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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630화 (629/1,239)

0630 <-- 에필로그 -->

‘이리 살아도 묶여서 살고, 저리 살아도 내쳐져서 야지에서 노예처럼 산다면 무엇이 다른가?’

첫 번째 제안을 받아도 외계에 진체를 두고 의체에 의지한 삶이다.

두 번째 제안은 아예 중립신이 거부했으며 선택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고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로 이동 가능하게 해주십시오. 거기서 재미나게라도 놀고 싶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그곳의 문화를 즐기고 싶습니다.”

드낙의 첫 번째 제안을 중립신이 거부했다.

“언제 테라가 위험해질지 모르고, 뚫어놓은 차원문을 적이 간섭하여 닫아버리면 큰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불가하다.”

어느 정도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었다. 그래서 드낙은 딴지를 걸지 않고, 바로 다음 타협안으로 넘어갔다.

“그럼 핏빛쥐와 함께 테라 밖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두 번째 타협안은 바로 핏빛쥐를 테라 밖으로 가져가 다른 행성에 자리 잡는 것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충성, 오로지 충성한 그들을 버리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드낙은 똥내가 지리도록 배신당한 삶을 살아서였다.

“변종종족이기 때문에 내가 판단할 자료가 적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많은 세월을 부여해줄 수 없으므로 불가(不可).”

드낙은 그 말에 조금 고민을 더 했다. 아무래도 책임회피를 하는 게 좋아 보였다.

“그럼 엘프를 살려주고 그들에게 목줄을 거십시오. 저는 챔피언의 상태로 지구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테라의 수호에 필요하면 이를 돕겠습니다. 혼과 그릇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정된 완벽한 엘프라면 신이 태어나지도 않습니다.”

완벽하다는 것은 곧 성장이 멈추었으며 변수가 없음을 뜻했다. 이는 엘프가 딱 정해지고, 고정된 종족임을 말해주었다. 다른 종족보다 강력하지만, 그 한계가 뚜렷했다.

“테라를 위해서는 엘프의 고정성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불가하다. 그들 종족은 테라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다. 또한 그대는 테라의 수호에 필요하다. 불완정한 차원문을 계속 뚫어놓고 지구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다.”

“그럼 중립신께서 계속 신으로 남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테라도 테라대로 만들고요. 신성이 부족하면 제가 신이 되고 그 신성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신좌에서 내려가도 전 개의치 않습니다.”

드낙의 언성이 제법 높아졌다. 네 번째 타협안이었다.

“테라는 대신의 희생으로 만들어진다. 알아서 행성은 계속 커져갈 것이며, 가히 무한의 땅이 될 것이다. 그런 곳을 만들려면 갓 태어난 신의 신성으로는 어림도 없는 법이다. 고로 불가하다.”

‘이런 씨발.’

드낙이 속으로 천박하게 욕을 지껄였다. 그러지 않으면 끓어오른 채 갈 곳 잃은 분노를 표출할 길이 없었다.

“아, 안 해.”

드낙이 대(大)자로 누웠다. 모든 것이 그냥 뭣 같았다. 그냥 빤스런치고 걍 다 걷어차고 싶어졌다. 깊은 현자타임이 내려앉았다.

“뭐라고?”

“못 해먹겠다고~.”

드낙이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실성한 것처럼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이 무슨, 뭐하는 짓이냐?”

그런 말에도 드낙은 모르쇠로 답했다. 물론 제법 말이 길어졌다. 퇴직금 떼먹힌 사람처럼 굴었다.

“줫같아서 못 해먹겠다고. 대계고 나발이고 이제 너 알아서 하라고. 날 녹여서 업으로 먹어버리든 알아서 하라고. 난 그냥···이제 모르겠다. 이거도 안 돼. 저거도 안 돼. 애새끼한테 사탕 보여주며 울음 그치게 하는 짓거리도 아니고, 못 해먹겠다고!”

드낙이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버둥거리며 감정을 배출했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박호훈. 넌 지금 그 어떤 인간도 가지지 못한 삶을 살아갈 기회를 걷어차고 있다.”

중립신이 경고하며 다그쳤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만화도 못 봐, 드라마도 없어. 영화는 단어조차도 꺼내는 게 부끄럽고, 섹스도 마음대로 못하고 이 전쟁, 저 전쟁 가라는 대로 가고. 내가 뭐 기계냐? 애 낳아도 시불놈의 새끼들이 보게 해주지도 않고!”

온갖 불평불만이 쏟아져나왔다. 지금까지 참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그중에는 세파리아스를 욕하는 것도 있었다.

“넌 나의 챔피언이다. 격에 맞게 행동하라.”

차분히 말하는 모습에도 드낙은 일관된 표정을 지으며 이어나갔다.

“챔피언도 그냥 안 할래. 그냥 레이시아 데리고 어디 한적한데 가서 농사지으면서 꼬물거리는 애들이나 볼란다···후우우···그게 맞았던 거였다. 내가 뭐하자고 이랬을까.”

그렇게 말한 드낙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버둥거리던 몸도 추욱 늘어졌다. 그의 마음을 질주하게 했던 모든 동기와 열정이 싹 사라져버렸다.

‘검을 처음 쥐었을 땐 적당히 지역 유지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안전한 성에서 건물주로 먹고 사는 거였지.’

검은 꿈을 통해서 그것보다 더 큰 꿈을 꾸게 되었다. 모두 나 잘살자고 한 일이다.

‘근데 결국 난 중립신의 손에 놀아난 것뿐이었다.’

중립신이 말해주는 진실은 한 명의 인간을 허무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신에게는 대단한 일이고, 엄청난 숫자의 필멸자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보였지만 그 속에 드낙이 없었다는 게 컸다.

커도 너무 컸다.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하는 거 자신도 해보고 싶은 게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었다. 누가 어디 해외여행 갔다고 하면 천만 원 빚을 지고서라도 가는 양반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드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싶어서 온갖 노력을 했다. 근데 여기까지 와서는 그냥 목줄 채우고 수호자가 되는 길뿐이라니. 강해진 결과가 세상의 똥 치우는 천민이 되라는 소리다.

“챔피언을 그만둔다고? 널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널 지켜준 신성력이 더는 없게 된다. 그래도 괜찮은가?”

“확 씨! 내가 병신이야? 그 역경은 네가 준거고. 호로 상놈의 자식아. 상도덕도 없는 새끼. 여름에 탄산음료 값 올릴 이론만 보는 새끼야.”

드낙이 상체를 훅 들어 올렸다.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였다. 만기적금을 탈 때가 왔는데 돈이 사라졌다는 말을 은행 직원에게 들은 기분이었다. 실로 빡쳤고, 뒤 돌았다가 다시 또 빡치는 경우였다.

“저기 있네. 나 대신 챔피언 할 사람. 칼을 응? 아주 잘 쓰던데. 겁대가리가 좀 없지만, 못 써는 게 없어. 하는 김에 중립신도 좀 썰어줬으면 좋겠네.”

“말조심하라.”

“이미 다 끝났는데 조심하고 말고가 어딨어? 왜? 지구로 보내주려고?”

그렇게 말하며 드낙이 다시 드러누워서 온갖 욕을 입에 담았다.

“그대 외에도 방법은 많다. 아직 늦지 않았다.”

중립신의 반협박에도 드낙은 태평했다. 현자타임이 강하게 와버렸다.

“그럼 그 방법으로 하시던가요. 개봉 앞둔 영화도 못 보고 여기서 대체 내가 뭐하고 있냐고.”

“세월이 흐르면···”

드낙이 중립신의 말을 끊었다.

“그놈의 존버. 존버는 흑마법사한테 시켜. 왜 나한테 시켜? 난 이제 모르겠다고.”

자신의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자 드낙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제대로 때를 잡았던데? 엘프니, 드워프니, 제국이니···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이런 개판이 똑같이 벌어질까? 내 생각에는···.와! 미친, 아무리 존버를 해도 안 오겠는데? 감당이 불감당이네. 그래도 신인데 역시 존버지.”

연기톤으로 드낙이 경박하게 지껄였다. 실로 듣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만큼 노련하게 경동맥을 자르고 지나가는 말이었다. 동시에 연기가 솟구쳐 올라오더니 밀랍 같은 중립신의 손이 튀어나와 드낙의 이마를 움켜잡았다.

“끄아아아아악!!!”

드낙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수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고, 습득했기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았기에 그 목소리에는 절로 경악과 공포가 깃들어있었다. 그 감정을 읽은 중립신이 버둥거리는 드낙을 더욱 짓눌렀다.

정신이 뭉개지고, 영혼이 깎여져 나가고 있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가! 어리석은 필멸자 주제에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제대로 된 그림조차도 그리지 못하는 놈이···! 감히 나를 협박해? 영혼째로 소멸하고 싶은 것이냐!”

“그르르륵!”

드낙의 입에서 거품이 일어났고, 짐승 소리를 냈다. 눈이 까뒤집어졌다. 정신이 무너지고, 영혼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 모습에 중립신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세뇌밖에 없겠어. 영원토록 나의 챔피언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수밖에.’

기이한 힘이 드낙에게로 스며들어왔다. 한 번은 당했지만, 두 번은 아니었다. 드낙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부들거리는 손으로 중립신의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가 땅으로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손가락이 쩍 갈라지며 조각났다. 검은 꿈은 정신의 세계. 진짜 몸은 아니었지만 정신력의 소모. 영혼의 붕괴를 의미했다.

턱.

“!”

“죽여···죽여봐! 죽여보라고!”

눈에서 피를 흘리며 드낙이 눈을 치켜뜬 채로 입술을 문 채로 말하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중립신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행사하면 드낙이라는 개체가 정신적, 영혼적으로 소멸당하기 때문이었다.

쩌저적···

검은 문에 있는 드낙의 정신과 영혼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만들어낸 몸이 쩍 갈라지며 후두둑 껍질이 떨어져 내렸다.

‘허어억.’

드낙은 거대한 탈력감을 느꼈다. 무릎이 금방이라도 꺾여나가며 비틀거려야 했다. 하지만 고꾸라지면서도 외쳤다.

“그냥 죽이라고! 인형으로 살 바에는! 나느으으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드낙이 계속 고함을 지르며 밀어붙였다. 이에 중립신이 이마에서 손을 뗐다. 그 손에서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조각난 드낙의 얼굴 반쪽이 기괴하게 검은 바닥에 떨어졌다.

콰당.

드낙이 넘어진 상태로 피눈물을 팔뚝으로 훔쳤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며 계속 자신을 상처입혔다. 이내 검은 연기가 그 사지를 묶었다.

“흐으···.흐으으···!”

바짝 서 있는 그 정신과 영혼은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정신과 영혼에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그 모습에 중립신이 머뭇거리더니, 이내 물었다.

“······죽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더니. 왜 죽으려고 하는 것이냐?”

“크흐흐흐! 하하하하!”

그 말에 드낙이 킬킬거리며 웃다가 시원한 웃음소리를 냈다. 전에 세파리아스에게서 들었던 말이었고, 그간 결코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 드낙이었다.

오히려 비웃었었다. 하지만 그제야 〈죽음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겉멋에 찌든 오만한 놈의 말로만 알았던 말로 느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건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애가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고, 행동이었다.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할 수 없고.

남이 자신보다 대단하고,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거대한 자존감이 담겨 있는 게 죽음보다 가치 있는 것이 있는 인간이었다. 신 앞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추켜세울 수 있는 인간.

“나(自)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죽어도 좋다. 그만큼 자신이 중요하다는 뜻이지. 남이 죽든 말든 나는 내가 믿는 길을 갈 것이며,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명예, 불굴, 정의, 용맹, 선행. 수많은 가치를 죽음보다 먼저 내세우는 자들이 있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그것을 믿기 때문이고,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은 소멸을 택할 수 있다. 스스로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

“모순덩어리다.”

“그게 인간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인간이 그런 인간이다.”

중립신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옆에 섰다. 그를 부축해주었다. 목숨이 경각에 도달하고 나서야 기사의 소양을 하나 건진 허접한 제자의 어깨를 거칠게 짊어졌다.

“중립신, 이제 그는 죽음보다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는 사치와 향락, 유희와 더러운 쾌락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

“아니, 자유라고 말해줄래?”

드낙의 말에도 세파리아스는 정정할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았고, 거친 북부에서 귀족으로 살아간 그에게 있어서 드낙은 욕망의 화신이며 저열한 파락호였다.

그런데도 정이 쌓여있는 건 드낙이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녀서였다.

“······네가 만족할만한 최소 조건을 말해봐라.”

중립신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건 항복이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서로 동등하게 마주 볼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였기에 살길이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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