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1 <-- 에필로그 -->
“핏빛쥐와 함께 하겠다. 다만, 테라의 수호는 도와준다. 적극적으로 지킬 것이다.”
드낙의 말에 중립신이 조건을 걸었다.
“억겁의 시간이 지난다면 테라는 너의 것이 될 공산이 크다. 핏빛쥐의 신을 따로 만들어 그 신앙과 업을 최소 10명 이상에게 나누어줄 것을 요구한다. 동시에 5천 년 동안 공격적, 적극적 전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가장 먼저 중립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곧바로 체결되었다. 애초에 핏빛쥐의 신이 된다면, 전쟁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신성을 지닌 부하를 10명 두게 되겠지만, 그것도 조율하여 지분을 자세하게 나누면 그만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5천 년일 수 있다.’
직감적으로 드낙은 업의 분할보다 5천 년이라는 세월이 중립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테라의 땅은 끝없이 넓어질 것이고, 행성은 커질 것이다. 고로 생명체가 늙어 죽으며 생기는 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많아질 것이다.
‘테라에 욕심은 없다.’
핏빛쥐, 지구로의 귀환, 신좌.
이거면 충분했다. 그 이상을 원했다면 중립신을 고꾸라뜨릴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드낙은 그런 마음이 없었다.
‘네 꼴리는 대로 해라. 나는 내 살길을 이제 찾아야겠다. 가만히 받아먹으려고 하다가 똥 되는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다고 진짜 솔직하게 말한 중립신의 실책이기도 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닌 법이었다. 고쳤다고 생각한 중립신은 드낙의 모습에서 크게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라고.
뼈저리게 깨달았을 터다. 동시에 세파리아스를 챔피언으로 내세우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남부 왕국에 방점을 찍으며, 드낙은 이제 자신이 스스로 나서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거 가만히 있다가는 목줄이 수십 개 채워져서 재갈이 물린 채 침을 질질 흘리며 엉덩이에 채찍질 당하며 적들을 요격하는 생체 방위 시스템이 될 수 있었다.
“지구에서 살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강력한 차원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다른 존재가 막거나 간섭하기 어렵고, 시간을 들이게 해야 하지.”
방법을 말하는 중립신에게 드낙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니, 그럼 왜 아까는 안 된다고 그랬음?”
“여러 조건을 생각해서 어렵다고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안 된다고 말한 것 같은데.”
트집을 잡으려는 드낙을 세파리아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쪼잔하게 그런 거로 트집 잡지 마라. 중립신이 네가 그렇게 트집 잡는다고 꿀 한 통 더 줄 신으로 보이느냐? 제발 생각 좀 해라. 생각.”
“아까부터 자꾸 왜 그러는데?”
드낙이 짜증을 부렸다. 이에 중립신이 눈을 감은 채 세파리아스 대신 대답했다.
“신살자(神殺者)로 키우려던 놈이 타협했으니, 짜증을 부려야지. 아주 제대로 무위를 물려주려던 것만 봐도 뻔하다.”
“흥.”
중립신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콧소리를 내며 턱을 추켜올렸다.
“〈차원의 다리〉를 만드는 건 힘든 일인가?”
“힘들지. 효율성도 나쁘고, 업의 소비가 크다. 예를들면···대양과 대양을 잇는 다리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과 같다. 그 누구도 하지 않는 짓이지.”
“하지만 우리의 관계가 훈훈해지려면 꼭 필요하고.”
드낙의 말에 중립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드낙은 드낙이었다. 그렇기에 중립신은 오히려 홀가분함마저도 느꼈다. 자신이 너무 많은 수를 넘겨짚었다는 걸 이번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만족하는 인간이었다. 아마, 그 어떤 척박한 곳에서도 생선 살을 뜯으며 살다가 목장을 제법 성장시켜서 지역 유지에서 딱 멈춰서 배를 두드리며 만족할 자였다. 큰 힘을 쥐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결국 그 힘의 수준에 맞게 만족해버렸다.
‘아. 그렇다. 난 이런 인간을 원했다.’
인간은 변하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드낙은 결국 변하지 못했다. 그런 인간이라서였다. 물론 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실로 그러했다. 죽음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업의 소비가 너무 큰데, 서로 반반씩 부담하는 게 어떤가.”
“싫어. 그동안 꽁쳐먹은 업으로 만들어줘.”
작은 협의에도 드낙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영웅의 행보를 걸었지만 그 업을 오롯이 받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오우거를 죽여서 그 업이 죽인 기사에게 들어가는 것처럼, 원래라면 드낙 또한 강력한 영웅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는 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 업은 중립신이 꼬불쳐서 먹었다.
세파리아스가 끝도 없이 강자로 발전한 것도 업(業) 때문이었다. 영웅이라는 것은 그 행보마다 엄청난 인과율을 움직이고 그 업보는 영웅에게로 되돌아간다. 인간 한 명에 의해서 국가적 이슈가 요동을 치기 때문에 그 카르마는 엄청난 양이다.
“사냥꾼 시절로 돌아간 그대를 보는 듯하군.”
“그때는 웅크리기 바빠서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난 곰 잡는 덫은 치지만, 범(虎) 잡는 덫은 치지 않아.”
“차원 다리는 핏빛쥐들이 수호를 맡아줘야겠다. 모두 초월의 힘을 사용해야 하며,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 테라의 역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지.”
남에게 일 시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달려서 불 끄는 건 무섭지만, 남 시켜서 불 끄게 시키는 건 쉬웠다.
“근데 괜찮나? 역린이라며.”
“테라의 방위는 그대가 알아서 하겠지. 맹약 아닌가. 그 반동을 짊어지는 것보다 닫힌 차원문을 뚫는 게 더 이득일 때가 오게 될 것이다.”
“그때가 5천 년 후인가?”
그에 대해서는 중립신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드낙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고꾸라뜨린다면 5천 년 전에 넘어뜨려야 한다는 것을. 물론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선택하지 않아도 준비를 해둬야 했다. 핏빛쥐를 키우는데 열과 성의를 다해야 했다.
‘중립신이 끝에서 뒤통수를 칠 수도 있으니까. 경계해야 해.’
5천 년이 지나서 그걸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중립신의 계획은 음흉했다. 드낙은 거기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 신성(神性)은 그대로 핏빛쥐에게서 얻고 내가 가지면 되나?”
“그렇다. 어차피 나 정도는 되어야지 테라를 만들 수 있다. 갓 태어난 신은 필요가 없다. 거기에 이 차원계에 지성종족의 씨를 뿌린 것은 나다. 그대의 신성을 이 땅에 사용해도 아무 의미가 없지.”
신의 지위를 중립신이 확인시켜줬다.
“테라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의체를 통해서 내려와도 좋다. 하지만 진체는 안 된다. 핏빛쥐 또한 마찬가지다.”
“오케이.”
“드낙,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테라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라.”
그렇게 중립신과 드낙은 〈검은 꿈 협상〉을 마무리했다.
테라가 완성되는 날, 테라라는 행성이 드낙에게 맹약을 지키도록 강한 족쇄가 될 터였다. 그건 서로 간의 믿음이 될 것이다.
중립신은 행성에 흡수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필멸자를 위한 희생이었다. 또한 그 속에 드낙은 속해져 있지 않았다.
푸쉬이익.
악마의 육체가 검은 연기에 집어삼켜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검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선 드낙은 반인반마(半人半魔)의 환상을 경험했다. 〈악마 게페락스의 피〉가 드낙의 목을 타고 꿀꺽꿀꺽 들어오는 환상이 드낙의 감각으로 들어왔다.
‘윽.’
악마의 피는 거칠게 몸을 헤집었다. 마력, 주력, 신성력이 모두 물질적이지 않은 힘이라면, 악마의 피는 물질적인 초월의 힘이었다. 성질 자체가 정반대였다.
마법사가 마력을 마법진에 새기고, 연금술을 통해서 부여하여 사용한다면, 악마는 육체를 소비해서 초월 행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
몸이 곧 힘이었다. 그렇기에 기괴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피가 인간의 몸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몸을 악마처럼 만드는 일이었다. 〈소비〉되어도 버틸 수 있는 육체가 되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트롤의 피와 상성이 좋았고 그 피와 뒤섞이며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혈류(血流)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검은 문의 능력을 취한 드낙이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피가 퍼지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보통 인간은 손목과 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만 반인반마가 된 드낙은 혈류가 그대로 느껴졌다.
‘좋다.’
육체에 부여된 능력들이 악마의 피에 의해서 시너지 효과를 받으며 한층 더 강화가 되었다. 척추부터 간까지 초월적인 능력이 부여된 장기도 한 단계 성장했다. 육체를 초월의 힘으로 사용하는 게 악마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악마의 힘.”
육체에 특화된 힘이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악마의 힘이 잘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엇?!”
좋아하는 드낙은 이내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 소리를 냈다. 자연스럽게 중립신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더는 나의 챔피언이 아니다. 동등한 입장이니, 챔피언의 자격을 가질 수 없고 고로 신성력을 줄 수도 없다.”
“그러는게 어딨어?”
“어쩔 수 없다. 이제 그대가 만드는 업을 그대가 가져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핏빛쥐의 신이 될 수 있다. 나의 힘인 신성력을 받는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 양립할 수 없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나···”
“그런 것이다. 내 힘을 부여한다면, 그것 또한 인과율이 되고, 업이 된다. 챔피언에게 괜히 신성력을 많이 준 것이 아니다. 그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업은 나에게로 향한다. 그럼에도 그대가 원한다면, 신성력을 내어주지.”
“됐어.”
드낙은 깔끔하게 신성력을 포기하기로 했다. 꺼림칙해서였다. 특히 5천 년의 기간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바짝 자신의 업을 쌓아야 했다.
‘이제 진짜 독립이다.’
남에게 전세, 월세로 살다가 빚 얹어서 나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중립신의 신성력은 빚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드낙은 과감하게 손절했다. 북부에서 한 번 크게 손절해봤기에 할 수 있는 큰 행보였다.
손절도 크게 해본 사람이나 크게 할 수 있었다.
“근데, 전초극의 오른팔은 권능치고는 쉽게 파훼가 되잖아? 그걸로 어떻게 대신이 되었어?”
“인간의 몸으로 했으며, 오른팔이라는 제약이 있어서 그렇다. 부위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닌 게 〈전초극의 권능〉이다.”
다수에게 부여할 수 있고, 원한다면 전초극의 능력이 전신으로 뻗어 갈 수 있었다.
“인간의 그릇을 생각하면, 내 그릇을 떼어서 줘도 오른팔이 전부였다.”
결국은 그릇이 문제였다.
“그거 참···형편 좋은 권능이네.”
“강하면 강할수록 압도적인 권능이지. 기술에서 압도당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소의 격차는 힘으로 해결할 수 있고.”
“찌꺼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검은 꿈은?”
챔피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게 검은 꿈이고, 찌꺼기였다.
“이곳은 테라에 내가 흡수되기 전까지는 그대와 나의 협상 테이블 같은 곳이 될 것이다. 또 필요한 능력이 있으면 전과 다르게 이제는 나와 거래해서 교환하게 될 것이다. 능력은 내가 준비해보지.”
“오···”
허울뿐인 관계 발전이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졌다. 이제 그저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업을 통해서 거래를 해야 했다.
“다른 혼들은 이 중간 정신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검은 꿈을 유지하는 업의 비용은 서로 반반 부담하게 될 터다.”
“아니, 그게 그렇게 돼?”
“그간 내가 다 부담했지만 이제 서로 동등한 협력관계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또한 찌꺼기로 삼고 싶은 자가 있으면 미리 말하라.”
“그것도 업으로?”
중립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사장과 사장의 만남이었다. 검은 꿈의 유지부터 영혼 찌꺼기의 흡수와 검은 문 능력까지 모두 업으로 거래해야 했다. 그건 서로의 동등성을 의미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게 아니었지만, 공짜 하면 미쳐버리는 게 인간이었다. 그걸 돈 받기 시작했으니, 불편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이 더 많았고, 오히려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 곁을 떠나면 하나부터 열까지 돈이 드는 법이었다. 독립의 대가였다.
검은 공간, 검은 연기가 풀풀 거리는 공간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드낙의 정신 세계와 뒤섞이면서 생긴 현상이 일어났다.
평범한 바위가 불룩 튀어나오고, 나무부터 시작해서 꽃과 수풀이 피어나고 자랐다. 멀리서 보이는 집 한 채와 동떨어진 채 있는 도시의 먼 풍경이 드낙의 눈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것을 때때로 가리는 검은 연기가 흘렀다.
완전히 새 단장 된 검은 꿈은 이제 중립신과 드낙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정신세계가 되었다.
*
드낙은 병사를 회군시키며, 세리안을 뒤에 태우고, 모비딕을 통해서 아라온 왕자를 추격했다.
쿵!
숲을 태운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에 내려앉아 화전민에게 방향을 묻기도 했는데, 백이면 백 똑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제법 복장이 깔끔한 촌장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도 획득할 수 있었다.
‘아라온 왕자가 향하는 곳은 남서쪽에 치우쳐져 있는 가장 번영한 성.’
〈산그림자 성(Mountain Shadow Castle)〉.
마신장의 위협이 있는 성이었기에 군사력도 빵빵했다. 아직도 치안이 유지되고 도시가 제대로 건재하고 있을게 틀림없었다. 악마 군세 또한 몇 번은 막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신장에게 바치는 조공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기에 최근 가장 남부 왕국의 힘이 모여있는 곳 중 하나였다.
‘간다면 거기밖에 없겠지.’
인근 정보를 통해서 듣고 드낙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전에 잡는 것보다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 잡는 게 좋아 보였다. 두려울게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