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6 <-- 에필로그 -->
드낙의 사농공상, 4가지에 대한 재분배는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사업을 빼앗기는 이들도 있었고, 엉뚱한 자가 갑자기 득세하기도 했다. 모두 〈쉐도우 위스퍼〉를 통한 정보로 이루어졌다.
어떤 사업에서도 구도는 비슷했다. 반드시 라이벌이 있었다. 밥 한 그릇을 놓고 2명 이상이 싸우는 꼴이었다.
그렇게 만들고 난 다음에 드낙은 중요 인사들을 한 명씩 불렀다.
“봄이 지나가기 전에 왕이 될 것이다.”
칭왕(稱王)을 논(論)했다.
“···!”
드낙은 가장 먼저 게제라스 법관에게 이를 말했다. 그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떻게 보나.”
“시기적으로 생각한다면 너무 빠릅니다. 3년을 두고 진행해야 합니다. 아직 시민들은 자기 주변을 진정시키기에도 힘이 듭니다. 격동의 시대입니다.”
“기회의 시대이기도 하지.”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게제라스 법관의 꼿꼿함에 드낙은 기분이 조금 상했다. 하지만 꾹 참았다. 핏빛쥐로 들어오는 정보를 통해서 그만한 자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3년은 못 기다려. 나는 서쪽으로 가야 한다.”
“마신장 때문입니까?”
드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통 오우거보다 2배는 큰 놈이다. 지금 죽이지 못한다면 이 세계가 큰 위기에 빠질 것이다. 엘프는 살아도 인간은 멸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악마 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나.”
그 말에 게제라스는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왕가를 내놓고, 최대한 아이를 낳아 후계자 구도를 형성시킨 다음에 떠나야 했다. 이를 생각하면 봄에 즉위식을 해야 했다.
“마신장을 토벌하러 떠나신다면 트롤 토벌 때처럼 제법 오래 걸릴 테지요.”
“그래.”
신성력이 없는 드낙이었다. 중립신의 백업은 더는 없다. 그저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가 되었다. 그건 매우 컸다. 영웅조차도 힘줄이 잘리면 애새끼에게 목이 잘릴 수 있다. 그런 세상이다.
“북부에게 다시 손을 내미십시오. 이미 부인들과 화해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시지요?”
“혹독한 겨울을 보냈으니, 그들도 정신을 차렸겠지.”
“왕이 된다면 북부에게 세금을 받으며 충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북부 또한 드낙 님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돈인게지. 나도 안다.”
“그들이 동부 내력 세력과 대립을 할 것입니다. 드낙 님께서 도와주는 만큼 동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괘씸한 놈들이지만, 그대 말대로 하겠다. 그들에게 뭘 주면 되겠나?”
“변경백의 영지가 주인 없는 땅 아닙니까. 외척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그건 너무 큰 거 아닌가?”
“강제로 분할된 땅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남부 인사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남부에 가까운 곳에는 북부인을 둬야합니다.”
“또 북부와 변경백의 땅은 거리가 매우 멉니다. 반역을 하더라도 서로 떨어진 두 곳입니다. 각개격파를 하기도 좋습니다. 모인 힘에 비해서 형편없는 형세입니다.”
드낙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이면 제법 힘이 되겠지만, 흩어져 있었기에 정치적인 힘만 키우게 하고, 군사적 역량은 되려 낮추는 그림이었다. 드낙이 없는 동안 그들이 외부세력으로 동부를 유지해줄 것이다.
“다른 건 없나?”
“미리 중요 인사들을 하나씩 불러서 언급을 하십시오.”
“그건 당연한 말이고.”
“염려스러워서···”
드낙이 그 말에 제법 크게 웃었다. 그의 씀씀이 속에서 정이 느껴져서였다.
그 외에 자잘한 것들에 대해서도 게제라스 법관은 드낙의 입장에서 생각했고, 말해주었다. 이를 통해서 드낙은 중요 인사들을 하나씩 불러서 칭왕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 뒤 드낙은 중요 인사들을 한곳에 모았다.
‘북부와의 관계도 나 스스로 좋게 만들었고, 그 덕에 몇 개의 사업을 외척들에게 내어줬다.’
단순히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함이다. 큰 세력이든 작은 세력이든 인정받는 건 매우 중요했다.
‘남부의 인사들인 길게이와 두갈드를 중용했기에 남부 또한 반대할 수 없다. 그들에게 퇴로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민족이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남부인은 남부인을 챙기고, 북부인은 북부인을 챙긴다.
‘2왕자를 내 손으로 죽였지만, 아라온은 이득을 본 상황이다.’
그의 모든 정통성은 추락했지만 살았다는 게 중요했다. 남은 찌꺼기로도 능히 남부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제대로 피의 숙청을 했기 때문에 죽인 관리들의 재산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터였다.
모든 이들이 원탁 회의소에 모이자 드낙이 상석에 앉아서 말했다. 이미 한 명, 한 명 불러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표정들은 평범했다. 다만, 그 외의 수백이 넘는 보좌관들은 긴장한 티가 제법 났다.
이들이 소문을 내줘야 했다.
“지금의 남부 왕국은 북으로는 오크 대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태고, 남으로는 악마 때문에 수도가 폐허가 되었으니,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와해가 된 상태다. 이를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지당하십니다.”
너도나도 드낙의 말에 동의했다. 물론 평범하게 대답만 해서는 안 되었다.
“백금 왕가가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악마가 궐기했음에도 군대를 돌리지 않았고, 사사로운 이권을 탐하려고 대치를 했습니다. 그런 자들이 어찌 왕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실레아가 백금 왕가가 더 이상 가치 없음을 말했다. 이는 그들에게서 받은 작위가 쓸모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작위를 내릴 새로운 왕가가 탄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부의 명문가들을 지원하여 오크에게 빼앗긴 평야를 되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남부는 악마에게 큰 피해를 입어서 그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들 뿐입니다. 모두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베바란스 총관의 말에 드낙이 실로 흡족해했다.
‘말 한 번 참 잘하네.’
북부에게 지원을 한다는 것은 그들을 아래로 둔다는 것과 같았다. 곧, 북부가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겉으로 보면 돈과 식량을 북부에게 내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왕이 되어 북부를 품으라는 뜻이었다.
동시에 오크 토벌이라는 대의를 끼워 넣어 실로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북부에 대한 침공이며 지배였지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말은 그런 것이다. 남의 머리통을 쪼개도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얼마든지 포장할 수 있었다.
그 외의 수많은 이유들이 거론됐다. 그 모든 것이 명분이 되었다.
“즉위식은 못해도 여름이 오기 전에 열겠다.”
“예. 뜻대로 하시옵소서.”
불파겐 왕가에 대한 즉위식은 늦봄에 계획되었다. 뒷짐을 지고 이를 지켜보는 세리안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이토록 쉽게 불파겐이 왕가가 되다니,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귀족들에게 이권을 나눠주고, 곳곳에서 배를 부르게 해준 드낙이었다. 다시 빼앗겨도 남는 게 있었기에 그 누구도 드낙의 말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다음 날, 세리안과의 새벽 수련을 끝내고 땀에 절은 세리안이 민감한 문제를 드낙에게 꺼냈다.
“왕가가 되면 적통이 있어야 하잖아.”
“왜? 나랑 결혼이라도 하려고?”
드낙의 가벼운 말에 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엘프와의 약조는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엘프는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았다. 그 거대한 세력이 더는 무섭지 않아서였다.
반면 드낙은 그런 말을 들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세리안은 예쁘지만 그 강함 때문에 매력이 떨어지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특히나 두들겨 맞았던 게 드낙이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적통이 없기 때문이야. 엘라한 가문처럼 피는 중요하게 여겨야 해.”
드낙은 볼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착 가라앉은 붉은 적발을 뒤로 넘기며 세리안이 말했다.
“왜 싫은 기색이지? 불파겐의 적통은 계속 유지되어야 해. 가문을 위해서라도. 방계인 너도 불완전한 계승을 받아서 가장 통감하고 있는 부분일 텐데.”
그 말에 드낙은 뜨끔했다. 하지만 주저했다. 레이시아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리안이 아이를 갖는다면 후계자 구도가 진짜 불구덩이처럼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였다.
“엇.”
세리안이 드낙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 갈등하는 남자를 가만히 두면 결국 이성적으로 선택한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단번에 연병장에 쓰러졌다. 기술의 묘리를 이용해서 드낙은 실로 허무하게 넘어졌다.
땀 냄새가 드낙의 코로 들어왔다. 하지만 동시에 세리안의 미모가 눈에 확 들어왔다. 드낙은 충동에 몸을 맡겼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들이 많았기에 더욱 지금의 쾌락이 중요했다. 새하얀 목덜미 아래로 드낙의 손이 훑으며 지나갔다.
서로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
즉위식은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인파가 모였고, 큰 행사가 보름 동안 이어졌다. 그 속에는 아라온 1왕자 또한 참석했다. 아직 남부의 혼란 때문에 즉위식을 올리지 못한 그였다.
행복한 나날들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속에서도 드낙은 중립신의 대계를 조금이라도 엿보기 위해서 아주 태평하게 지냈다.
즉위식 이후 보름이 지났다.
성욕이 들끓는 발정 난 개처럼 하루하루를 지내던 드낙에게 기어코 중립신이 검은 꿈에서 드낙을 닦달했다.
“언제 마신장을 잡으러 갈 것인가?”
“명색이 드워프인데, 몇 년은 더 버티지 않겠어?”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그 말에 드낙이 생각보다 제국이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뉘앙스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마신장을 빨리 처리해야 할 정도로 제국이 큰 문제로 떠오를 것으로 보였다.
“너무 역경이 많은 것 같은데. 레이시아가 애를 낳을 때까지만 있으면 안 될까?”
“하아.”
중립신이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절로 감정을 보였다. 그만큼 드낙의 행보는 중립신이 보기에 너무 천박했다. 반인반마(半人半魔)의 반(半) 초월체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없던 감정도 보일 정도였다.
“경박한 놈. 중립신의 대계가 이루어져야 너 또한 좋은 것을 왜 모르느냐?”
세파리아스가 중립신의 편을 들었다. 그 정도로 태평하게 지내고 있는 게 드낙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대규모 정원을 만들 정도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세팔아. 때를 놓치면 안 되겠지. 근데 내가 기계냐? 어떻게 1년도 못 쉬냐? 악마의 피를 먹어도 이놈의 인생은 채찍질밖에 없어.”
푸념에도 세파리아스는 냉정했다.
“오케이. 가라면 가야지.”
드낙이 결국 항복했다. 중립신이 감정을 보일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기 때문이다. 세파리아스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세팔이는 언제 부활함? 아직도 힘이 부족한가?”
“말해줄 수 없다.”
중립신이 딱 잘라 말했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을 노려보았다.
“내가 네 일을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예. 예.”
드낙이 두 번 대답하며 그의 신경을 긁었다. 그가 손뼉을 짝 치며 나태한 마음을 다시 고쳐잡았다.
며칠 뒤 드낙은 핏빛쥐의 위원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마주했다. 대산의 지하에 있는 거대 동공에서 만남을 가졌다.
“받아마셔라. 나의 피는 곧 너희를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믿습니다!”
11명의 위원들은 드낙의 피를 모두 받아마셨다. 악마의 힘으로 증폭된 피의 능력이 그들을 모두 강화시켰고, 목줄을 채웠다.
“아아아!”
강해지는 감각에 핏빛쥐의 위원들이 소리를 질러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드낙 또한 기분 좋게 웃었다.
호수 성채에서 수많은 작별인사를 하고, 반협박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북부의 외척들에게 자연스럽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자.”
드낙이 모비딕을 탄 채, 세리안의 손을 잡아서 당겼다. 그녀의 무력을 생각하면 같이 가는 게 옳았다. 또한 세파리아스의 영혼이 드낙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세리안은 드낙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호수 마을에서 떠난 드낙은 고블린 지하 도시를 방문했다. 그곳에 사지가 잘린 채 고정된 만티코어가 아직도 살아있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세리안이 석탄을 통해서 크게 번영한 고블린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고, 이내 만티코어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드낙은 흑마법을 사용하는 대신에 자신의 피를 만티코어에게 먹였다.
악마 게페락스의 피가 뒤섞인 드낙의 피가 만티코어의 혀를 타고 흘러내렸다. 만티코어는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트롤의 재생력과 악마 특유의 신체능력이 담긴 피는 만티코어를 빠르게 재생시켰다. 동시에 만티코어의 전갈 꼬리의 표피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게 변해갔다.
털 또한 적색으로 변해갔다. 마신장의 능력을 만티코어가 얻고 있었다. 모두 악마의 피가 증폭시킨 신체능력과 관련된 업의 힘이었다.
그 초월적인 광경을 세리안은 모두 지켜보았다.
“가자.”
드낙이 가죽을 만티코어의 목 뒤에 놓고, 안장을 걸쳐 고정시키고 그대로 올라타며 말했다.
“크아아아!”
만티코어가 크게 포효하며 지하통로를 내달렸다.
드낙과 세리안은 세계의 서부로 향했다. 블랙 스케일 와이번과 블러디 만티코어를 통해서 날아갔다. 메마른 황무지와 높이 솟은 산들이 많은 곳이었고, 매우 척박한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