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5 <-- 에필로그 -->
〈동부 중앙, 둥근 산(Round mountain)〉
“헉! 허억!”
건축가 엘리후(Elihu)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상체를 숙이며 무릎을 짚었는데 뱃살이 접혀서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드낙이 그를 보며 말했다.
“산길이라, 길부터 닦아야겠어. 안 그런가?”
“예! 헉헉!”
엘리후는 호수 마을을 3차 확장하며 수많은 것들을 설계한 자 중의 한 명이었는데,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곡선과 외관에 특히나 신경 쓰는 건축가였다. 자연스럽게 드낙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정말로 여기에 탑을 쌓을 생각이십니까? 엄청난 세금이 들 텐데요.”
오면서 드낙은 탈권위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엘리후가 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를 개의치 않게 여겼다.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게 중요한 법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없는 게 중요해. 예를 들면 산에 지어진 전망대라던가. 안 그런가? 누구나 오고 싶어 하겠지. 그리고 그건 자네에게도 엄청난 이득이 될 거야.”
“아! 예, 그렇습니다.”
엘라후가 크게 좋아했다. 건축물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탐욕이 일어났다. 큰돈으로 지어지는 전망대였다. 그건 자신의 돈이 아니었다.
“꼭 하고 싶습니다. 이 길마저 예술적으로 탄생시켜야 합니다.”
“열심히 해보라고.”
전망대를 닦을 터는 산 정상을 깎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둥근 산을 선택한 이유도 깎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였다. 물론 엘라후의 의견이었다. 드낙은 무식하게 큰 산만 고집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불파겐 전망대를 집도했다면 건설하는데 30년은 족히 걸렸을 터였다.
〈불파겐 전망대〉의 터를 확인하고, 엘라후가 말하는 상상도를 들은 드낙이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까지 가미될 예정이라 남부 왕국 최대의 탑이 될 터였다. 수많은 이들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곳에 오고 싶어 할 것이다.
‘그건 자연스럽게 돈을 부르겠지.’
모든 것이 소비다. 드낙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산 위에 미리 올라가 있던 모비딕에 올라탄 드낙이 엘라후를 태운 채 다시 호수 마을로 향했다. 해야 할 일이 태산만큼 쌓여있었다.
그런데도 이곳까지 내려온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하고 싶어서였다. 그 외에는 그저 자잘한 이유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드낙을 막지 못했다.
“오셨습니까.”
이번에 새롭게 교육을 받고 배출된 시종이 드낙에게 고개를 숙였다. 드낙은 거침없이 말했다.
“내가 알아둬야 할 일이 있나?”
“예. 이실레아 사령관과 보기사들이 어제 저녁에 회포를 풀었습니다. 그중에 상인 연합 쪽이 함께한 듯합니다. 상인 연합은 안 끼는 곳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장물을 얻어보겠다고 아주 고생이네.’
그 외에도 움직임의 대략적인 사정들이 시종의 입에서 나왔다. 드낙은 이를 핏빛쥐를 통해서 교차 검증을 할 것이다.
‘벌써 상인 연합을 다리로 쓰고 있네.’
담합하는 모습이 절로 보였다. 결국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 싸우지 않는 게 중요했다. 다른 놈들이 케이크를 먹는 걸 막기만 해도 재물을 쌓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낙에게 보였다. 드낙은 이를 가만히 두고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과 대적하려는 자가 오랫동안 유지된다면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지금은 가히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게 드낙이고, 그 누구도 드낙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지만 초장부터 제대로 해야 나중이 편했다.
드낙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옛날 말을 가져왔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이 있지.’
으레 정치 좀 한다는 사람치고 사농공상을 말하지 않는 자가 적다. 드낙은 이걸 대하드라마에서 들은 적이 제법 있었다. 보통은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는 말이고, 벌이 또한 다르다는 말이었지만, 드낙은 그답게 다르게 해석했다.
‘중요한 건 딱 4개! 그것만 내가 제어하면 된다.’
다른 걸 건드리기에는 귀찮다는 소리였다. 실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은근히 날카롭기도 했다. 여기에 군병만 추가하면 되었다.
드낙이 생각하는 사농공상의 사(士)는 중요한 요직이다. 사령관과 관리들의 대장을 뜻한다. 이는 그가 원하는 대로 임명했으니, 더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선을 넘으면 갈아치우면 그만이었다.
그 외의 인사는 그가 관여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오늘 원탁회의를 열기로 했는데.”
“예. 점심 후로 잡혔습니다.”
“식사하고 바로 가면 되겠어.”
“모시겠습니다.”
드낙은 고기를 뜯어먹으며, 레이시아와 식사를 했다.
“요즘 신전과 사업을 하나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힘든 점은 없어요?”
드낙의 말에 레이시아가 고개를 귀엽게 움직였다.
“없어요. 신전의 사람들은 다 좋은 분들이라서요.”
“그래도 문제가 없을 수 없는데요. 저한테 숨기는 건 아니겠죠?”
“전혀요. 애초에 사업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냥 사람들을 돕는 일인데요···”
드낙이 빙긋 웃었다. 신전과 레이시아는 서로 협업을 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상당한 가치를 지닌 사업이었다. 돈맛을 안 신전은 더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서 막대한 신성력 자원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 돈은 식량이 되고, 집이 되었다.
동부는 부랑자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광부들의 인건비가 3배로 폭등할 정도로 살기 좋아지고 있었다. 하루만 지나도 이슈가 떨어질 줄을 모르는 기회의 땅이었다.
“언덕을 이룰 정도로 구리 매장량이 엄청난 구리 광산에서 구리를 얼마나 많이 쓰고 있는데 사업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런가요. 제가 원했던 건 조금 작은 것이었는데, 일이 갑자기 커졌어요.”
구리봉에 신성력을 부여하여 정화의 힘을 담았다. 물도 부족한 동부는 썩거나 고인 물도 써야 했고, 빗물을 받은 저수지의 물도 심심찮게 식수로 사용할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질병이 많았고, 사제들은 이를 예방하고자 했다.
의사가 돈을 벌려면 환자가 많아야 하지만, 동부의 신전은 약의 개발보다는 예방에 막대한 돈을 쓰고 싶어 했다. 성기사 케이슨부터 시작해서 동부에 새로운 신전을 원하며 떠났던 이들이 고위층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깨끗하지.’
그런데도 드낙은 의심을 접고 있지 않았다. 신전은 민심을 얻기 좋았기에 중요 경계 대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이 주는 이득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덩치가 커지는 것을 막고 있지는 않았다.
폭발적인 성장이 지금 동부에 필요했다. 동시에 귀족과 대척되는 세력은 강해져야만 했다. 드낙이 강했기에 설계할 수 있었다.
〈신전 정화봉〉은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법 돈이 있는 이들은 구리봉을 조각해서 신성력을 하사받고, 돈이 없는 이들은 돌부터 시작해서 나무까지 가져와서 정화를 받았다.
돈 많은 자에게는 필수품이나 다름없었고, 돈 없는 자들도 이제는 구리봉을 선호하고 있었다. 남들 다 하니까, 자기도 하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성력의 상품화가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불파겐 마탑이 배출하는 수준 낮은 마법사들의 숫자 증가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마을에 마법사 하나는 있었고, 허접한 연금술을 가졌음에도 마력이 있어서 질병이 줄어들었고, 사제들은 신성력을 잘 안 쓰게 되어 다양한 곳에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연계되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신성 정화봉은 유사시에는 의료품으로 될 수 있어서 무조건 사두는 게 이득이었다. 신성력이 사그라지면 밤에 어두운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에 다시 채우러 오는 자들도 신전에 북적거렸다.
레이시아가 제안했던 사업은 신전의 수익 중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사제들이 더는 지방 마을에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 신성력을 물건에 부여하면 되기 때문이다.
마법과는 다르게 그냥 상처를 쿡 누르기만 해도 신성력이 치료를 해서 바보천치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폐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한 부부가 정화봉을 좀 그렇게 쓰다가 실려 오고, 죽기도 했다.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덕에 주의사항을 말해주는 게 의무화되었다.
“임신도 했는데, 너무 돌아다니시지는 마세요.”
“예. 조심할게요.”
드낙의 아이를 품은 레이시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가 말했기에 그녀는 오늘부터라도 모든 예정을 끊고 자중하며 지낼 것이다. 아이를 안전하게 출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드낙의 말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부드러운 레이시아의 분위기를 즐기며 드낙이 품에서 함을 하나 꺼내서 건네주었다.
“열어보세요.”
“감사해요.”
레이시아가 함을 열었다. 투박한 함이었는데, 급하게 만든 모습이 절로 보였다. 열었을 때 강한 철 냄새가 났다.
“이게 뭐죠?”
“아아, 그건 안경이라는 거예요. 눈을 좋게 만들어주죠. 이렇게···”
드낙이 일어나서 레이시아에게 안경을 씌워줬다. 안경의 양쪽 테 끝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는데, 목걸이처럼 목에 걸어둘 수 있었다. 마력을 더 많이 부여하기 위해서, 주문을 더 길게 새겨넣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눈을 떠보세요.”
장님이지만 양쪽 눈이 그대로 있는 게 레이시아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있는 동공이 큰 자극을 받은 것처럼 흔들렸다.
“이게 대체.”
“시야가 좀 좁죠? 어렸을 때 본 거랑은 좀 다르죠?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까지 밖에 안 되더라고요.”
보통 사람이 볼 수 있는 시야의 절반밖에 되지 못했다. 레이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마워요.”
“어때요? 색깔이 보여요?”
“아니요. 흑백으로 보여요. 그래도 멋져요.”
드낙이 머리를 긁적였다. 수많은 마법사들의 지식을 총집합해서 만들었지만, 색깔을 만드는 건 실패한 듯했다.
“제가 어떻게 볼 수 있는 거죠? 전 마력이 안 통하는데. 고통을 느끼거든요.”
“안경은 상당한 마력이 들어가 있고, 마법 또한 강력한 마법이죠. 조금 크기가 큰 것도 이 때문이고, 부착된 목걸이의 뒤쪽에 큰 보석이 박힌 것도 그 때문이죠. 중요한 건 레이시아의 몸에 들어가는 마력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거였어요.”
“아···”
“이 아티팩트를 오래 사용하면 아마 피로감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낄 수도 있어요. 그때는 사용을 중단하세요.”
“알겠어요.”
그녀가 안경을 쓴 채로 드낙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울먹거렸다. 그녀와의 점심시간은 제법 길어졌다.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 임신했기 때문에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 덕에 원탁회의소에 모인 이들은 1시간이나 더 드낙을 기다려야 했다.
“미안하다. 내가 좀 많이 늦었다.”
“괜찮습니다.”
모든 이들이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계단 위에 있는 상석에 앉은 드낙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농업이다.’
사농공상을 통해서 드낙은 4개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로 했다. 그중에서 농업이 오늘 고개를 불쑥 튀어나오게 할 생각이었다.
‘농업도 새로 떨어뜨려 놓아야 하지.’
장원 기사들이 영토를 소지해도 농민들을 관리하는 단체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농민에 대한 권리 다툼이 일어날 것이고 균형이 잡힐 터였다.
“오늘은 농협이라는 조직을 만들까 해서 불렀다. 아무래도 식량을 논하는 단체가 될 것이라, 모두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농협···말씀입니까?”
“그래. 조직원은 동부에서 농사를 짓는 모든 농부가 속해야 하고. 그 관리는 중앙의 관리들이 맡겠지만, 이 또한 새로 뽑을 생각이다. 외청과 내청도 아니고, 법정도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단체였다. 동시에 이미 이를 관리하던 관리들에게는 자신들의 힘이 빼앗기는 것이기도 했다. 밥그릇이 자꾸 다른 자들로 향하고 있었다.
“농협장은 다섯 명이고, 별문제 없으면 3년마다 서로 지방을 바꾸며 활동하게 할 생각이다. 식량을 관리하기 때문에 힘이 워낙 세질 것 같아서 말이지. 어떤가?”
“정말 현명한 생각입니다.”
이실레아가 단번에 치고 들어갔다. 누구보다도 먼저 견적을 끝낸 모습이었다. 관리들의 일이 분리되는 것이기에 귀족이며 기사인 그녀는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어물쩍거렸다. 게제라스 법관의 경우에는 침묵했다. 그는 제도를 통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자였기에 이런 이권다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베바란스 총관은 이실레아가 선수를 치자 허둥지둥거렸다. 하지만 딱 생각나는 건 없었다. 무슨 이유로 반대한단 말인가.
드낙은 농협에 대해서 말하며 농협장을 베바란스 총관과 겐 쟝이 정하도록 명령했다. 겐 쟝이 2석. 베바란스 총관이 3석을 배정받았다.
이실레아는 자신이 속하지 않았음에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 뒤로 드낙은 공업과 상업에도 견제 기구를 새롭게 만들었다. 하나의 이권을 최소 2개의 조직이 충돌하게 했다. 이는 실로 흉악했다. 이실레아는 더는 뇌물을 받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중요한 곳에 있어서는 드낙이 모든 것을 결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새로 바꾸기도 했고, 엉뚱한 곳에서 조직이 새롭게 탄생하기도 했다. 그 속에서 이실레아가 건진 것은 오직 중부 사령관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그 이상은 드낙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밤 이실레아는 부관을 옆에 두고 홀로 술을 마셨다.
“가주님. 이대로 가만히 계실 겁니까? 불파겐 영주님께서 이대로 끝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상인 연합도 이권 때문에 3개로 쪼개져 버렸습니다. 반면 영주님의 힘은 매일 같이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신전 또한 레이시아 공주가 휘어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부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허나 이실레아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너는 자유기사로 살아본 적이 없지? 자유기사로 살며 가장 중요한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예?”
부관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이실레아가 자문자답을 하듯이 말했다.
“그건 바로 때다. 때가 맞아야 실력을 펼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난 때를 잘 만나서 중앙 사령관이 되었고, 지금은 내가 이득을 볼 수 있는 때가 아니야.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운이 따라줘야한다. 지금은 진득하게 조용히 지내기만 하면 돼.”
나락으로 떨어진다고해도 처형되는 것보다는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