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5 <-- 검은 보급로 -->
드낙은 가장 먼저 핏빛쥐에 연락을 넣었다.
이 서부의 황무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핏빛쥐는 〈짧은 털 리전(Short Fur Region)〉었고, 그들의 대장은 〈매력적인 눈썹(charming Eyebrow)〉 주술위원장이었다.
이름이 특이하지만 실로 다른 핏빛쥐와는 성장 방식이 달랐다. 뿔과 함께 눈썹 또한 길어지고 있는 게 그였다.
물론 연락을 바로 쉽게 넣을 수는 없었다.
황무지라는 환경 특성상 수평적 영토 확장보다는 수직적 영토 확장을 통해서 수원을 깊이 있게 이용하는 게 이곳에 사는 핏빛쥐들이었다.
점조직처럼 세력이 수원마다 배치되어있었고, 교묘하게 하프 드워프들의 세력 구도와 맞붙어있었지만 암약하고 있었는데, 그게 가능한 이유는 바로 짧은 털 리전의 핏빛쥐들은 주술에 특화되어 있어서였다.
그그그긍.
드낙의 주력이 황무지의 바닥에 뿌려지자 모래가 바람에 의해서 밖으로 밀려나 드낙이 있는 자리가 아래로, 아래로 꺼졌다. 자연스러운 분지 지형이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돌로 된 토템과 바닥이 있었고 드낙이 이를 조작했다.
‘제법이다.’
4개의 토템은 거짓된 토템이었고, 진짜는 돌로 된 바닥 그 자체였다. 물론 4개 토템 모두 돌바닥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게 정말 탁월했다. 완벽하게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니었기에 속일 수 있었다.
4개의 토템은 하나씩 불, 물, 땅, 바람을 뜻했고 동시에 발동하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 주술적 장치가 존재했다.
‘100이면 90이 여기에 속을 것이다.’
어중이떠중이를 걸러내기에 딱 좋았다. 물론 흉악하게 그 몸을 4원소로 찢을 것이다. 자신이 사용한 주력에 자신이 먹히는 방식이었기에 효율성도 좋았다. 상대의 힘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꼴이었다.
바닥을 통해서 제대로 토템을 가동한 드낙은 땅을 통해서 토템의 기운이 나무의 뿌리처럼 깊이 뻗어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주술로 만들어진 나무뿌리는 맹렬한 두더지의 발톱처럼 뻗어 나갔고, 이내 짧은 털 리전의 거점 중 하나에 닿았다.
부으어엉.
지네의 꼬리를 말아서 만든 악기가 둔탁하게 울렸다. 저급했지만 가장 수량을 많이 만들 수 있는 악기여서 자연스럽게 많은 곳에서 쓰이고 있었다. 특히 저음이라서 지하에서 멀리까지 퍼질 수 있었다.
소식을 받은 주술사 핏빛쥐와 10명의 핏빛쥐 병사가 드낙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뜨으낙!”
“뜨으낙!”
이들은 모두 드낙에게 경례를 올렸다. 드낙은 그들의 장비를 가장 먼저 훑었다. 지역마다 모두 그 복장이 달라서였다.
‘모두 주술 물품을 다 가지고 있네.’
조류의 깃털은 초보 주술사의 징표나 다름없었다. 바람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었고, 어디서든지 찾을 수 있었으므로 초보 주술사는 〈바람의 주술사〉이기도 했다.
이런 깃털은 10명의 핏빛쥐 일반병이 모두 치렁치렁거릴 정도로 많이 지니고 있었다.
짧은 털 리전이 주술에 특화된 리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를 도와줘야겠다.”
“명령만 하십시오! 매력적인 눈썹 주술왕에게 바로 전하겠습니다!”
모두 무릎을 꿇었다. 당장이라도 드낙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정도로 높은 충성심이 말과 행동에서 느껴졌다.
드낙은 하프 드워프에게 식량과 나무의 숯을 대주라고 했으며 표면에는 고블린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11명의 핏빛쥐 척후는 그대로 다시 지하 속으로 달려나갔다. 그걸 본 드낙은 블러디 만티코어를 타고 날아올랐다. 이를 본 세리안과 모비딕이 제법 먼 곳에서 따라 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
“몰라도 돼.”
드낙은 세리안에게 핏빛쥐를 최대한 자주 보여주지 않았다. 핏빛쥐의 거대하고, 숭고하며 희생적인 충성심을 보여주기가 싫어서였다.
*
찍찍찍!
털이 적은 짧은 털 리전 소속의 핏빛쥐 새끼들이 꼬물거렸다. 수레에 가득 들어있었는데, 한 수레에 수백 마리가 넘었다.
매력적인 눈썹 주술왕이 그 모습을 높이 쌓은 제단에서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동공에 수많은 핏빛쥐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머리와 등에 뿔이 나 있었다.
오늘은 〈형제와 형제로〉 의식을 행하는 날이었다. 오늘을 위해서 짧은 털 리전은 많은 준비를 했다.
다른 리전에 비해서 숫자는 13만에 불과했지만, 전원이 주술 능력을 지닌 것이 짧은 털 리전이었고, 자연스럽게 의식과 행사가 많이 잡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형제와 형제로 의식은 가장 큰 의식이기도 했다.
뿔없는 핏빛쥐 새끼들이 사정없이 매우 낮은 경사도로 안쪽으로 기울어진 땅에 쏟아졌다.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고, 많은 뿔 없는 핏빛쥐가 제법 자라있기도 했다.
“우! 우! 우!”
“찍! 찍! 찍!”
주술왕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우!’소리를 내며 양손에 쥔 지팡이를 흔들어대며 춤을 췄다. 그 기도는 자연스럽게 드낙에게로 향했다. 기도하는 업은 실로 하찮았지만 주술왕이 시작하는 창조주에 대한 기도는 옆으로 퍼져나갔다.
찍 소리를 내며 수많은 뿔있는 핏빛쥐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창조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 광기를 지켜보는 그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한 채 감금당하고, 수레에 실려 온 뿔 없는 핏빛쥐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급하게 휘적거릴 뿐이었다.
갓 태어난 뿔없는 핏빛쥐부터 최대 8개월까지 성장해있는 뿔없는 핏빛쥐를 향해 주술왕이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후하고 불었다.
“후우우!”
푸화아아악!
불꽃이 부채꼴로 튀어나오며 수많은 뿔없는 핏빛쥐를 태웠다. 단번에 혼란이 생겼다. 다른 핏빛쥐들은 바람의 주술을 써서 상처를 입히거나, 묵직하고 단단한 흙의 주술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13만 중 3만을 제외하고 10만의 짧은 털 리전의 핏빛쥐가 안으로 경사진 거대한 구덩이에 들어간 뿔없는 핏빛쥐들을 다치게 하고, 지치게 하였다.
이 의식은 장장 10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춤을 추며 창조주인 드낙에게 기도를 올리고, 주력을 소모해서 뿔없는 핏빛쥐들을 다치고 지치게 한 다음에 다른 이와 자리를 교환했다.
그다음에는 모두 무기를 쥐고,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뿔 없는 핏빛쥐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끼에에에엑!”
한 손에 잡히는 뿔없는 핏빛쥐 새끼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눈 한쪽에 화상을 입고 있었다. 한 손으로 새끼를 잡은 핏빛쥐가 단번에 물어뜯어 반쪽을 냈다. 한 입을 씹고, 나머지 손에 쥔 것은 다른 핏빛쥐에게 건네주었다.
제법 성장한 뿔없는 핏빛쥐는 한 입 먹히고, 다른 곳에 내쳐져서 먹히고를 반복했다.
서로 나누고 베풀었다.
척박한 황무지에서는 나눔이 매우 중요했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난 뒤에는 경사진 곳에 자연스럽게 고인 피 주위에 모여들어 원을 그렸다. 시체를 건져서 다시 배분하고 피만 남은 곳에 주술왕이 깊게 들어갔다. 목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그가 드낙을 찬양했다.
그 찬양의 말은 단어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저 울부짖음에 불과했다. 그 운율을 따라 하며 함께 〈창조주에 대한 찬양〉을 울음소리로 배출한 이들은 각자가 든 무기로 손아귀를 베어서 피를 냈다.
주르륵.
“형제와 형제로! 하나가 되어 앞으로도 번영하리라!”
“형제와 형제로!”
그들의 피가 흘러 다시 뒤섞였다. 혁대에 묶어놓은 잔으로 그 피를 들어 서로 교환하여 마셨다. 모든 피를 마시자마자 소식이 들려왔다.
“주술왕이시여!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고블린들을 앞세우고! 하프 드워프들에게 식량과 나무의 숯을 보급하여 마수들과 몬스터를 토벌하라고 합니다!”
“찍찍! 경사에 경사라! 때가 겹치고 겹쳤으니,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이를 잘 해결하여 우리의 복으로 삼아야 한다. 서둘러 주술장들을 모으도록 하라!”
〈형제와 형제로 의식〉은 뒤풀이조차도 생략되었다.
드낙의 명령이 가장 우선적이었다.
‘성전, 성전이다!’
“전쟁! 우리의 힘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전쟁!”
짧은 털 리전의 지하 세계에 소문이 쫙 퍼졌다.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는데, 하프 드워프들에게 줄 보급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남부에 있는 붉은혀 리전과 북부에 있는 배불뚝 리전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주술장 한 마리가 의견을 냈다. 하지만 모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특히 매력적인 눈썹 주술왕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창조주의 명령을 받기가 힘든데, 이번 기회를 붉은혀와 배불뚝에게 주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많은 이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대장쥐는 안 된다.”
어디서든 전공을 크게 세우고 주인공처럼 활약하는 대장쥐는 많은 리전이 경쟁하고 싶지 않은 자였다. 특히나 배불뚝 리전은 전투 능력이 매우 높은 핏빛쥐들이었다.
“붉은혀 리전에게 도움을 청해라.”
고블린 주술장 또한 참석한 상황이었는데, 매력적인 눈썹 주술왕이 말하는 족족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답할 뿐이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절로 굽히는 고블린 주술장을 보며 핏빛쥐 주술장들이 흡족해했다. 주술왕 또한 그에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반면 크놀은 없었다. 짧은 털 리전에 속한 크놀들은 정치적으로 패배한 상황이었고, 주술사를 배출하지 못하는 종족이라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다.
*
드낙과 세리안은 각각 블러디 만티코어와 블랙 스케일 와이번을 타고 남부 왕국의 수도를 몇 바퀴 멤돌다가 이내 외성벽 밖에 내려앉았다.
폐허가 된 수도는 지금도 복구 중이었다. 하지만 아라온은 수도를 버리지는 않았다.
임시 수도를 마련하기보다는 무너진 수도에 그냥 들어가서 살고 있었다.
그만큼 상징적인 것이 필요했고, 재건을 통해서 왕권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부질없는 짓이지.’
이런 상황에서 토목공사라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식량을 확보하려고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오히려 식량을 소비하고 있는 꼴이었다.
멀리서 아라온이 호위를 데리고 허둥지둥 빠른 걸음으로 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구경꾼들 모두 드낙의 위세를 뼈저리게 느꼈다.
‘생쇼를 하네.’
당연히 아라온은 드낙을 위해서 그렇게 허둥지둥 오는 게 아니었다.
‘말도 안 타는 게 너무 고의적이야.’
드낙은 아라온의 모습에서 진짜 지독함을 느꼈다. 그 처절함은 정치가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의중을 아는 이들에게는 역겨울 뿐이었다. 하지만 하면 무조건 이득이었다.
드낙이 자신의 영향력을 인정해주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드낙을 높여서 자신의 위세를 높이려는 생각이 아라온의 행동에서 나오고 있었다.
드낙의 권세를 아라온이 이용하는 셈이었다.
그건 현 남부의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이기도 했다. 무력으로 찬탈 될 수 있는 걸 잘 막아주고 있었다.
“마신장을 잡으러 가신 분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 당연히 도움이 필요해서 온 것 아니겠나? 어떤가. 아라온 왕자, 날 도와줄 수 있겠나?”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미 불파겐 왕국과 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아닙니까?”
드낙의 말에 아라온이 거침없이 말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끝까지 불파겐을 따라야 했다. 감내하고, 또 감내해야 했다.
‘드낙 불파겐이 죽으면, 그때를 노린다.’
후계자 구도가 이미 어지러웠다. 킹슬레이에게 딸을 준 것부터 그 냄새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그 강한 냄새를 참을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곧바로 내성으로 자리를 옮긴 드낙과 아라온은 조금 이르지만 저녁 식사를 했다.
“남부는 좀 어떤가? 악마 군세 때문에 문제는 없고?”
“동부왕께서 싹 쓸어버리셨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덕분에 민간 쪽은 이미 안정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들어보니 상인들이 제법 고리대금을 하면서 등골을 빨아먹고 있다던데?”
“그 무슨 말씀을!”
“아니면 말고. 하하하.”
아라온이 불에 댄 것처럼 펄쩍 뛰자 드낙이 말을 냉큼 돌렸다. 반면 아라온은 얼굴이 조금 상기될 정도로 놀랐다. 〈쉐도우 위스퍼〉의 정보력은 실로 무시무시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도망칠 곳 하나 없고, 숨길 곳 하나 없다더니···그 소문이 진짜구나.’
세금 훔치려다 쉐도우 위스퍼의 쪽지를 받고 자수하는 이들 혹은 야반도주했다가 쉐도우 위스퍼에게 야지에서 처단 당하는 이들에 대한 소문은 진짜인 듯했다.
저녁 시간 내내 드낙은 아라온을 주물렀다.
핏빛쥐들로부터 받은 정보를 통해서 남부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마치 자세하게 아는 듯이 굴었다.
그 탓에 아라온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많은 체력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자금줄이 된 고리대금이 들켰을 때부터 이미 많이 꼬여버렸다.
“내가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먼 곳까지 다시 되돌아온 이유는 〈검은 보급로〉의 존재 때문이네.”
검은 돔은 당연히 공략 불가였다. 마신의 은총이 너무 깃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소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무리한 힘을 집중한다면 제국을 막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은 보급로···”
이에 대해 들은 아라온이 앓는 소리를 냈다. 시체로 쌓아올려진 검은 보급로의 존재는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 목표가 드워프 제국을 향하고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해. 용병들을 많이 고용하고 그들을 보급해야 하기 때문이지.”
“예? 하지만···”
갚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특히나 드낙은 현재 인간을 상대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위축된 아라온에게 드낙이 빙긋 웃었다.
“신용.”
“예?”
“내 신용으로 어음을 좀 쓰려고. 날 못 믿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드낙의 표정이 조금 변하자 아라온이 냉큼 소리쳤다.
“펜과 양피지를 가져와라! 가장 고급스러운 것으로!”
시종이 크게 답하며 서둘러 대전을 나갔다. 그 모습에 드낙이 아주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