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7 <-- 검은 보급로 -->
둥. 둥. 둥.
지하에 거대한 북소리가 울렸다. 이 북소리에 맞춰서 거대한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곳에 황금과 수많은 유색 보석을 두른 붉은혀 리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선두에 있는 자는 갈래꼬리 왕(Forked-tail king).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었고, 매우 화려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만 화려한 게 아니라 남부에 있는 붉은혀 리전의 복장 자체가 화려하고 요란했다.
남부 왕국의 우월한 지하 자원을 토대로 빠르게 성장했고, 잉여 자원이 넘쳐나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 동공의 반대편에는 이미 〈짧은 털 리전(Short Fur Region)〉과 〈매력적인 눈썹(charming Eyebrow)〉 주술왕이 도착해있었다.
남부의 핏빛쥐는 이미 도착했고, 공조를 시작했지만 남부 핏빛쥐의 왕인 갈래꼬리 왕은 이제야 도착했다. 특히 본대를 이끌고 오는 모습에서 여차하면 전투도 수행할 수 있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잉여 생산력이 뛰어나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드낙이 후방 보급에만 모습을 드러내라고 핏빛쥐에게 이미 주문을 했고, 표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건 고블린에 불과했으며 그 고블린조차도 하프 드워프에게 보급을 해주는 용도였다.
“어지간히도 많이 끌고 왔네.”
길게 늘어진 눈썹을 손가락으로 쓸며 매력적인 눈썹 주술왕이 혀를 찼다.
두 핏빛쥐 의원은 서로를 향해서 걸어갔고, 이내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졌다.
“여전히 소란스럽고 요란하군.”
그 말에 갈래꼬리 왕은 쩍 갈라진 꼬리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거칠게 꼬리가 바닥을 치며 소리를 냈다.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여겨졌고, 꼬리에 달린 금 장신구가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주술찍찍이들이 가진 것이 없어서 질투를 하나? 이거 놀라운 일이군!”
“황금 똥쟁이가 뭔 헛소리냐? 누가 너희를 질투한다고?”
“너 말이다. 주술찍찍이야.”
그 말에 주술왕의 손에서 주력이 피어올랐다. 갈래꼬리 왕 또한 들고 있는 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라, 갈래꼬리 왕.”
“너야말로 허튼 소리하며 도발하지 마라.”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적 앞에서 금 장신구가 예쁘다고 할 생각이냐?”
“위협이다. 위협. 너희는 지능이 딸려서 복장의 중요함을 몰라.”
당장이라도 붙을 기색이었지만 눈치를 보던 부관들이 소식을 받자마자 냉큼 서로 외치기 바빴다.
“위대한 11인의 위원회의 왕들이시여. 고블린 주술장이 하프 드워프와 접촉했습니다!”
흥이 깨진 두 핏빛쥐 위원은 한 걸음 서로 물러나며 턱짓했다.
“주술을 가동해라.”
동공에 있는 주술 토템에 주력이 스며들며 바닥은 나무의 진한 갈색으로 빛나고, 벽을 타고 오르는 주력은 푸르른 나뭇잎색으로 물들었으며 동공의 꼭대기는 하늘색으로 물들어갔다.
이는 곧 자연이었다.
동공의 중앙에 거리를 뛰어넘어 영상이 물처럼 출렁거리며 보이기 시작했다.
핏빛쥐들의 이목이 그곳으로 쏠렸다.
서부 핏빛쥐 소속의 고블린 주술장과 하프 드워프들의 첫 조우였다.
그들의 만남은 황무지에서 이루어졌고, 검은 보급로와도 먼 곳에서 행해졌다. 자연스럽게 몬스터의 숫자도 적었고,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언덕진 지형을 피했는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였다.
드낙이 조치를 취했다고 해도 종족이 다른 고블린과의 조우였다.
인간의 말을 모두 믿기에는 세상은, 현실은 지독했다.
〈식량 거점장, 카다르(Kadar)〉와 그 휘하의 병력 1천 명의 하프 드워프가 집결했다. 엄청난 대군이었고, 하프 드워프 역사상 몇 없는 전투에서나 볼 법한 숫자였다.
하프가 대량으로 사는 지하 거점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지만, 화약을 만드는 곳이 바로 지하 계곡이었고, 그런 중요도가 높은 곳과 비교를 해서는 안 되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하프 드워프를 동원했고, 그 숫자는 실로 대군이라 불릴 만 했다.
“기이아!”
기-아!
기를 길게 말하며 장총인 블랙 피닉스를 높이 세우고, 아래로 향하게 하며 땅을 찍으며 소리를 크게 냈다. 그 위압감은 실로 강하게 고블린들의 군세에게 느껴졌다.
하프 드워프들 중 오직 200명만 포수들이었고, 브라운 드레이크는 고작 50대에 불과했다. 그만큼 가져오는 게 힘들었다.
강력한 물리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운반이 힘들었다. 곡물을 많이 먹는 가축 또한 키울 수 없었으므로 하프 드워프들이 직접 끌어야 했다. 그들은 빈 수레를 많이 끌고 왔는데 특이한 것은 바퀴가 굵고 컸으며 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또한, 수레 자체가 길고, 높았다.
하프 드워프의 우월한 신체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수레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대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고블린 주술장이 고블린 정예병을 끌고 군세에서 빠져나왔다. 카다르 또한 몇몇 하프 드워프를 대동하고 떨어져나왔다.
가장 먼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카다르는 드낙이 써준 계약서를 내어줬고, 고블린 주술장은 드낙의 명령서를 보여주었다.
서로 오해될 만한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중에 3개의 쟁점이 이곳에서 해결되었는데 하나는 보급을 받는 지점. 둘은 숯의 성분과 제작 방식에 대한 드워프들의 의견. 셋은 보급의 양을 넘어선 보급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교역을 한다는 것.
“문제가 없으면 받아들이겠소.”
그 이유는 그들이 아량을 베풀어서가 아니었다. 종족과 종족의 거래였다. 무조건 이기적으로, 자신들의 종족을 위해서 투쟁하고 싸우고 논쟁하여 쟁취해야 했다. 단 0.1%도 양보해서도 안 된다.
물론 드낙은 그런 종족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난 자였다. 인간끼리 투쟁하던 지구에서 살아서 동족에 대한 애착이 조금 낮았다. 또한 동부왕이 되기까지 얽히고설키며 인간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적었다.
CCTV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거침없이 사람의 뒤통수를 칠 수 있었다.
고로 드낙의 이런 친 하프드워프식 외교는 하프 드워프들에게서 좋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블린과의 교역을 허락했다. 고블린들이 제시하는 가격이 좋았기도 좋았다.
“엄청난 수준의 방어구다. 긁어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니···”
아주 날카롭게 벼린 송곳으로 방어구를 긁어서 그 수준을 확인한 고블린들이 감탄에 감탄했다. 그리고 주술사왕에게 쪼르르 가서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상품 중에서도 상품입니다. 크놀들의 높낮이 용광로에서 나오는 것보다 실로 대단한 화력으로 만든 듯합니다.”
공기의 높낮이에 따라서 강력한 바람을 이용하여 화력을 높이는 크놀들의 용광로에서 나온 물품보다 뛰어났다. 당연히 〈하프 드워프의 손길〉 때문이었다. 그 초월의 힘이 방어구에 깃들어있었다.
단점이라면 장총, 블랙 피닉스의 탄환에는 뚫리고 저지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당연하였기에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
고블린들은 하프 드워프들이 준비한 물품을 모두 구매하고, 막대한 양의 식량을 지불했다. 서로 웃음기를 머금었다. 기본으로 받은 식량 보급품은 대부분 벌레였기에 하프 드워프들 또한 만족스러운 교역이었다.
“가장 큰 문제를 해결했지만, 나무 숯을 확인하고 싶은데 해봐도 되겠소?”
“마음대로 하십시오.”
카다르와 하프 드워프가 단번에 나무 숯이 든 가죽 포대를 꺼냈다. 가죽 포대에서는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 속에서 물고기의 비린내가 났다.
“이게 무슨 냄새인가? 평범한 기름은 아닌 것 같은데.”
포대 하나하나에 발라져 있는 기름에 하프 드워프들이 절로 물었다. 왜냐하면 모든 포대에 이런 기름이 발라져 있어서였다. 그 양은 실로 대단했고, 동시에 하찮게 쓰이고 있어서였다.
“물고기 기름이오.”
“사려면 어느 정도가 필요하오?”
“모르오. 그렇게 중요하오?”
“중요하고말고···지금 당장 계약이 가능한가?”
그 말에 고블린장이 우물쭈물했다. 남부에서 온 포대를 사용했기 때문에 자세히 알지를 못했다.
“남쪽에서 가져온 것이라, 내가 아는 것이 없소.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드리고 싶소만.”
그 말에 카다르가 냉큼 자기 아들을 부르도록 지시했다. 곧 하프 드워프 군세에서 그의 아들이 달려왔다.
“이 기름을 봐라, 가죽 포대에 그냥 바르고 자빠졌다.”
“허.”
카다르의 아들 호르바스(Horvath)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수분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기름은 화약을 관리하는 하프 드워프들에게는 황금과 같았다.
“네가 고블린들과 가서 계약하는데 시간을 아끼도록 해라.”
“한 괴에 어느 정도를 받아야 합니까?”
“10kg···아니, 이 정도 생산력이면 20kg을 받아라. 최대한 더 받아낼 수 있으면 받아내고.”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고, 호르바스는 고블린 주술장과 함께 그들의 거처로 가게 되었다.
지하의 습기를 생각하면, 하프 드워프들의 기름 사랑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들을 보내고 나서야 카다르는 나무 숯을 확인했다.
킁킁.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져서 부러뜨려도 보고, 비벼보았다. 입에서 침을 뱉어서 가루에 섞기도 했다.
“이 일대에서 자라는 나무는 아닙니다.”
“남쪽인가. 인간과 고블린이 왜 그렇게 협력했는지 모를 일인데.”
“지하는 사실 인간들이 사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영토가 서로 겹치지 않으니 우방국이 되기 좋습니다.”
탁탁.
손을 털며 카다르가 숯을 다시 밀봉했다. 이 물고기 기름이 묻은 가죽 포대는 당연히 숯을 보관하기에는 너무 가치가 높은 것이었다. 돌아가서 화약을 보관할 포대로 쓸 생각을 가졌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소.”
“서로 만족할만한 교역이 되어서 오히려 내가 더 감사드리오.”
뒷배가 있는 고블린 주술장은 크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 풀렸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모두 주술을 통해서 핏빛쥐들의 11위원 중 2명인 갈래꼬리 왕과 매력적인 눈썹 주술왕의 눈에 새겨졌다.
“황무지에 살기 때문에 경제와 교역으로 그들을 쉽게 제어할 수 있겠는데.”
“식량 의존도를 높여서 그들로부터 양질의 무기와 방어구를 받아내면 핏빛쥐의 전투력은 단번에 상승할 수밖에 없다.”
“철괴 또한 써먹을 곳이 많다. 더 강한 주술을 부여할 수 있을 터다.”
두 핏빛쥐 의원은 언제 티격태격했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단번에 하프 드워프들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또한 황무지의 척박함을 생각한다면 굳이 황무지를 먹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음흉하게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드워프의 피가 섞인 인간이 이 정도인데 드워프는 오죽할까? 그들은 결코 황무지를 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성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더욱 위협적이다. 찍찍.”
드워프와 하프 드워프를 경계했다. 1되를 주면 1되를 내어주는 드워프들은 서로 사이가 좋아질 수밖에 없지만, 핏빛쥐들은 달랐다. 그들은 드낙이라는 살아있는 창조주를 믿고 따르고 있어서였다.
“검은 보급로의 수준이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밀어주겠지만, 그들이 전공을 크게 얻는 건 정말이지 기분 나쁘군.”
갈래꼬리의 말에 매력적인 눈썹이 대답했다.
“동감이다. 그것을 덮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
“어떤?”
“주술 장비를 보급해서 그들의 공이 결코 그들의 공으로만 보이게 하지 않으면 된다. 시각적으로 화려한 것을 공짜로 내어줄 생각이다.”
“상당한 출혈인데···”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드낙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이 두 핏빛쥐는 서로 악수를 굳건하게 하였다.
“주술을 담을 그릇은 우리 붉은혀 리전이 보내겠다. 원하는 유색 보석이나 금속이 있나?”
“붉은색의 루비와 구리가 많이 필요하다.”
그 말에 담긴 거대한 자신감에 갈래꼬리 왕이 웃음소리를 길게 뽑아냈다. 자연스럽게 매력적인 눈썹 주술왕도 함께 웃었다.
*
드낙은 밤이 되자 숨구멍만 뚫어놓은 굴에서 빠져나왔다. 머리만 빼꼼 내밀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이 구름에 갇혀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동시에 뭔가를 씹는 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크르르···
중형 몬스터가 드낙의 머리위를 지나가며 숨소리를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고 검은 보급로에 있는 시체를 뜯어먹었다.
콰자작! 오도독!
뼈가 씹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살점과 피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드낙이 굴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왔다. 그다음에 하프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대검을 뽑아냈다.
적혈대검을 쓰지 않는 이유는 피가 닿으면 붉은빛을 내기 때문이었다. 드낙이 숨을 들이켜면서 상체를 숙이며 왼손으로 땅을 짚고, 대검을 어깨에 짊어졌다. 그다음에 숨을 참으며 단번에 도약했다.
악마, 게페락스의 변모의 힘이 드낙의 다리에 적용하며 그가 할 수 있는 도약보다 더 높이 뛰었다.
아무리 뛰어난 밤눈을 해도 윤곽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드낙은 그 무엇도 볼 수 없었다. 밤눈에 뛰어난 눈을 하고 있었지만, 빛 자체가 먹구름에 갇혀있어서였다.
‘느껴진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역동적으로, 자신감 있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천부적인 암살자의 재능.
어린애의 미약한 숨소리는 느낄 수 없더라도 몬스터와 마수의 그 폭력적인 기질은 드낙에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푸-걱!
머리통에 그대로 대검이 박혔다. 드낙이 단번에 대검을 뽑아냈다. 피가 그의 전신을 적셨다.
백정처럼 피를 묻히며 업을 벌고, 양반처럼 단 한 마디에 수천 명의 업을 소비하는 드낙의 모습은 실로 현대인 같았다. 100원, 500원 아끼다가 수십만 원어치를 한 방에 카드로 그어버리는 그 소비성향!
소비의 괴물.
‘업(業). 업을 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