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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633화 (632/1,239)

0633 <-- 에필로그 -->

“원하는 것이 있겠지?”

드낙의 말에 아라온이 고개를 제법 깊이 숙이며 말했다.

“자치권을 보장해주십시오. 드낙 님에게서 하사를 받고 싶습니다.”

“그 대가는?”

드낙의 물음에 아라온이 즉답했다. 이미 생각을 해둔 것처럼 보였다.

“조공을 바치겠습니다.”

“조공이라···”

드낙이 고민했다.

“왕국을 버리고, 공국이 되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저 인정만 해주십시오.”

오늘 있었던 일은 남부 왕국으로 뻗어 나갈 것이다. 악마에게서 도망친 일왕자 그런 일왕자를 드낙에게 던져준 이왕자. 그 더러운 일은 일왕자의 정통성을 더럽힐 것이다. 자연히 남부에 반란이 일어날 공산이 컸다.

드낙의 인정은 그런 반란을 주춤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만큼 동남 전쟁의 결과와 악마 토벌의 전공은 대단했다. 누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북부에서 있었던 일은 북부인들이나 쳐주지, 남부인은 깎아내리는 법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염려도 없었다.

이제 드낙은 명실상부 남부왕국 최강이었다.

“조공의 수준은?”

“매년 황금 10관과 밀 1만 포대를 바치겠습니다.”

1포대에 20kg. 1만 포대면 20만kg이었다.

“그럴 역량이 아직도 남부에 남아있나?”

“평야가 많은 남부입니다. 가능합니다.”

아라온의 즉답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온의 제안은 실로 달콤했다. 동부에는 금광이 없었기에 금화의 값어치를 조공을 통해서 급등하는 걸 막을 수 있었고, 식량 또한 동부에게 가장 필요했다.

인구의 증가율, 이주민들의 숫자는 항상 변수를 창조했기에 많은 식량 확보가 매우 중요했다. 아차 하는 순간 수만 명이 굶어 죽을 수 있었다.

‘국가적으로 나서야 할 정도지.’

동부의 척박한 석지(石地)를 끊임없이 개간하고 있는 이유도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굶는 자는 없지만, 언제든지 문제가 터질 수 있었다. 그걸 살살 긁어주니, 드낙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세리안 또한 뒷짐지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로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공국으로는 언제 칭하면 되겠습니까?”

거기에 왕가의 지위 또한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말하니, 꿀 발라놓은 혀로 귀를 핥아주는 격이었다. 절로 드낙의 입이 찢어졌다.

‘이 맛에 깽판 치는가보다.’

당하는 사람은 상처투성이가 되겠지만, 행하는 사람은 쾌감으로 가득 찰 것이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드낙이 손사래를 쳤다.

“됐다. 됐어. 왕가가 무슨 공국으로··· 남들이 보면 내가 명령한 줄 알겠다. 왕가는 그대로 유지하라.”

“감사합니다.”

드낙이 왕가의 유지를 허락했다. 지금 시기에 남부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좋지 않아서였다. 물론 그대로 끝내지는 않았다.

“다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던 아라온의 표정이 싹 변하며 굳어졌다.

“봄이 오면 큰 축제를 벌일 생각이라, 동부의 중앙으로 와줬으면 하는데···괜찮겠나?”

“일이 바빠도 반드시 가겠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화끈해서 좋다.”

드낙이 시원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당연히 봄에 있을 큰 축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칭왕(稱王)이다.’

아라온의 눈이 침울해졌다. 플래티넘 왕가는 저물어가는 해였고, 불파겐 왕가는 떠오르는 태양이 될 것이다. 지는 해는 죽은 권력이며, 가만히 놔둬도 썩어 문드러져 사라질 것이다.

‘막타를 칠 수는 없지.’

왕가를 멸문하는 건 큰 위험이었다. 놔둬서 잊히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시간을 크게 두며 교체하는 이유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왕가로 지낸 가문의 끝을, 그 피를 땅에 떨어뜨린다면 수많은 이들이 비난할 터였다.

이 사회가 계급 사회였기 때문이다. 드낙조차도 최소 50년이 지나야지만 그 신분을 높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전까지는 왕가의 핏줄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적을 터였다.

“내 기분이 좋으니, 지방에 남아있는 악마 군세를 처리하는데 도움을 주겠다.”

“예?! 정말이십니까?”

아라온의 표정이 확 살아나며 고개가 쑥 삐져나왔다. 그야 그럴 것이 봄이 오기 전까지 드낙이 지방의 곳곳에 퍼져있는 악마 군세를 싹 청소한다면 봄에 많은 곳에 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였다.

“당연하지. 내가 두말하던가?”

‘업! 업을 먹자!’

드낙의 관심사는 당연히 업이었다. 마치 처음으로 집을 얻은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큰 은혜입니다! 군대를 빌려달라면 빌려드리겠습니다!”

아라온이 당장에라도 절을 할 것처럼 말했다. 드낙은 손사래를 쳤다.

“겨울에 보급하는 게 쉬운 일인가? 됐다.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대는 방위에만 집중해라.”

“예!”

아라온이 냉큼 대답했다. 드낙은 그 날 하루를 〈산그림자 성(Mountain Shadow Castle)〉에서 지냈다. 호화로운 식사를 얻어먹고, 푹신한 침대에서 지냈으며 밤시중을 드는 여자까지 침실에 두 명이나 들어왔다.

‘우헤헤.’

반인반마(半人半魔)가 되었으므로 이제 성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마음껏 뒹굴었다.

야지(野池)에서 드낙이 어둠을 틈타서 땅에 속삭였다. 그곳에서 찍찍 소리가 났다.

“나를 위해서 싸울 때가 왔다. 남부의 땅에 있는 악마 군세를 쳐부술 것이다. 창칼을 들어 올려라.”

“찍찍! 뜨낙!”

핏빛쥐 전령이 대답하며 땅속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좁은 굴을 지나서 큰 통로로 향했다. 그곳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대형 두더지에게 바짝 마른 지네 사료를 주고 있던 핏빛쥐가 있었다.

“뜨낙!”

“뜨낙! 우리들의 창조주께서 악마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를 왕에게 알려야 한다!”

“쫗다! 이놈이 가장 오래 달릴 수 있따!”

발전된 도시에서 살지 못하는 핏빛쥐답게 혀가 잘려져 있었다.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정해진 곳에서 대형 두더지를 키우며 외롭게 살아가는 형을 받은 자였다. 그에게서 두더지를 받은 핏빛쥐 전령이 빠르게 통로를 질주했다.

남부에 퍼져있는 우월하고 풍족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붉은혀 리전(Red tongue Region)〉의 위원인 갈래꼬리 왕(Forked-tail king)이 두 팔을 쩍 벌렸다.

몇천 평이나 되는 거대한 지하 공간에는 수많은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곳곳에 고블린들이 조각한 〈횃불 토템〉이 자리잡혀 있어서 횃불보다 더 밝은 주홍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길쭉하고, 화려한 복장을 하는 핏빛쥐들의 정예병들이 수만이 넘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우리들의 창조주께서 우리들의 힘을 원하신다! 지상으로 나아가서 그분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영광이오, 영광이오, 영광이로다!

쩌렁쩌렁 목소리가 터져나갔다.

“끼에에에! 성전이다, 성전!”

“우리들의 신! 우리들의 모든 것!”

그 속에는 고블린과 크놀들도 속해있었다. 이들은 신앙의 의미로 드낙의 얼굴이 새겨진 목걸이를 차고 있었는데, 나무부터 시작해서 온갖 재질로 목걸이의 재질은 서로 제각각이었다.

반면 붉은혀 리전에 소속된 핏빛쥐들은 그런 게 없었다. 일종의 종족 차별이었다. 몇몇 불손한 고블린과 크놀들은 등이나 어깨 혹은 가슴이나 목에 낙인이 찍혀있기도 했다.

풍족한 사회였기에 종족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를 두드리며, 옆을 볼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큰 통로로 빠져나가며 지하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낙과 붉은혀 리전의 전투는 대부분 야전(夜戰)으로 이루어졌다. 목격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낮에 움직이는 인간들을 사냥하는 악마 군세가 싸우고 싶지 않은 시간대에 싸우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크크크크!”

여자의 젖가슴을 움켜쥔 채 그 입술을 탐하는 〈반악마 마법사(Half Devil Wizard)〉의 입에서 혀가 여자의 식도를 타고 깊이 들어갔다. 여자가 부들부들 떨더니 들썩들썩 거렸다.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꾸지직거리는 파열음 속에서 반악마 마법사의 긴 혀를 타고 피가 역류하며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나고 피가 빨린 여자가 허물처럼 늘어지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평범한 〈블레이즈 위저드(Blaze Wizard)〉 중에 하나였던 그였지만, 지방에서 죽이고, 죽이고를 반복하며 악마 게페락스가 토벌되고 나서 스스로 업을 쌓아서 반악마 마법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코시모(Cosimo, 질서)라고 지칭했다. 이 혼란을 모두 정립하고, 스스로 악마로 거듭나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특히나 〈미디움 이블 리자드(Medium Evil lizard)〉를 50마리나 보유하고 있었기에 그 주변의 악마 군세 또한 그에게 많이 흡수되었고, 그 군세는 이제 3만에 달했다. 그중 2만 8천이 최하급 병종, 〈헤드리스(Headless)〉였지만 대군임에는 틀림없었다.

후두두둑.

미디움 이블 리자드의 사타구니에서 떨어지는 피와 살들을 헤드리스가 뭉쳐서 핥아먹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시체가 가득 쌓여 있고, 닥치는 대로 먹고 있는 다양한 중급 악마 병졸들이 득실거렸다.

작은 성이었던 이곳은 모든 것이 폐허로 변했고, 폭삭 주저앉아 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흐흐흐.’

피가 모두 빨린 여자를 코시모가 성기를 세우고 시체 강간을 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는 오직 악마 병종들뿐이었다.

고오오오-!

지옥에서 와이번의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은 음역이었으며 저주파가 섞인 포효에 헤드리스들이 몸을 떨었고, 하던 짓을 멈추고 하늘로 머리를 빳빳이 세웠다.

“와이번이다.”

반악마 마법사, 코시모가 눈을 반짝였다. 야생의 와이번이라면 악마 병졸로 만들어 〈타락한 와이번(Fallen Wyvern)〉으로 만들 수 있었다.

“준비해라, 블레이즈 위저드들아! 속박하여 땅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숨겨두었던 검은 불꽃을 뿜어내던 블레이즈 위저드 수십 마리가 검은 불꽃을 인조 피부로 가리면서 몸을 낮추었다. 구름에서 튀어나온 와이번은 달빛을 받으며 그 모습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길쭉한 몸체는 세련되었고, 고급스러웠다. 검은 비늘이 달빛에 반짝였다. 날카로운 형태의 날개는 조금 짧은 감이 있었지만, 오히려 와이번을 날카로운 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쿠워어어어!”

낮게 날며 와이번이 산액 브레스를 부채꼴로 넓게 쏘아 보냈다.

“지금이다!”

코시모가 준비해둔 마법을 펼쳤다. 수많은 속박 마법이 와이번을 노렸다. 그중에 절반이 허공을 갈랐고, 절반이 와이번을 속박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상쇄되었고, 와이번에 타고 있는 두 명의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으로 숨겨져 있었는데, 다른 마법이 공간에 침투하자 절로 풀어져 버린 것이다. 은폐 마법은 다른 초월의 힘에 매우 쉽게 허물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드래곤 나이트?”

반문하는 코시모의 귀에 땅이 들썩이며, 파헤쳐지는 소리가 났다.

“키아아아!”

그것은 〈떼(swarm)〉었다. 달빛을 받았음에도 그저 꿈틀거리는 붉은 덩어리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붉은 떼에 의해서 뒤덮었다.

“크아아아아!”

입을 쩍 벌린 미디움 이블 리자드가 삽시간에 핏빛쥐에 의해서 몸이 뒤덮이며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 아가리에 온갖 무기가 쑤셔지고, 다리의 힘줄이 크놀이 만든 칼에 잘려나갔다.

미디움 이블 리자드가 버둥거리면서 핏빛쥐를 피떡으로 만들 듯이 후려쳤지만, 방어 주술 덕분에 목숨은 건사할 수 있었다. 그 광경 또한 다른 핏빛쥐에 금방 가려졌다.

핏빛쥐들은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진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계속했다.

쿠-웅!

모비딕이 한중간에 내려앉으며 긴 머리로 단번에 브레스를 뿜으며 몸을 한 바퀴 휘둘렀다. 악마 병졸들이 싹 쓸렸다. 그중에는 흑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한 코시모도 있었다.

화르르르!

거칠게 타오르는 검은 불꽃으로 뒤덮인 코시모가 날아가면서도 양손에서 거대한 화염이 크기를 키워갔다. 하지만 그 순간에 하늘에서 드낙이 뚝하고 떨어져 내렸다.

촤아아악!

단번에 그 신체가 두 짝으로 갈라졌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서 피가 소나기처럼 내렸다.

푸덕. 철퍽.

두 쪽이 된 몸이 약간의 시차를 가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쎈 놈인 줄 알았는데. 위에서 떨어지는 것도 모르네.”

그렇게 불평하던 드낙이었지만, 피에 젖은 채로 씨익 웃었다. 업이 들어오는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빈 창고에 곡물을 차곡차곡 쌓는 농부의 마음처럼 기쁨을 주었다.

중립신의 챔피언이 되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또한 평범한 인간은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반초월체가 된 드낙의 육신이었기에 업의 흡수가 체감되었다.

왠지 드낙은 코끝이 찡했다. 왜인지는 그도 몰랐다. 존재의 격(格)이 올라가는 것은 엄청난 행복감이며, 기쁨이었다.

검은 문의 능력이 주는 거짓된 쾌락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투는 1시간도 지속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핏빛쥐들의 포식(捕食)이 이어졌다. 중앙에서 모비딕이 흔들고, 드낙이 대장을 한 수에 죽였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전술 성공은 전투를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을 낼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드낙은 지방에서 힘을 모으는 악마 군세를 모조리 토벌했다. 동시에 이곳의 핏빛쥐들이 죽인 업 또한 드낙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막대한 업을 쌓은 드낙은 이를 중립신과 거래하지 않았다.

딱히, 필요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중립신이 건네는 능력은 하나같이 드낙의 흥미를 당겼다. 하지만 드낙은 이를 선택하지 않았다.

업을 모으는 것은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를 만드는 작업과도 같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업을 소중히 대하고 있었다.

'이제 동부로 돌아가자.'

모비딕이 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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