었다.
드낙은 하루 동안 세리안과 함께 전략과 전술을 논했다. 그 사이에 그 누구도 그와 만날 수 없었다.
“됐다.”
그가 펜을 놓았다. 양피지에 낙서가 빼곡했다.
해골마를 탄 언데드 방령들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 이시연의 결정을 꼬박 하루를 고민해서 도달한 드낙을 보며 세리안이 입에 물을 머금었다.
“어때?”
드낙의 물음에 세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상대 지휘관의 역량은 나를 뛰어넘었어. 아니, 전략과 전술 체계나 지식이 이 세계보다 높아.”
깔끔하게 레플리카 이시연의 전략 전술을 인정했다. 드낙이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쫓아간다면, 큰 피해를 감당해야하지만, 병법의 기초인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지.”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게 병법의 기초 중의 기초였다. 전쟁은 상대적인 것이었으므로 피해를 입어도 그 의도를 꺾는 게 중요했다. 그 말을 세리안이 받았다.
“문제는 상대의 교란, 기만일 수 있지.”
적 지휘관의 수준이 매우 높으므로 모든 것이 거짓이 될 수 있었다.
최고의 병법은 적을 속이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군을 적게 보이고, 정예의 군율을 엉망처럼 보이게 하고, 싸우지 않는 것처럼 보여주고, 보급이 적은 것처럼 여기게 하고, 대군이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모든 것이 전쟁에 이점을 가져다 올 수 있고, 상대의 실수를 만들 수 있었다.
“적 정예는 완벽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가 더듬은 상대의 수준은 매우 높아. 고로 기만이 없을 수가 없다.”
드낙이 단언했다. 하루 동안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쫓아가서 확실하게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 판단을 토대로 드낙이 양피지를 손으로 쓸면서 글자들을 훑어나갔다. 자연스럽게 주제가 옮겨졌다.
“놈들은 장기전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목적을 생각한다면 단기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
“검은 돔의 마수 군단이 움켜줘야 할 최종 목적은 마신장을 돕는 거야. 고로 검은 보급로를 수복 가능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검은 보급로를 최대한 지키는 게 옳아.”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을 쫓아갈 필요가 없지.”
“무엇보다도 후퇴하는 모습이 우리를 끌어내려는 적의 작전이었고.”
아군조차도 깜빡 속을 정도로 후퇴하는데 의미를 부여한 이시연은 실로 무시무시한 지휘관이었다.
“후퇴해도 이득, 덤벼도 이득이라면 후퇴하고 상황을 보는 게 맞다.”
순서를 따졌을 때 그게 옳았다. 상대가 생각해도 〈의미있는 후퇴〉였다. 거기에 휘둘리지 않아도 다시 진격하면 그만이었다.
세리안이 결론을 냈다.
“고로 우리는 되려 도망쳐야 한다. 적과 싸워줘서는 안 돼.”
역설적으로 그 전략적 후퇴가 드낙에게 새로운 전략을 내어줬다. 장기전을 노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큰 우위를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보급이 가장 문제인데, 내 생각에는 남부 용병들은 그냥 되돌려보내는 게 맞아. 다시 지하를 통해서 돌려주고, 검은 돔을 타격할 힘을 기르도록 놔둬야 해.”
남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인력이 될 남부 용병들은 최대한 살리는 게 맞았다. 장기전에서 황무지에 인간 군대가 활동하는 건 효율적이지 못했다.
핏빛쥐들의 출산율은 매우 높았고, 자연스럽게 식량의 만성 부족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부의 풍요로운 지하 자원이 없었다면 이런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어려웠을 터다.
그저 남부 핏빛쥐의 규모의 힘으로 여기까지 견인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남부 왕국은 시민이 굶어 죽어도 돈으로 식량을 사서 대주고 있으니, 보급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고.”
“하프 드워프들은 황무지 종족이기에 지금도 보급을 받는 입장이니···”
전면전을 하지 않고, 장기전을 노린다면 보급이 가장 중요했고, 그를 위해서 전력이 반 토막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고블린과 후방 보급을 대고 있는 핏빛쥐들의 소모를 줄이려면···’
드낙이 현대인의 기억을 떠올렸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중국에서 화학 달걀을 팔 듯이. 못 먹는 걸 먹으면 된다.’
사람이 못 먹는 걸 먹이면 식량은 뻥튀기된다.
“검은 보급로의 시체를 먹어서 응원하면 마수 군단의 허를 찌를 수 있다.”
사령마력을 뿜어내는 푹 절은 시체를 먹어서 응원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드낙이 기똥찬 생각은 실로 현대 문물의 이슈와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벌떡 일어난 그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주술을 통해서 해독하고 고기를 생산해서 뿌리면 돼. 그럼 더 많은 고블린과···”
황무지에 핏빛쥐들의 사회가 더 커질 수 있었다. 식량을 통해서 개체수를 급증시키고, 그 노동력으로 황무지 지하를 개발하여 자급자족력을 높인다.
“먹어서 응원을 해? 우리는?”
말장난을 곧이곧대로 들은 세리안의 말에 드낙이 어울려주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 없잖아. 우린 전략을 수립하고, 바로 드워프 산맥으로 가야 해.”
드낙은 대친김에 양피지를 새로 꺼냈다.
“검은 보급로의 시체들을 먹는 게 우리들의 새로운 작전이야.”
“전면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하프 드워프들이 좋아하고 꾸준히 지원을 해줄 거야.”
“핏빛쥐들과 고블린, 인간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돼.”
“검은 보급로의 파괴를 노릴 수 있고, 이는 우리의 초기 목표 달성을 의미하지.”
“적들 또한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어.”
“엄청난 전략적 승리가 가능해.”
드낙이 손을 비볐다. 짜릿했기 때문이다.
“이게 나지. 이게 내 지략이지.”
제갈량이 된 드낙은 부채를 만들 생각을 가졌다.
그렇게 〈검은 보급로 식량 작전〉이 수립되었다. 드워프 거점장들은 쌍수를 들고 이를 받아들였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퇴하라!!!”
빠르게 지하로 병력들이 썰물처럼 사라져갔다.
검은 돔의 마수 군단이 도망쳤고, 3종족 연합 또한 도망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이에 드낙과 세리안은 드워프 산맥으로 향했다. 당연히 검은 보급로와 떨어진 루트를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