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2 <-- 에필로그 -->
〈산그림자 성(Mountain Shadow Castle)〉으로 아라온 플래티넘의 군대가 들어섰다. 그 숫자는 4천 정도에 불과했는데, 탈영병부터 재규합하지 못한 자들이 많아서였다.
두갈드 부사령관이 실질적인 군대의 총사령관이었고, 아라온은 직함이 총사령관이었지만 군략이 뛰어나지 못했다. 평시에 천(千)의 군세를 유지하는 게 고작인 장군이라고 할 수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천도 버거운 자였다.
그 결과가 4천의 병사였다.
왕자라는 직위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혈통은 그 자체로 힘을 지닌다. 그 효력은 나라가 망하고도 50년은 갈 수 있었다.
〈마인데르트 마운틴(Meindert Mountain) 성주〉이 그를 맞이했다. 성벽 밖으로 나온 병사의 숫자가 500명이 넘었고, 성벽 위에도 활시위를 당기지 않았을 뿐이지 궁병들이 바글거렸다.
물론 깃발이 수도 없이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깃발병으로 보였다.
“환영인사가 너무 과한 것 아니오?”
아라온 플래티넘이 말에서 내려 마운틴 성주와 가볍게 악수하며 포옹하며 성안으로 들어섰다.
“성이 제법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소. 악마의 군세와 싸운 적이 없는가?”
“예. 괴이하게도 이곳만 비켜났습니다. 아마, 마신장의 영토라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에게 바치는 조공이 있지 않습니까?”
“과연.”
아라온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가 큰 곳이었기에 마신장에게로 향하는 조공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 덕에 많은 국력이 이곳에 잠들어있었다. 괜히 그가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운이 좋군.’
악마 군세가 지나간 온전한 곳.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날갯짓을 준비하는 건 실로 쉬워 보였다. 아라온은 그날 바로 마인데르트 마운틴 성주를 중앙대신으로 임명했다.
“감사합니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아라온은 그 뒤로도 왕인 것처럼 행동했다. 동시에 연회도 열었다. 이곳의 지역 유지들인 관리들과 안면을 트고, 서로 이권을 가늠하고 내어주기 위함이었다.
기득권층을 잡아야지만 일어설 수 있었다. 연회는 자정이 넘도록 이어지다가 조금씩 시간을 들여가며 천천히 조용하게 마무리되어갔다. 끼리끼리 짝을 지어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거나 연회장을 나갔다.
아라온 또한 오래 있지 않았다. 자신은 희소해야 하며, 작은 시간을 관리들에게 할애하는 게 좋았다. 잠에 빠져든 아라온은 귀를 때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쿵쿵쿵!
“이 무슨 무례인가? 무슨 일이냐!”
소리를 치자마자 문밖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밖에 와이번이 나타났습니다!”
“헉.”
아라온이 헛바람 소리를 냈다. 수도에서부터 10일. 그 거리를 뚫고 쫓아오다니.
‘아니, 그것보다 그 지옥도에서 살아남았다고?’
쿠당.
“켁.”
침실에서 일어나려다 발이 이불에 꼬였고, 그대로 아라온이 넘어졌다. 무릎이 조금 까졌지만 큰 것은 아니었다. 서둘러 시녀를 불러 옷을 챙겨 입었다.
그 사이에 외성벽과 내성벽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횃불을 더 가져와라! 최대한 주변을 밝혀야 한다!”
“예!”
구오오오오!!!
낮은 저음의 울리는 포효소리는 오금이 덜덜 떨리게 하였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쭈뼛 섰다. 눈앞에서 범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했다.
끼리릭! 끼리릭!
도르래를 돌리며 성벽 위로 발리스타가 올라왔다. 발판이 다시 주르륵 내려가자마자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발리스타를 들이밀었다.
댕. 댕. 댕.
높은 첨탑에서는 종이 울렸다. 자는 이들을 깨우고,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모두에게 알렸다. 혼란을 무작정 막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다그닥!
“뛰지 마시오! 뛰지 마시오!”
끝이 뭉툭한 천으로 가려진 목봉을 쥔 기수들이 3기씩 곳곳을 누비며 사람들을 통제하여 길을 안내했다. 외청과 내청 그리고 신전과 식량 창고 혹은 병영 등 큰 시설로 옮겼다.
‘저놈들을 어떻게 믿어?’
몇몇 시민은 따로 행동하기도 했다. 물론 복잡한 성벽의 구조로 되어 있었기에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계단도 많았고, 좁은 통로부터 갈림길까지 놓여있었다. 어떤 곳에는 문도 안 열어졌다.
“너! 왜 여기에 있는 거냐!”
“힉. 그, 그게.”
성벽을 넘으려고 한 시민은 단번에 포승 되어서 끌려갔다. 시민들의 불만이 쌓였을 때, 목을 잘라 효수하여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이곳에 개인의 자유는 없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었다.
성을 수바퀴 배회하던 모비딕이 외성문을 정면으로 두고 수십 미터 밖에서 내려앉았다. 드낙이 마법으로 불꽃을 만들어내 주변으로 퍼뜨렸다. 둥둥 떠 있는 촛불 불꽃에 드낙과 세리안, 모비딕의 모습이 절로 보였다.
“들어라! 들어라, 산 그림자 성의 병사들과 관리들, 시민들아! 내 이름은 드낙 불파겐! 동부의 영주이며, 악마를 토벌하기 위해서 내려왔다!”
“허나, 아라온 플래티넘은 악마와의 결전을 앞에 두고 도망쳐서 이곳까지 흘러들어 갔다! 인간의 역적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드래곤 나이트의 숨결이 모든 것을 불사를 것이다!”
드낙이 목적을 말했다. 혼란이 조금 일어났지만, 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내용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만큼 마법이 가미된 드낙의 목소리는 성 전체를 흔들었다. 아라온 또한 들을 수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난 플래티넘 왕가의 적통이다! 왕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나라가 살아야 시민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는 관리들이 모인 대책 원탁 회의에 가장 먼저 와서 크게 외쳤다.
“하지만 드래곤 나이트를 어찌 설득합니까?”
“그는 호구다. 개호구지. 시민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격렬하게 저항한다면 협상 테이블로 스스로 걸어올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기수를 보내어 협상하자고 말하라!”
아라온은 드낙을 호구라면서 관리들을 독려했다. 물론 그에게 드낙은 이미 괴물이었고, 절대 대적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무조건 협상해야했다.
“악마와의 결전에서 도망쳤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희들에게는 불파겐이 배신을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누구의 말을 믿는 것인가! 힘의 논리를 통해서 불필요한 인간은 모조리 개밥으로 준 불파겐의 말을 믿는 것인가!”
아라온이 역정을 냈다. 이에 관리들이 입을 다물었다.
“뭐하는가! 어서 기수를 보내서 불파겐 자작에게 협상의 여지를 알려라. 이곳까지 온 것을 보니, 악마를 토벌한 것이 틀림없다! 이 성에 있는 모든 금화와 재물을 모아라! 당장! 어명이다, 어명! 왕의 뜻이다! 남부왕의 명령이다!”
“그렇게는 못하겠소.”
마인데르트 마운틴 성주가 짧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원탁의 뒤에 대기하던 성채 수비대원이 할버드를 아라온에게 들이밀었다.
몇몇 관리들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눈이 절로 크게 뜨여졌지만, 제법 이권을 많이 집어먹은 관리들은 평온했다. 이미 작당한 것이다.
“이곳에 있는 재물이 얼마나 많은지 왕자께서라면 잘 알고 계실 것이오. 마신장에게 공물을 몇 년이나 더 보내야 하니, 미리 준비한 것이 많소. 그렇기에 그분께서도 이곳으로 가장 먼저 오셨소.”
“그분?”
“〈폼포스 플래티넘(Foamforce Platinum)〉 왕자 전하 말이오.”
쾅.
원탁의 문이 열렸다. 초췌하지만 골격 자체가 타고난 전사인 폼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광대뼈가 안으로 푹 들어갔음에도 눈빛은 살아있었고, 복장 또한 화려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말은 존대였지만, 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우해줘도 될 정도로 자신이 커졌고, 아라온이 망했다는 뜻이었다. 불쌍한 자에게 건네는 돈과 같았다.
“너···네가 어떻게?”
“마신장은 이곳에서 발돋움을 했고, 나는 풀려나게 되었소. 생각보다 그쪽도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마수들이 있더군.”
존대는 처음뿐이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라온은 알 수 있었다. 실로 참담한 기분이 그를 지배했다. 절로 고개가 푹 숙어졌다.
“포박해라. 산채로 드낙 불파겐 자작에게 보내줄 것이다.”
폼포스가 앞장서서 내성문을 치고 나갔다. 그 뒤로 재갈이 물리고, 팔다리가 묶인 아라온이 거칠게 끌어졌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대로를 행진할 때, 폼포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었다.
“아라온 플래티넘은 악마에게서 도망친 패배자다!”
“시민이 고통받는 것이 괴로워서 나, 폼포스 플래티넘은 스스로 마신장 앞에 섰고, 그에게 붙잡혀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일왕자는 그렇게 할 용기조차도 없었다!”
아라온을 욕하고, 자신이 겪은 고통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들의 행진은 드낙이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덩치가 큰 폼포스는 덩치에 걸맞게 당당하게 드낙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직접 아라온의 뒷목을 잡고 그 앞에 밀었다.
“윽.”
아라온이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2왕자 아닌가. 마신장에게 잡혔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옛말이오. 마신장은 서쪽으로 갔고, 인간의 서부는 마수들의 땅이 되었소.”
“마신장이 서쪽으로···”
드낙이 눈을 반짝였다. 악마 게페락스의 피를 받아먹으며 업의 그릇이 커진 드낙이었다. 마신장을 죽여야만 했다. 이제 필연이었다.
멀리 보면 중립신과의 경쟁이었다. 이제 드낙도 자신의 업을 쌓아야 했다. 검은 능력으로 업을 바꿔먹는 게 아니라, 계속 쌓아야 했다. 그렇게 봤을 때, 마신장의 업은 능력도 생기고 좋았다.
적발의 능력이 한층 강화될지도 몰랐다. 다른 오우거보다 2배는 큰 놈이기 때문이다. 놈이 진짜로 움직였음을 2왕자가 풀려나는 것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왕자를 풀어줘서 권력을 둘로 나눈다. 이는 곧 서쪽에 있는 마수들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힘은 드워프들을 죽이는데 쓰일 것이다.’
생각을 마친 드낙은 왕자를 하나만 남겨야 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수풀 속에 숨은 채 활시위를 당기는 음흉한 사냥꾼의 생각도 삐쭉 튀어나왔다.
‘마신장의 계획을 나도 이용하는 거다.’
왕자를 그대로 둘로 두고, 남과 북으로 남부를 또 나누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그들에게서 갑질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동부는 그들을 상대하는데 더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북부 또한 영향받을 터였다.
‘하나 된 힘보다는 나누어진 힘을 내가 하나로 움직이게 하는 게 편하지.’
다리 하나 건너서 시민을 피를 빨아먹기 때문에 드낙이 욕먹을 일도 적어질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분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결국 왕자를 하나 두는 게 가장 나을 듯했다.
‘누구를 선택한다···?’
2왕자는 드낙의 힘을 체감하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1왕자는 드낙의 힘을 깨달았다. 그 지옥도에서 승리하고, 여기까지 쫓아왔으니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신경질적으로 변하게 될 터였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겠지.’
이내 드낙이 결정을 내리고, 모비딕에게서 내려서 아라온 왕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누구인가? 인간을 저버린 역적을 포승하고, 잡은 것이?”
폼포스 플래티넘이 웃으며 대답했다.
“대의가 그를 잡았소. 나는 그저 그에 답했을 뿐이며··· 여기있는 산그림자 성의 관리들 또한 아라온 플래티넘의 죄를 잘 알고 있소. 인간을 위협하는 악마를 상대로 도망치다니, 백금왕가의 수치요.”
그를 죽여도 상관없고, 오히려 죽이길 원하고 있었다. 그런 뉘앙스를 풍겼다. 허나 드낙은 바로 죽이지 않았다. 그대로 아라온의 머리채를 들어 올려 그에게 속삭였다.
“보라. 적통을 죽이려는 저 모습을. 봐라, 재물을 탐하는 관리들의 모습을. 그들은 폼포스를 도와서 적통을 죽였으니, 감히 공신이라 칭할 만하다.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 것이다.”
“으으읍! 으읍!”
재갈이 물린 아라온이 버둥거렸다. 뭐라고 말했지만 침만 질질 흘러내릴 뿐이었다.
“2왕자는 대로를 걸으면서 널 욕하고 깎아내리기 바빴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그래서 나는 널 살려줄 생각이다. 그 대신에 폼포스를 죽일 생각이야.”
“흐읍! 으으읍!”
올가미에 다리가 묶여서 꽤액거리는 멧돼지처럼 아라온이 버둥거렸다. 하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고, 힘에 부쳐서 축 늘어질 뿐이었다.
‘2왕자가 1왕자를 스스로 죽게 들이밀고, 욕함으로써 1왕자의 이미지는 박살이 났다. 그렇기에 1왕자는 오히려 쓸만해 졌다.’
더러워진 왕관이다. 고로 죽여야 하는 건 2왕자 폼포스 플래티넘이었다. 그의 이미지는 역경을 이겨낸 왕자로 보일 수 있었다. 반면 아라온은 도망친 왕자다.
아무리 발악해도 드낙에게 칼을 겨눌 힘을 모으지 못할 것이다.
‘훌륭한 허수아비가 아닌가.’
드낙이 아라온의 입에 물린 재갈을 뜯어냈다.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범처럼 앞으로 뛰어나가서 단번에 적혈대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경악한 눈을 한 폼포스 플래티넘의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 외에 그의 공신이 될 수 있도록 곁에 머물던 관리들도 드낙의 대검 한칼에 썰어져서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헉!”
크게 술렁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턱.
대검의 끝이 땅에 살짝 박혔다. 검면이 드낙에게 기대어졌다.
“뭐하는가. 적통을 시해하려고 한 배신자들을 성문 앞에 효수하지 않고.”
“예!”
병사들이 그대로 따랐다. 세리안이 팔짱을 낀 채 그것을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실로 간사한 짓거리였다. 반면 아라온 플래티넘은 오히려 그 기회를 살려서 관리 800명을 모조리 쳐 죽여서 성벽 밖에 시체를 버려버렸다.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
그 일을 모두 마치고 아라온 플래티넘이 양 무릎을 꿇으며 드낙에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드낙은 흡족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우린 서로 의논해야할 일이 참으로 많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