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8 <-- 검은 보급로 -->
드낙은 검은 보급로를 3일 동안 주시했다.
“답답해서 미치겠다. 그냥 치고 빠지고 하면 된다니까?”
세리안은 그런 드낙의 조심성을 답답해했다. 드낙이 사냥꾼이라면, 세리안은 전사였다. 사냥꾼은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긴 시간을 투자하여 보답 받지만 전사는 달랐다.
전사는 찰나의 순간, 도끼가 상대의 목을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보답 받는다. 게임으로 치면 드낙은 상대에게 피해를 누적시키고 승리한다면, 세리안은 폭풍처럼 몰아치며 단번에 승패를 가르는 스타일이었다.
서로 방침이 다르니 자잘한 싸움이 오갔다. 거기에서 인내해야 하는 건 세리안이었다.
“됐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네.”
드낙이 그렇게 말하며 밤에 의견을 나누었다.
“검은 보급로를 파괴하려는 이유는 검은 돔에서 나와서 보급로를 지나며 마신장에게로 향하는 마수들의 추가 증원을 없애기 위함이야. 이해가 돼?”
세리안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낙이 하려는 일은 마신장이 이중전선을 만들게 하는 것과 같았다.
이에 대한 전술토의가 이어졌다.
“먼저 치고 빠지기는 할 수 없어. 검은 보급로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야.”
약 2년을 내버려둔 것만으로도 끔찍한 수준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만약 싸움을 건다면 야생 몬스터와 마수에게 쫓길 공산이 컸다. 그 숫자는 가히 만을 넘는다.
“광역 마법도 생각해봤는데, 규모를 생각했을 때 한세월이야.”
드낙이 어깨를 으쓱했다. 신성력이 있었다면 회복속도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의 마법역량이 0으로 수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일.
3일 내내 광역 마법을 퍼부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많은 숫자를 줄일 수 있고, 검은 보급로 일부분을 파괴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시 이어질 것이 뻔했다.
“길이 부족하면 마수들이 몬스터와 싸우면서 시체를 확보하고 쌓아두면 끝이야. 수복하기도 쉽지.”
해봤자 효과가 미미했다.
“마법 생물을 만들어서 중소규모의 전쟁을 펼치려고 생각해봤지만, 자원이 부족해.”
골램을 만든다고 해도 마력을 담는 황무지의 흙은 내구력이 형편없었다. 오래 유지하지 못하기에 많은 숫자의 골램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마력을 담을 핵을 지금 만든다고 해도 드낙과 세리안, 둘이서는 생산 한계가 존재했다.
“바위 등은 황무지를 지나서 있는 산맥까지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검은 보급로 파괴에 도움이 안 되고, 마신장과 부딪칠 가능성이 존재해.”
“어찌 되었든 안 된다는 거네.”
세리안이 대꾸했다. 서로 살을 섞으면서 자연스럽게 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놓고 있었다. 드낙은 이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살 때야 1살 차이만 나도 형대접 받으면서 동생들을 거칠게 다루며 놀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나이는 배려는 받을 수 있어도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반(半) 악마의 피도 여기서는 크게 효과를 못 봐. 업이 낮거든.”
초월체에 비하면 반쪽짜리 악마에 불과하며 그런 반마가 된 지도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가히 갓난아기나 다름없었다. 이는 악마 게페락스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약간의 신체변모(그릇의 증가)와 피에 담긴 힘의 증폭, 피를 통한 능력 하사 정도가 끝이었다.
악마 병졸을 만들 수 없었다. 또한 시체 자원을 쓸 수도 없었는데 죽고 시간이 지난 시체에는 사령마력이 깃들게 되기 때문에 평범한 마력은 상쇄현상이 일어나거나 반발력을 지녀서 효과가 반감된다.
검은 보급로의 시체는 제법 오래된 것도 있었기에 마법 재료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태워서 재로 만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일이었다.
‘핏빛쥐는 아껴야 하고.’
중립신, 제국, 엘프까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핏빛쥐는 최대한 계속 번영하도록 놔두는 게 좋았다. 일종의 보험이며 조커 카드였다. 지방 악마 군대를 청소할 때는 대승이 약속되어있었고, 규모에서도 핏빛쥐가 월등히 많이 동원할 수 있어서였다.
‘황무지에는 아직 핏빛쥐 리전의 힘이 약하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그 영토에 뿌리를 박은 〈짧은 털 리전(Short Fur Region)〉의 세력은 매우 좁았다. 수원이 적고, 먹을 것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핏빛쥐의 사회 특성상 척박한 곳에서 뿌리를 넓혀나가는 게 힘들었다.
그 덕에 영토 확장보다는 지하의 이점을 살려 수직 형태의 깊은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 세력이 미미한 게 아니라, 그저 활동 영역이 지하수를 따라 한정되어있었다.
황무지 근처에는 암염 지대가 발견되었다면 염장 음식을 통해서 재미를 봤겠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남부 군대는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상념에 잠긴 드낙이 바짝 마른 나뭇가지로 땅만 쑤시고 있자 세리안이 제안했다.
“만티코어와 모비딕으로 하늘에서 타격하는 건?”
“야생 몬스터도 공중 병력이 많아. 사실상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게 놈들이야.”
적이 오면 튀고, 없는대서 시체를 훔쳐먹는 게 가능했다. 가히 군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주목할만한 놈이라면 하피지.’
주변에 계곡이 없음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게 드낙의 눈길을 끌었다. 밤에 주로 활동하며 동이 트기 전에 서쪽으로 되돌아가는 걸 봤다.
또한 이 황무지의 하피들은 털이 날개에만 있고, 몸체에는 깃털이 거의 없었다. 대신 갑각류처럼 딱딱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새까만 색을 지니고 있어서 드낙은 이들을 〈블랙 아머 하피〉라고 불렀다.
“낮에는 가능하다는 거네.”
“짐승이랑 달리 몬스터는 싱싱한 생명체를 뜯어먹는 걸 좋아해. 내려올 때까지 끝까지 따라올걸.”
“결국 결론은 포기하고 산맥으로 가는건가. 드워프를 도우러.”
세파리아스가 드낙에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드낙은 과감하게 세리안에게 모든 것을 오픈한 상태였다. 그녀의 무력을 더욱 확실하게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 정도로 적혈대검을 쥐고 수많은 아티팩트를 가진 세리안의 무력은 인간 이상이었다.
‘세파리아스라는 인질도 있고.’
그가 부활할 때까지 완벽한 우군이 세리안 불파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검은 돔과 검은 보급로를 그냥 놔두게 되잖아.”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이지. 애초에 두 명이서 어찌할 수 없다며? 빨리 포기하고 산맥으로 가서 드워프들과 합류하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어.”
세리안의 말에도 드낙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마신장의 뒤통수를 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큰 타격이 아닐 수도 있었는데, 황무지 너머의 산맥에도 마수들이 살아가고 있어서였다.
‘그곳에 사는 오우거들까지 통합시킨다면···’
마신(魔神)의 행보를 봤을 때, 아니라고는 못 한다. 야생 오우거를 마신장으로 삼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간단한 트롤 토벌조차도 악마의 힘이 가미되었을 때, 트롤을 출산하는 기능밖에 못 하는 자궁이 된 일도 있었다.
‘예측불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움직여야 한다.’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일단 마신장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했다. 그렇기에 드낙은 적어도 〈검은 보급로〉만큼은 파괴해야 했다.
“검은 보급로 말고 다른 주변을 둘러봐야겠어. 쓸만한 게 나올지도 몰라.”
사냥꾼의 감이 꿈틀거렸다. 세리안은 일단 드낙이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 이후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만큼 그의 고집이 상당했고, 직감을 맹신하고 있어서였다.
“조용하게 가라앉은 호수 속에서 거칠게 움직이는 포식자를 보여라.”
드낙이 주문을 읊었다. 마력 소모 효율을 위해서 연금술로 만든 물약을 땅에 떨어뜨렸다. 정찰 마법을 통해서 주변을 확인했지만 드낙이 쓸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엄청나게 많은 몬스터와 마수들만 보일 뿐이었다.
‘발품을 팔아야겠어.’
황무지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건 지하수였다. 드낙은 거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찾아봐도 없으면 결국 산맥으로 향해서 드워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인간은 동족전쟁과 오크, 악마와 전투를 하느라 당분간 전쟁 능력을 상실해있어서였다.
“넌 어떡할래?”
“같이 가야지.”
덩치가 큰 블러디 만티코어와 블랙 스케일 와이번은 황무지의 저편에서 함께 행동하게 하고, 큰불을 내면 오도록 만들었다. 마법 아이템으로 수신호를 주고받기에는 마력을 담을 그릇이 부족했다.
“근데 어디로 향하게?”
그 말에 드낙이 빙긋 웃었다.
“끼에에엑!”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블랙 아머 하피들이 떼 지어서 몰려다니며 밤하늘을 지배했다. 검은 보급로를 통해서 가장 이득을 본 종족이 바로 하피였다. 덩치 큰 놈들이 덤비면 도망가면서 시체만 뜯어먹으며 세를 불릴 수 있었다.
달빛에 반짝 빛나는 얼음창이 떼를 지은 하피들을 관통했다. 멀쩡히 보였기 때문에 하피들이 쩍 갈라졌다. 회피기동을 하는 하피를 보고 안에 있는 하피 또한 그대로 움직였지만 판단에 따른 속도 차이로 세 마리가 3m가 넘는 얼음창에 관통당해 날갯짓하며 추락했고, 1마리는 두개골이 쪼개졌고, 나머지 2마리는 충격으로 뼈가 부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흙을 전신에 바른 드낙이 시체를 질질 끌며 움직였다. 곳곳에 몬스터와 마수들이 끼리끼리 뭉쳐서 시체를 뜯거나 서로 싸우고 죽이고 있었다.
그 숫자는 수천이 넘었고, 길고 큰 언덕처럼 비대한 검은 보급로 곳곳에서 보였다.
동이 틀 때까지 끈기있게 시체를 끌어온 드낙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로 내려왔고, 대기하고 있던 세리안이 손을 흔들었다. 진흙을 전신에 바르는 걸 싫어해서 대기하기로 했다.
타고난 무재를 지녔기에 몇몇 곳에서 여성다운 면모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들은 억지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강함이었다.
반대로 드낙은 약자부터 시작했기에 약자의 싸움법이 몸에 배어있었다. 중립신에게서 세뇌를 당한 여파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보여?”
햇빛 아래에서 하피 시체를 가리키며 드낙이 말했지만 세리안은 어깨만 으쓱했다. 자신의 분야 밖이었다.
“힌트는 광택이야.”
“아. 뭐가 묻어있네. 몸통에 있는 갑각피부 외에도 날개 쪽에도 있네.”
세리안의 말에 드낙이 살짝 놀랐다. 광택을 지닌 몸통의 갑각피부에서는 잘 볼 수 있었지만, 날개는 별개였기 때문인데 그걸 파악한 세리안의 재능이 실로 무서워서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알았다.
세리안이 거침없이 깃털을 매만졌다. 검은 가루가 묻어나왔다. 냄새를 맡았지만 뭔지 몰랐다. 반면 드낙은 맛까지 보고 있었다.
“잿가루야. 보통 잿가루도 아니고, 숲에 불을 질렀을 때 볼 수 있는 재야.”
“어떻게 그걸 알아?”
“가을이 되면 숲에 자주 불이 났었거든. 내가 살던 곳에는 산불이 많았어. 그 덕에 몬스터나 위험한 야수는 적었지만.”
드낙이 재를 만졌다. 평범한 재와는 확실하게 손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달랐다. 이것은 〈식물만 태운 잿가루〉였다.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하피가 사는 지하 계곡으로 정해졌다. 그곳에 지성종족이 있었고, 토착 세력을 통해서 검은 보급로를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드낙이 힘을 보태줄 수 있다면 능히 가능했다.
동시에 토착 세력 또한 드낙에게 수천의 인력을 제공해줘야 했다. 거기서 나오는 시너지는 강력한 영향력을 이 황무지에 행사할 것이다.
드낙과 세리안은 7일을 걸어야 했다. 〈검은 보급로〉가 있는 황무지는 공중 몬스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와이번과 만티코어를 외곽에서밖에 쓸 수 없었다. 쓴다면 보름 밤낮으로 싸우고도 남을 정도로 공중 몬스터와 공중 마수가 기묘한 균형을 이룬 채 유지되고 있었다.
“도착했다.”
드낙이 기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리안도 바짝 기어갔다.
“엄청난 규모네.”
〈황무지 지하 계곡〉의 규모는 드낙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길이로만 따져도 10km는 되어 보였고 곳곳에 넓은 지하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식물도 많이 자라있었다. 동시에 햇빛에 의해서 달구어진 습기가 위로 올라왔는데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축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밑으로 내려가자.”
드낙이 플라이 마법을 영창하며 세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허리가 그대로 감겼고, 두 사람은 추락하듯이 떨어져 내렸다.
‘하피들을 피해서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면서 지성 종족의 흔적을 딱 한 번만 찾아내면 된다.’
드낙이 눈을 빛내며 그늘진 곳으로 빨려들어가듯이 스며들어갔고, 세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삼켰다.
‘괴기한···’
뛰어난 전사의 감각으로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지에 있을 때부터 보고 있었기에 볼 수 있었을 뿐. 만약 한 번이라도 놓친다면 다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은신이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