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1 <-- 검은 돔의 마수 군단 -->
검은 꿈 회의에서는 큰 소득을 보지 못했다.
세파리아스의 경우에는 하프 드워프의 거점장을 모아서 죽이고 힘의 논리로 지배하자고 했다. 어디 무협지에 나오는 마교나 다름없는 방식이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몸에 베여있었다.
사실, 이 세계의 상태를 보면 오히려 그게 생각보다 잘 통했지만 드낙은 미개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는 지성종족에게 누구보다도 관대한 것이 드낙이었다. 특히나 하프 드워프들은 말을 주면 말을 내어주고, 되를 주면 되를 내어주는 지성종족이었다.
‘내가 너무 머리를 썼다.’
기어오르는 발바룽의 조언은 드낙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만큼 중립신의 세뇌 영향력이 말끔히 사라진 드낙은 음흉한 존재였다. 흑마법사도 제법 잘 어울릴 정도의 지성을 지녔다.
그나마 위안이 될 것은 중립신으로부터 하프 드워프를 회유할만한 정보를 획득했다는 점이었다.
“검은 돔의 마수군단.”
드낙이 오랜만에 한국어를 중얼거렸다. 마신장과 싸워보지도 않고, 그 마법 영창을 목격하지도 않은 드낙에게 그건 충격이었다.
‘전차원계에 죽음과 전쟁을 퍼뜨리며 업을 수급하는 한국인 출신 마신? 농담도 지나치다.’
제2의 지구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한국인이라는 걸 들은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마신과의 교섭을 생각했지만, 말끔히 털어버렸다.
외국에서는 같은 한국인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걸 예능에서 주워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런 세계에서야···’
자기가 키운 인재를 더 믿을 것이다. 동시에 초월자가 된 자가 필멸자에서 갓 벗어난 반인반마를 크게 반긴다? 희망 회로가 미쳐 날뛰는 생각이었다.
다른 정보는 드워프 제국의 몰락에 대한 제법 상세한 이야기들이었다. 엘프가 완벽하기에 성장할 수 없다면, 드워프는 단단하고 견고하기에 무뎌져 간다.
주변 자극을 잘 못 느끼게 되다 보니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중립신이 스스로 업을 많이 소비해서 그들이 만든 건축물에 문을 두드렸지만, 아직도 비몽사몽하고 있는 게 드워프 제국이었다.
이 정보를 충분히 전달한다면, 하프 드워프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써먹으면 병신이지.’
물론 드낙은 딴마음을 품었다. 뱀처럼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림자에 숨어서 미끼를 무는 짐승을 향해 활을 겨누는 사냥꾼처럼.
*
하프 드워프들과의 원탁회의가 열렸다. 드낙의 요청으로 열렸으며, 마수 증원군에 대한 정보가 크게 갱신되었다는 것을 사전에 알렸기에 거점장들은 모두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급하게 모이라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검은 돔의 마수군단이 마수 증원군으로 검은 보급로를 횡단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 말에 하프 드워프들은 대부분이 눈을 깜빡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하프 드워프 중 고대 문헌을 읽는 게 취미인 거점장 딱 하나만 드낙의 말을 이해했다.
“혹, 그 이름의 발음이···”
드낙은 능숙하게 한국어 발음을 했고, 그 기괴망측한 말을 들은 거점장들이 실실 웃었다.
쿵.
“뭐가 웃기다고 웃는 것이냐? 마신장의 직속 군단이 이 세계에 온 것이다!”
늙은 거점장의 말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신의 오른팔인 마신장이 이 세계에서 탄생하며 만들어낸 어중이떠중이 마수가 아니었다. 마신이 직접 창조한 군단이었다.
그 힘은 세계의 멸망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
“오직 한 명의 하프 드워프밖에 그 무서움을 모르다니. 하프 드워프들은 역사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소···”
드낙의 말에 그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지 못했다. 빈정거림보다는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어서였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드워프 제국이라면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프 드워프들답게 드워프들의 힘에 기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드낙이 이를 막아섰다.
“드워프 제국의 몰락은 생각하던 것보다 클 것이오.”
“그걸 어떻게 아는가?”
드낙이 손을 쭉 위로 뻗으며 말했다.
“저 높이 치솟은 형형색색의 금속봉들을 보라! 그곳에서 우리의 신이 이 어둠을 빛으로 밝히고 있으니, 이게 곧 우리가 중립신의 아들이며 딸임을 말해주고 있는 증거이다!”
“신의 횃불이라 불리고, 신의 봉화라 불리는 건축물에 미약한 빛이 퍼뜨려졌으니, 이는 곧 드워프들의 부흥을 원하는 중립신의 뜻이며 드워프 제국이 다시 서야 할 위기가 찾아오고 있음이다.”
하프 드워프들의 눈이 커졌다. 한낱 인간이 드워프의 비밀 중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워프의 피가 섞이고, 오직 거점장들에게만 이어져 오는 〈드워프 건축물〉에 대한 것을 드낙이 알고 있어서였다.
“나는 중립신의 예언을 들었고, 왕으로 살아가기보다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 자리까지 왔소.”
그 말에 드워프들이 감탄을 했다. 딱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명예를 드높이는 것만으로는 하프 드워프들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이들은 현실에서 살고 있었고, 그들은 폐쇄적인 사회를 지니고 있었기에 모두가 가족이고 친구이며 친척이었다.
“전쟁은 항상 피를 흘리고, 그렇기에 명예와 대의만으로는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소. 남부땅의 평야 3곳을 그대들에게 주겠소. 5만이 넘는 마신의 직속 군단을 상대로 일전을 벌이는데 힘을 보내주십시오.”
“오···오만···”
거점장들이 드낙의 정보 오픈에 벌벌 떨었다.
십만 대군을 이 황무지에서 유지하고 있음에도 눈앞이 깜깜해졌다.
검은 돔을 방치하고, 검은 보급로가 나타났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대가가 그들에게 떨어져 내렸다.
“5만 이상이면···패색이 너무 짙소.”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게···그들을 말려 죽이는 게 어떻소. 검은 보급로가 엄청나게 크고 길지만, 앞으로 꾸준히 반년을 파괴에 집중한다면 그 보급을 끊을 수 있소.”
드낙이 고갯짓을 쳤다.
“마신장이 바보인가, 마신이 멍청이인가. 이미 그들은 궤도에 올랐소. 드워프 제국이 망하면 검은 보급로도 필요가 없소. 직속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검은 돔 또한 자체적으로 오롯이 섰다는 소리요.”
그 말에 그 어떤 거점장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전차원계를 침략하며 업을 수급하고 있는 신 중의 신. 마신 성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과 무서움을 명예와 용기로 바꾸기 위해서 드낙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면 그것보다 큰 업적이 어디에 있겠소?”
“명예도 중요하지만···황무지의 삶은···”
거점장 하나가 어물쩍거리며 말을 끝내지도 않고 우물거렸다. 전에는 볼 수 없는 겁쟁이의 모습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칼이 목을 겨눌 때, 죽여보라며 앞으로 나서는 자는 100명 중 1명도 없었다.
“고대 문헌으로부터 내려온 내용을 살펴보면, 검은 돔의 마수 군단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 지금 우리의 군세로는 어림도 없으니 드워프 산맥으로 도망쳐서 드워프들과 합일하여 산맥에서 싸워야 하오.”
후퇴하자고 권유하는 자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흩어져서 생(生)을 도모하고 후일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시간은 마신장의 편이오.”
드낙의 말에도 이들 모두 나서지 않았다. 이에 드낙이 결국 마지막 수단을 꺼내기로 했다. 구역질 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장고(長考)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뜸을 들였다.
모든 하프 드워프들이 후일을 도모하자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그대들을 이해하오. 후퇴하시오. 난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회전을 걸겠소.”
“죽음밖에 없소.”
“적어도 반은 죽일 수 있겠지. 그리한다면 드워프 제국에게 희망을 건넬 수 있소. 잠자고 있는 드워프들을 조금 더 많이 깨울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에 하프 드워프 거점장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10명의 인간보다 드워프 한 명이 깨어나서 망치와 도끼를 쥐는 게 더 이득이기에 죽음을 선택한 동부왕의 결정은 지극히 희생적인 판단이었고, 세계를 위한 길이었다.
그 죽음은 모두 드워프의 군대가 커지게 만들 수 있었다.
이는 곧, 하프 드워프들이 말하는 후일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드낙은 실로 능숙하게 그들의 의견을 논파해버렸다.
“어째서, 그 정도까지 하는 것이오? 고블린과 인간이 통합하는 모습을 봤소. 그들은 황무지로 대량의 식량과 나무 숯을 가져올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소. 그렇다면 그대들 또한 후일을 도모해서 큰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지 않겠소?”
그 모습에 드낙이 속으로 검게 웃었다.
‘꿀을 빨아보니, 아쉬운 것이지.’
황무지에 대량의 식량과 나무 숯이 들어왔다. 그 꿀을 더 먹고 싶어하는 게 그들이었다. 결코 동부왕의 몰락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세계의 위험은 마신장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오. 제국의 내전은 커지고, 괴이한 소문이 퍼지고 있소. 이는 엘프를 움직이게 만들고 모든 종족이 사라질 수도 있소. 냉혹한 엘프들은 화산이 터지고 나서 그 화산을 완전히 얼어붙게 하게 분명하기 때문이오.”
추측 뿐이지만 드낙의 말은 예언처럼 들렸다.
하프 드워프들은 결국 마수 증원군과 싸우기를 결의했다.
큰 고비를 넘긴 드낙은 10만3천의 군세로 5만5천의 검은 돔의 마수 군단과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남은 보름 동안 수많은 준비가 이루어졌다. 모든 것을 걸었다. 거푸집도 녹여서 총알로 만들었고, 대장간이 1개가 될 때까지 모든 철을 녹여서 전쟁 물자로 만들었다. 가정에서 쓰이는 숯도 모조리 거두어서 때려 넣고, 총을 쥘 수 있는 드워프들도 동원되었다.
그 모습에 드낙 또한 더욱 군대를 불렸다.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군세는 13만6천!
하프 드워프 2만3천.
고블린 5만5천.
남부 용병 5만8천.
‘2배 이상의 전력 차. 해볼 만하다.’
드낙이 서슬 퍼런 눈으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검은 것이 꾸물거리며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며 날이 갈수록 커졌다.
*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앳되어보이는 얼굴에 포니테일로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레플리카 이시연(Lee Si-yeon)이 찰갑에 있는 혁대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새하얀 연기가 퍼져나갔다.
푸른 피부를 지니고, 체온이 거의 없는 그녀였지만 그런데도 담배의 성분은 그녀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숫자가 제법 되는데?”
그 말에 레플리카 유스타니스(Eustainis)는 어깨에 짊어진 악령의 대형 둔기를 바닥에 꽂으며 가만히 있었다. 명령을 기다리는 무기처럼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롯이 이시연의 뜻대로 하라고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넌?”
“지휘권은 너가 가지고 있잖아? 난 언데드를 수복하고 마법을 막는 일만 하면 돼.”
검은 보급로의 시체에서 피의 길이 만들어지며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주위에 피가 모였다. 네크로맨서 중에서도 고등한 그녀에게 시체 자원이 그냥 모이고 있었다. 특히나 피는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자원이었기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녀에게 모이고 있는 건 매우 컸다.
부유촉수에게 깃든 사령술이 피의 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피를 모아서 시체 자원 보유력을 한층 더 높이고 있었다.
“일단은 정보부터 얻어야겠어. 해골마 1천 기를 만들어줘. 방령들을 태워서 주변을 훑어야겠어.”
“그거야 쉽지. 주변에 널린 게 시체인데.”
그렇게 말하자마자 검은 보급로의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화염이 시체 기름을 타고 빠르게 검은 보급로를 태우기 시작했지만, 자연스럽게 화염은 사그라들었다.
〈검은 보급로〉를 초기에 만들었던 흑마법사들이 부여한 악마의 힘이 자연적인 불꽃을 사그라뜨렸다. 하지만 검은 보급로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주변 일대 5km에 있는 검은 보급로가 화약과 장작에 의해서 사그라들었다. 마수들의 보급은 3일을 채 못 갈 것이다.
“지하굴을 뚫었네.”
마수들의 피해는 자잘했다. 지하 굴은 함께 무너졌기 때문에 마수군단이 사용할 수 없었다. 억지로 파보았지만 통로의 크기 또한 작았다. 고블린과 핏빛쥐 노동자가 드나드는 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준비를 단단히 했네. 상대 장수의 수준이 높고, 병사들의 전술실현율도 높아 보인다.’
이시연은 일단 1천 기의 기병을 곳곳에 뿌렸다. 언데드인 검은 돔의 방령들은 엘리자베스에게 자신들이 본 것을 그대로 전할 것이다.
국지전, 정보 획득을 위한 공방이 시작됐다.
황무지의 평야에 땅을 파서 은폐하고 있던 고블린과 용병들 하프 드워프로 이루어진 작은 분대와 뿔뿔이 흩어진 마수 군단이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