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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646화 (645/1,239)

0646 <-- 검은 보급로 -->

드낙의 요구 조건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만은 아니었다. 계약서를 통해서 빚으로 달아두기 때문이다.

“10년 내로 갚지.”

“예.”

드낙의 말에 아라온이 냉큼 대답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큰돈이 들기 때문에 10년 내로 갚는다는 뜻은 매년 일정 부분을 갚아나가며 10년 안에 모든 걸 갚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10년이면 아주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그만큼 전쟁에 소비되는 물자는 상상을 초월했고, 그 덕에 아라온은 제법 구미가 당기는 표정을 지었다.

시민들은 굶어 죽겠지만, 기득권층은 한 층 더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드낙은 사인을 하고, 양피지 2장을 아라온과 함께 나누었다. 그렇게 남부는 황무지로 용병을 보내는 전쟁에 동참하게 되었다.

막대한 이득이 어음이라는 말 한마디로 매겨져서 살을 찌운 이들을 더욱 배를 불릴 것이다. 드낙 또한 이를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검은 보급로〉와 〈하프 드워프〉. 양쪽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방안이 이것뿐이었다.

‘인간과 하프 드워프가 전쟁에서 활약하고, 핏빛쥐와 고블린은 하프 드워프에게 보급을 대어주며 관계를 쌓는다.’

드낙이 가지게 될 이득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래서 다들 전쟁하나 보다. 흐흐.’

절로 음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남부와의 거래를 마친 드낙은 세리안과 모비딕을 수도에 남겨두었다. 용병들을 통솔케 하기 위함이었고, 허튼짓 안 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움직임이 있으면 쉐도우 위스퍼가 정보를 줄 것이다.”

“내 식대로 해도 상관없어?”

“중요한 직책에 있는 자는 죽이지도 말고, 억압하지도 마라.”

“그 밑은 상관없다는 말이네.”

세리안이 확답을 원하듯이 대답했다. 드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상인은 〈드낙의 어음〉을 노릴 게 분명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필연이다.

더는 인간을 믿지 않고 있는 게 드낙이었다. 특히나 전쟁 특혜를 누리는 상인은 다른 인간을 짓누르고 출세한 이들이 분명했고, 그들 중 비리를 저지른 상인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상인일 뿐이었다.

자신이 악을 행하면 쉽게 용서할 수 있지만, 타인이 악을 행하면 반드시 처단해야 하는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습성이었다. 감정 위에 쌓아올려진 이성의 탑은 그만큼 부실했다.

“난 검은 보급로 주변에서 몬스터와 마수들을 약화시키고 있을 생각이다.”

그 말을 세리안에게 남기고 드낙은 블러디 만티코어에 올라타 단번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세리안은 그 뒤로 수도에 남아서 맛있는 것을 먹고, 다양한 종류의 술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모습은 실로 한량 같아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이들이 손을 쓱싹쓱싹 비비며 살살 모래성을 갉아먹듯이 허튼 짓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다섯, 열, 열 하나에···스물.”

포대를 새던 관리의 입에서 나오는 숫자가 훅훅 늘어났다. 포대는 9개였지만 순식간에 20포대로 변모했다. 장부 또한 그렇게 만들어졌다. 11개 밀 포대에 대한 이득이 주둥아리를 살짝 놀린 것만으로도 얻어졌다.

당연히 쉐도우 위스퍼로 활동하는 핏빛쥐들은 이를 세리안에게 쪽지의 형식으로 전했지만 그녀는 태평하게 지낼 뿐이었다.

‘하찮다.’

포대를 백 포대, 천 포대를 속여도 세리안의 눈에는 하찮게 여겨졌다. 그리고 이를 사전에 싹을 자른다면 눈치 보던 상인들이 허튼 짓거리를 안 할 게 분명했다.

그건 세리안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잡도둑 하나 잡자고 여기에 머무는 게 아니다.’

키우고, 키워서 수많은 이들을 잡아먹어야 했다. 그게 공이 된다. 동시에 재화가 들어오고 재물을 손에 넣는다. 이는 곧 더 많은 용병을 운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리안은 상인들이 온갖 수단으로 얻은 돈을 단번에 가로챌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똑똑한 인간의 흉악함이었다. 1명이 모은 금화를 합법적으로 가로챌 수 있다면 세리안은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더 큰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용병은 돈이다. 어음을 말해도 남부의 수준에 한정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화폐를 뿌려야 한다. 그건 결코 어음이어서는 안 된다.

어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화폐가 필요했고, 이를 상인들의 추악함을 통해서 해결할 마음을 가졌다.

때는 금방 찾아왔다.

자고로 인간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었다. 남이 이득을 보는 걸 보고도 안 하는 놈은 스스로가 병신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 민감해 했다. 죄를 저질러도 같이 저지르면 더욱 흉측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

‘이래서 내가 상인을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

돈에 인생을 바치는 그 탐욕스러운 자들은 변하는 게 없었다.

완전무장을 하고, 세리안이 내성을 나섰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당연히 연병장이었다. 그곳에는 어떻게든 이번에 출세를 한 번 해보겠다는 용병들이 일찍 나와 있었고,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세리안이 새벽수련을 할 때마다 적당히 자세를 고쳐주고, 딱 3합 정도만 검을 부딪쳐줬기 때문이다. 실력 차이 때문에 완전한 실전보다 더 좋은 경험을 제공해주었다. 잘 다듬어진 상황을 뇌와 몸에 때려 박아주기 때문이다.

그 3합의 수련을 용병들 중 나이가 30살 이상이 된 이들은 남몰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그 짜릿함. 그 깨달음은 30년 만에 지하에 갇혀있다가 처음으로 햇볓을 누렸을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물론 그저 기본 검술과 공방에 대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귀중했다는 게 남부 용병들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새벽 수련에 동참하는 용병들은 용병답지 않게 세리안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날카롭고 착 가라앉은 얼어붙은 빙하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세리안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 있었다.

“오늘 새벽수련은 없다. 가서 테이블을 가져와라.”

“예!”

너도나도 달려갔다. 어떻게든 점수를 따겠다는 생각이 자리잡혀있었다. 테이블에 세리안이 양피지를 펼치고, 못으로 고정했다.

외성지역과 내성지역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는 X표가 딱 10개 그려져 있었다.

“동부왕의 어음에 담긴 약속에 똥오줌을 뿌리고 있는 더러운 상인 놈들의 대저택이다. 상주 인원은 호위까지 합쳐서 50명 남짓 된다. 오늘 이 10곳을 모두 친다.”

“저희만으로 말씀이십니까?”

불과 300명에 불과한 숫자였다. 나머지 이들은 그저 머릿수만 채우고 있었고, 새벽 수련에도 나오지 않는 용병들이었다. 그들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머릿수가 너무 많으면 사전에 발각된다. 1곳에 30명씩도 많다. 새벽이기 때문에 적들이 가장 피곤해 있고, 깨어있는 이들도 적다.”

그렇게 말하며 세리안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1명당 2명 죽이기도 힘들 것이다. 만약 투구를 쓴 호위의 수급을 3개 챙긴다면, 상을 주마.”

그 말에 용병들의 열기가 자연스럽게 올라왔다. 칼밥을 먹으며 살면서 향상심도 가진 게 이들 300명의 용병이었다. 그 점을 세리안은 쿡 하고 찔렀다.

잘 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새벽 수련을 하면서 뜻이 맞고, 서로 성격이 맞는 이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30명씩 뭉쳐라.”

세리안의 말대로 10개 조가 만들어졌고, 그녀는 곧바로 이들을 내보냈다. 동시에 아라온을 만나러 향했다.

캉.

내성 꼭대기 층까지 막힘없이 진행했지만, 마지막에 할버드에 의해서 막혔다. 전신갑주를 입은 성채 수비병이 그녀의 앞을 단단히 막았다. 체격도 그녀보다 머리 두 개 반은 더 컸다.

“기다리십시오.”

“이미 연락을 넣었는데?”

“전 법대로 할 뿐입니다.”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갔다. 15분이 지나서야 세리안은 아라온을 만날 수 있었다.

‘개놈이, 감히 나한테 수작질을 해?’

드낙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였다. 그 때문에 세리안의 심기가 뒤틀렸다.

“이런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아라온의 곁에는 호위병만 다섯 명이었다. 그걸 보며 피식한 세리안이 품에서 쪽지를 꺼내 호위병에게 손짓했다. 호위병이 받아들고,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아라온에게 가져다주었다.

다수의 쪽지를 모두 확인한 아라온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세리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 바로 조치하겠소. 감히 동부왕의 은혜를 이렇게 탐욕스럽게 하려는 자들은 엄벌에 처해야하오.”

“걱정하지 않아도 이미 내 사람을 보냈소.”

세리안의 말에 아라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잡아야지 상인들이 가진 것을 자신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를 친 세리안은 자신의 것을 훔쳐간 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기는 남부다. 나의 땅이다! 그곳에 사는 시민들은 나의 명령으로 체포되어야 한다. 이건 나의 권위에 흙을 뿌리는 짓이고, 매우 무례한 행동이다!”

거친 반응에도 세리안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싸늘함에 절로 아라온이 위축이 되더니 이내 기침 소리를 냈다.

“동부왕의 어음은 이번 전쟁에 대한 비용을 대신 부담한다는 내용이오. 그와 관련되어있으니 당연히 그 책임은 나에게 달려있소. 하지만 나 또한 이곳이 남부임을 알기에 왕자에게 알리려고 온 것이오.”

“판결은 내가 내리도록 해주시오.”

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동부의 군법으로 해결할 것이오. 하지만 시민들이 볼 수 있는 벽보에는 내 이름을 왕자 뒤에 적으셔도 괜찮소.”

실리는 자신이 가지고 명분 정도는 반을 떼어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불평등한 소리였지만 여기서 아라온은 세리안과 각을 세우며 이득을 취할 수 없었다. 드낙이 하려는 일은 시일이 모든 걸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 때문에 엎어지거나 지연되었다?

‘언제든지 다른 자가 남부를 관리할 수 있다.’

세상에는 별의 개수만큼이나 인재가 있었다. 그저 앉을 자리만 부족할 뿐이었고, 드낙은 인연을 중요하게 쓰기는 하지만 신분에는 잘 구애받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무기력하게 아라온이 답하자 세리안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 꼭대기 층을 지키고 있는 강직한 성채 수비병의 팔뚝을 치며 말했다.

“언제든지 나에게 와라. 너 같은 강직한 사내는 어디서든지 빛을 볼 수 있다.”

그러고는 브로치를 한 개 내어주었다. 세리안 불파겐의 앞을 막고, 법대로 행한 대가는 황금으로 이루어진 브로치였다.

척 봐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어 보였다. 그 덕에 감히 성채 수비병이 이를 거부했다.

“너무 큰 가치를 지닌 물건입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네 목을 줘야 할 것이다. 내가 준 선물을 거부하는 건 나의 권위를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귀족의 말을 번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받겠습니다.”

세리안의 살기와 협박에 그가 버티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흥얼거리며 세리안이 계단을 쭉쭉 내려갔다. 내성에 배정받은 연병장에서는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 저 외침, 바로 저 외침이다. 살고 싶어하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보라, 저게 인간인지 짐승인지 실로 알 수 없도다.’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약육강식의 사회.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만든 인간을 하나의 검으로 갈고 닦는 사회의 모습이 저 비리를 저지른 상인의 울부짖음에 담겨 있었다.

피가 쏟아져나왔다.

일가족부터 집사에 시종 그리고 호위 병사와 그 가족까지.

금방 잉태된 아기들과 임신한 자마저.

모두 핏물이 되어 연병장의 흙에 스며들어 갔다.

“흐으음.”

세리안이 처형한 곳에서 시체를 치우고 있는 용병들을 보며 코로 피 냄새를 깊게 맡았다. 시원한 전방이 돋보이는 바다에서 차가운 바람을 전신으로 맞는 것처럼, 피가 온몸에 적셔진 듯한 농후한 피냄새가 맡아졌다.

동시에 10명의 부상이 지닌 방대한 양의 재물이 세리안의 손으로 들어왔고, 그 돈이 굶어 죽기 싫은 부랑자들을 용병으로 바꾸고, 많은 장비가 수많은 이들의 손에서 만들어져서 수도로 향하게 하였다.

드낙의 어음이 아라온과 기득권층을 움직였다면, 보다 실체를 지닌 돈은 남부 전역에 있는 부랑자들까지도 움직이게 하였다.

동시에 아라온과 기득권층이 상인들을 앞세우고 몰래 빨아먹는 양이 줄어들었다. 부상 10명이 다 죽어서였다. 세리안의 거친 행보에 왕자조차도 어찌 못하는데,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찍찍! 여기가 보급 거점으로 어울린다!”

“아니다! 거기까지 지하 도로를 지으면 너무 길어진다. 수원을 얻을 수는 있지만 부족함이 있다. 거기에 있는 지하수를 수로를 통해서 끌어오는 게 낫다.”

짧은 털 리전은 하프 드워프에게 보급을 줄 수 있는 곳으로 향하기 위한 길과 거점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수직형 지하 거점이 대부분이라 그 특수성이 절로 돋보였다. 그렇기에 수평적으로 움직이는 황무지 길을 만드는 일은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은 드낙이 오기까지 계속 논의가 되었고, 남부의 〈붉은 혀 리전〉의 도움으로 겨우 끝맺음을 할 수 있었다. 붉은 혀 리전의 화려한 복장만큼이나 그들은 자원이 풍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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