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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629화 (628/1,239)

0629 <-- 에필로그 -->

드낙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앙금을 드러냈지만, 중립신은 이를 맞받아치지 않았다. 구렁이처럼 흘려넘기며 자신의 신뢰를 입에 담았다. 그 입술은 실로 새파랗고 차갑게 느껴졌다.

“모두 오픈하고 말해봅시다. 그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제가 악마의 육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면 전 초월자가 됩니다. 신의 반열에 오른다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걸 가만히 두겠습니까? 목줄을 놓겠죠. 그리고 그건 끔찍할 겁니다.”

중립신의 입이 달싹거리기도 전에 드낙이 검지를 올리며 계속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를 두려워하여 악마의 피만 받아마셔 반인반마(半人半魔)가 된다고 해도 테라가 완성되면 당신은 사라질 테니, 그 두려움 또한 없어지는 것이 됩니다. 결국 당신이 사라지는 날, 나 또한 최후를 맞이할 겁니다.”

그리고 윽박질렀다.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중립신이 장고(長考)에 들어간 것이다. 한고비를 넘기자 드낙이 세파리아스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관망하고 있었다.

‘새끼.’

드낙은 여전히 그 오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면서 지금까지 남들보다 우월한 재능을 지녀보지 못해서였다. 항상 자신은 부족한 인간으로 여겼다. 활짝 핀 재능의 꽃이 있어도 그걸 잡지 못하면 범부일 뿐이다.

이내 검은 연기의 흐르는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중립신이 힘을 사용해서 흐르는 시간을 줄인 것이다. 드낙은 꿈이었음에도 자신을 짓누르는 중력을 느꼈다. 육체를 지녔다면 몸이 아작이 날 정도의 중력이 검은 꿈에 모습을 드러냈고, 시간은 압도적으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중립신이 입을 뗐다. 드낙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거론할 필요도 없었고, 의심이라는 것은 그렇게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는 인정하고 들어가야 했다.

‘세뇌를 풀었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생존본능. 함정과 죽음에 대한 암살자의 감각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에 대한 위기관리 대처 능력은 발군인 것이 드낙이었다. 하지만 정면 승부는 중립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탓할 수는 없다.’

중립신은 드낙의 의심병을 탓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챔피언 계약〉부터 〈검은 문의 시스템〉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결국 이득을 본 것은 중립신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중립신이 어떻게 설명해도 드낙은 의심을 접지 못할 것이다.

그 감정의 골은 매울 수 없었고, 그냥 새로 땅을 만들어야 했다.

‘인간은 결국 변하는 법이지. 그걸 내가 간과했다. 본인은 싫어하지만, 세파리아스의 영향을 받았어.’

찌를 때 찌를 수 있는 인간은 드물다. 그리고 찌르지 않아야 할 때 찌르지 않는 인간 또한 드물다. 상황에 따라서 인간은 언제나 변화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다.

인간이 뚝심 있으면 대나무처럼 부러지기 쉽다. 변화하는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장점인 높은 적응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특성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중립신은 테라의 완성과 동시에 드낙에게 목줄을 채우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무리 영웅이라 불리는 자도 끝까지 일관성을 지켰던 자는 적었고, 그러지 않고 끝까지 소신을 지킨 영웅은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그 수는 손에 꼽고, 나중에 가서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추락하기도 한다.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은 변하는 법이다. 1년 전의 너와 지금의 너가 확연하게 다른 것처럼, 인간은 끝없이 변하는 존재다. 많은 인간은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신에게는 같잖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지.”

“그래서 날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한 겁니까?”

“그렇다. 영웅은 독재자가 되기 쉽고, 독재자는 결국 타락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제어가 필요하고.”

개혁을 외치며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았던 정치가가 한순간에 돌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뭇 인간은 이를 권력탓으로 여기지만 그저 인간이 그런 특성을 지닌 것뿐이었다.

적어도 외종(外種)인 인신(人神)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드낙은 크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서로 의심하는 걸 인정했으니, 이건 큰 걸음이고, 위대한 첫걸음입니다. 이제 타협점을 찾으면 됩니다. 중립신인 당신이 타협점을 제시한다면 서로 조율하여 원만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면 됩니다.”

“그대는 자유를 원하겠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돈의 노예로 살았지만 자유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게 박호훈이었고, 중립신의 챔피언으로 살아가며 그 굴레를 걸으며 힘을 가졌다. 힘을 가진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법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그 우직함. 자유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허락할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 살고 싶으면 목줄을 채운 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중립신은 깔끔하게 선을 갈랐다.

“어째서 안 됩니까?”

“테라는 오직 필멸자들을 위한 세상. 그곳에 초월자가 날뛰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그대도 포함되고, 나 또한 포함된다.”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중립신이 눈을 살짝 떴다. 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드낙을 압도시켰다.

“나는 인신으로 태어나 인간들을 보살피며 더욱더 강한 힘을 갈구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악신이 많았고, 그만큼 인간들은 죽어갔다. 모순되게도 인간이 죽을수록 나의 힘은 커져만 갔지.”

그건 셀 수도 없는 오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처음 태어난 그는 인간과 공생하기 위해서 인간을 지켰고, 지키면 지킬수록 인간은 되려 죽어만 갔다. 선과 악의 대립 속에서 죽어가는 것은 필멸자들 뿐이었다.

“초월자들의 불문율까지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때는 그랬지.”

죽는 초월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서로 업을 탐하는 짐승의 시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들의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곳을 지배하면서 생기는 힘을 손에 쥔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패배하여 도망치게 되었고 필멸자들의 세상을 만들자고 인신들을 설득했다.”

그 말을 드낙이 받았다.

“그리고 배신당했다. 맞습니까?”

“맞다. 초월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며 업을 받아먹기에는 아쉬웠던 것이겠지.”

“동생이 배신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그 말에 중립신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인신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예전부터 단 하나의 철칙을 지켜왔고, 그렇기에 그들로부터 인정받아 대신이 될 수 있었다.”

드낙이 흥미가 돌았다. 확실히, 신이 신을 대장으로 여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힘이 강하다고 해서 우두머리가 될 수 없었다. 힘이 강하면 연합해서 힘을 동등하게 맞추면 그만이다.

그 아래로 들어가는 일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중립신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단 하나의 권능. 신이 태어나면서 얻는 원초적인 힘. 다른 신을 집어삼키면 권능을 여럿 가질 수 있지만 난 전초극의 권능을 제외하면 아무런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믿음을 주기 위해서 신을 잡아먹는 신이 아님을 확실히 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배신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제가 초월자가 된다면 어떤 목줄을 걸 생각입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주십시오.”

“하나는 테라에게로 오는 외계의 침입을 모두 막을 것. 선하고 악하고 이롭고 해로움을 뛰어넘어 오로지 싸워 이길 것.”

이는 타협하기 좋고, 굽히는 것에 만족하는 드낙을 위한 맞춤형 목줄이었다. 동시에 테라를 지키겠다는 중립신의 의지가 보였다.

“둘은 테라의 생명체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개입하고 간섭하고 제어하고 지배하고 조언하고 건들지 말 것. 정도는 있지만 대업(大業)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초월자가 된 드낙이 반드시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업을 탐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테라에서 큰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셋은 테라에서 인신공양(人身御供)을 비롯한 신의 탄생을 철저하게 막을 것.”

초월의 힘이 남겨질 테라에서는 언제든지 또 다른 초월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를 막는 것 또한 빠질 수는 없었다. 그만큼 필멸자들을 위한 세상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초월자가 나오기도 쉬웠다.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는 것과 같았다.

“넷은 1억 이상의 생명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막을 것이며 그 사건에서 업을 탐하지 말 것.”

허나, 재앙에서는 드낙 같은 초월자가 개입을 해야 하기도 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거기에서 파생 되는 업을 몰래 훔치는 것을 막았다.

초월자에게 중요한 건 업이라는 자원, 하나뿐이었다.

“다섯은 테라의 생명체에게서 업을 받아먹지 말 것.”

명확하게 제약을 한 번 더 거는 모습도 보여주었고, 실로 철두철미했다.

“여섯은 오직 테라만을 수호할 것.”

다른 외계로 가서 업을 탐하여 테라를 뛰어넘는 것 또한 막았다. 테라가 드낙보다 강하다면 드낙은 결코 맹약을 부술 수 없었다.

“일곱은 권능을 둘 이상 가지지 말 것. 만약 외계의 침략자가 신이라면 그를 죽이고 그 힘은 테라에게 부여할 것.”

신을 죽이지 말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전초극의 권능은 그만큼 강력한 능력이었다. 하나만 있어도 웬만한 존재는 그 권능을 이기지 못할 터였다.

“여덟은 다른 차원계로 가지 말 것.”

이는 여섯 번째 맹약과 비슷한 맹약이었다.

“아홉은 테라를 파괴하지 말 것. 테라 주변의 별과 행성을 탐하지 말 것.”

“열은 자살하지 말 것.”

“이 조건으로 테라와 이차원에 있는 십이천칭을 두어 나, 중립신 엘 마르토 카사다민과 그대가 맹약을 맺는다.”

‘니미.’

드낙이 절로 욕했다. 열 가지에 달하는 목줄이었다. 그리고 자세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악질이었다. 스스로 〈테라〉가 된다면 중립신과 맺은 맹약은 영원히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월의 힘으로 맺어진 맹약이기 때문에 을이 갑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내가 얻는 건 뭡니까?”

“불멸(不滅).”

‘그걸 말이라고···’

엿이나 까먹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100년을 놀다가 죽는 것과 1000년을 일하다가 죽는 것. 이중택일을 하라면 전자를 택할 것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그렇다면 세파리아스를 내세우고, 저는 그냥 일이 끝나면 지구로 보내주십시오.”

중립신은 고개를 저었다.

“드낙. 네가 이 세계에 영혼이 불러온 것은 네가 나의 대계에 적합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너만큼 테라를 지킬 챔피언은 없다. 세파리아스는 챔피언이 될 생각이 없다. 그는 그저 장생(長生)하는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아무것도 못 하는데 살 이유가 어딨습니까?”

그 말에 중립신이 그를 달랬다.

“테라 또한 과학이 꾸준히 발전할 것이다. 언젠가는 네가 살던 곳처럼 될 것이고 초월의 힘이 있으므로 더욱 그 발전 정도는 높을 것이다. 유희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간섭을 하면 안 되지만 말이죠.”

“그 어떤 필멸자도 누리지 못한 삶을 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게 빡빡한 목줄이 아니다. 여자와 관계를 나누어도 좋고, 큰 사업을 해도 상관없다. 내가 말하는 두 번째 목줄은 ‘대업(大業)’에 대한 것이다. 자잘한 업은 상관없다. 테라가 커지는 속도보다 빠르지만 않으면 된다.”

드낙은 손을 주억거렸다.

“받아들이면 초월자가 된 전 외계에서 살게 됩니까?”

“테라에서는 마법으로 만든 의체로 살아가라. 나의 챔피언이니 진짜 인간이나 다름없는 의체다. 그 지식을 제공해주겠다. 십이천칭이 아닌 다른 몇 개의 별을 합쳐서 너의 진체가 지낼 궁궐을 만들어주마.”

“그 어떤 별보다도 빛나고 화려할 것이며, 그 어떤 궁전 보다도 웅장할 것이다.”

그런 말에도 드낙은 마음이 기울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힘을 지닌 지금은 아니었다. 궁궐이 크다고 해서 재미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방 질릴 것이다.

자연스럽게 테라가 아닌 곳에서 살게 된다면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핏빛쥐에 대해서였다. 그가 중립신의 챔피언에게서 벗어나게 된다면, 드낙에게 신앙을 바치는 핏빛쥐의 업이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핏빛쥐들은 어찌 됩니까?”

“그들은 모두 널 위해 죽으며, 너는 그들의 업을 통해서 신성(神性)을 얻게 될 것이다. 자연스러운 이치지.”

드낙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계를 이야기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마치 수억 명의 사람을 희생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보고서를 받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럼 제가 신이 되는 것도 중립신께서 주는 게 아니라, 핏빛쥐에게서 받아야 합니까?”

“자연적으로 소멸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변종종족이 생각보다 잘 발전하고 있어서다. 그들을 놔둬 봤자 악(惡)밖에 되지 않는다. 동시에 너의 힘이 테라를 뛰어넘을 수 있다. 고로 그들은 멸종해야 한다. 테라에는 그들이 없어야 한다.”

“그래도 그건 좀···”

첫 번째 선택을 대충 들은 드낙은 거부감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제가 초월자를 안 하고, 챔피언으로서 살아가면 어찌 됩니까?”

두 번째 선택에 관해서 물었다.

“······”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이제는 저와 타협해야 하지 않습니까? 서로 믿고 갑시다.”

그 말에 중립신이 대답했다.

“나의 챔피언아, 지금 너의 그릇을 보아라. 그 어떤 인간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네가 챔피언으로 남는다면, 이 모든 일을 끝내고 테라에서 추방되어 달에서 살아가며 외계의 침략에 맞서는 도구가 될 뿐이다.”

이 모두 필멸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테라를 위해서였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 너 혼자 희생하라는 소리와 같았다.

드낙이 그 말에 침을 삼켰다.

두 번째 선택을 보니 썩 내키지 않고 좀 비린내가 나던 첫 번째 선택이 최상급 한우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만족하고 첫 번째를 선택하기도 뭣했다.

뭔가가 꺼림직했기 때문이다.

마치, 첫 번째 타협안을 선택하기 위해서 두 번째 타협안을 확 줄이고 자극성을 더해서 말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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